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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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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어떤 어리광도 없이 견딜 수 없는 것을 홀로 견뎌야 하는 어린애처럼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견디고 있었다.”  <층>, 권여선


게으른 변명이지만 권여선이라는 작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좋은 인연을 쉬이 만나기가 어려워 한국 작가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은 ‘견뎌낸다는 것’ 혹은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기억을 한달음에 불러들였다.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 몇년째 말없이 누워있는 젊은 아내에게 다정하게 입맞추며 병원에서 살던 한 남자의 얼굴,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가로등이 나무인 줄 알고 그 아래 옹기종기 피어나던 푸른 이파리들 같은 사소한 것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외면하고자 했던 슬픈 기억이 어느 날 느닷없이 말간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다. 


나는 도시노동자다.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대출금 갚느라 누군가의 욕망에 복무하는 삶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노예 같은 일상을 부정하고자 거짓 행복을 돈주고 사는 소비를 애써 줄이지도 않는다. 가난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 않아 밥그릇을 내동댕이치는 호기는 결코 부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삶이 주는 영혼의 자유가 그리워 경계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무는 신세다. 그런데 뭘까. 계속 저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은. <이모>의 경호(57세)가 죽기 전 했던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의 읊조림이 귓가에 맴돈다.


<이모>는 알류커플(알코올 중독자와 류머티즘 환자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봄밤> 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야기다. 맏이로 태어난 죄로 평생 막내동생의 노름빚을 갚다가 사랑도, 일도, 인생도 모두 잃고 췌장암에 걸려 죽은 윤경호 씨.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와 그에 대한 원망, 자조, 분노는 선연한 핏빛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회색빛 아래 묻혀있다. 삶이 그녀에게 가한 모든 악행에 대해 그녀는 ‘복수’가 아니라 ‘지지 않는 법’을 택했다. 그녀조차 새파란 나이에는 자신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남학생의 손바닥에 담배불을 눌러끄지 않았던가. 자신의 온몸에 담배불을 비벼대는 운명이란 놈 앞에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 - 저당잡히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오롯이 고립을 견뎌내는 - 로 회심의 바디컷을 날리고 링 위에서 퇴장한다. 신형철의 말마따나 그녀는 삶에서 ‘승리’하진 못했지만 결코 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나 예수의 처형처럼 졌지만 실패가 아닌, 초연함만이 가져갈 수 있는 쟁취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엄마가 누워있던 7년 동안 그나마 있던 집이 날아가고,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버는 돈이 모두 흔적없이 빨려들어갈 적에 나는 그나마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삶의 악행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는 분노를 배설할 출구를 찾아야 했고, 그 감정의 배설물을 매일 뒤집어 쓰는 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지지 않는 법’ 대신 ‘탈출’을 택했고, 다른 공간에서 삶을 지속하면서 간헐적인 배설만 견디면 되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이모>의 ‘나’는 글을 쓰는(스스로는 글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 소설가인 <역광>의 ‘그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카메라>에서 우연이라는 가혹한 장난에 무력한 인물들이 스러지고, 당할 적에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모종의 반란을 준비한다. 신의 영역인 ‘우연’ 앞에는 해석하려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필연’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는 반드시 ‘오해’란 녀석이 자생한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의 총합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가 타인이 기억하는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난 글을 쓰는 사람이란 자신의 오감에 ‘닥쳐오는’ 것들을 두고,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눈 앞에 닥쳐오는 것들이 결국은 ‘오해’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서 갈림길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모>의 ‘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이모의 삶을 전달한다. <역광>의 ‘그녀’는 한층 더 자신에게 몰입한 나르시스트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어법과 목소리, 걸음걸이, 인사를 하는 제스처와 식사를 하는 속도에 이르기까지 낱낱의 특징을 관찰하고 탐색”하며, 그들이 내비친 “인색한 단서를 통해 그들이 그녀에게 신인지 악마인지 알아내려” 하고, “자신이 상상한 내용의 오류와 적중률을 계산하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학의 지식이 수립되리라고 믿는” 확신범이다. 자신만이 누군가의 결핍을 이해하고 그 사람도 당연히 내 결핍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확신 또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아픈 사람.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자신의 해석이 ‘오해’일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링 위에서 경기를 리드할지, 끌려갈지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확신’이 ‘병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아는 것이 성숙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그렇다고 성숙이 지상과제냐, 그런 건 또 아니다. 우린 모두 흠결 많은 존재일 뿐이고, 자신의 흠결도, 타인의 흠결도 넉넉히 끌어안는 것이 흠결이 없는 것보다 백배 낫다. 다만 확신이 어긋나는 순간, 또는 확신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 매달릴 것이냐, 선선히 보내줄 것이냐는 선택이 늘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 되는 끔직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역광>, 권여선


권여선, 그녀는 오해하는 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우리는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오해하고 어긋나고 술래잡히고 술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징대지 않는 것. 견디는 것의 숭고함만큼은 전편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역광>의 새내기 소설가의 무력한 다짐을 빌리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어쩌면 예민한 자들이 지고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애이불비(哀而不悲). 그녀가 신문과 나눈 인터뷰 글을 읽고 적잖히 위안이 됐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리란 기대를 품고 글을 쓰는 게 전혀 틀린 선택은 아니라는 위안. 


“만약 제 인생에 술과 소설이 없었다면 제 결벽주의적인 성향이나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등에 비춰볼 때 매우 까다롭고 편협한 인간이 됐을 확률이 높아요. 술을 마시면 제가 하는 짓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의 폭도 넓어진 거죠. 또 제가 이른바 점점 ‘착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나이가 든 이유도 있지만 아마 글을 써오면서 순화된 면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언어 자체가 주는 교정의 힘이 분명히 있거든요. 아마 글을 쓰지 않았으면 저는 더 괴팍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경향신문> 


분명, 결핍을 가진 사람 눈에는 결핍이 더 잘 보인다. <봄밤>의 가슴 시린 알류커플 수환과 영경처럼.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서로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일은 그토록 자연스럽다. 비록 그 확인이 모종의 오해 또는 착각이라 할지라도. <역광>의 ‘그녀’가 자신의 결핍으로 ‘위현’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면, <봄밤>의 알류커플은 자신들의 결핍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내주는 것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그들의 사랑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결핍조차도 서로에게 내어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서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도대체 그 ‘없음’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 감정의 연원은 어디일까. 자신의 결핍을 최대한 인정받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인가, 아니면 이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이 주신 고귀한 능력인가. 관계라는 교환시스템에서 대가를 바란 ‘내어줌’은 이기적 욕구라 불러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한이 많아서’라고 스스로 놀리는 나는 내 안의 결핍으로 인해 누군가의 결핍을 읽어내는 게 빠른 편이다(물론 나의 착각에). 참으로 불가해한 사실은 그 결핍이 크면 클수록 광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러한 광증은 사소한 단서에서 시작한 오해와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알류커플보다는 <역광>의 ‘그녀’에 더 가까운 편인데, 그래서 ‘위현’이 저런 말을 내뱉었을 때(결국은 ‘그녀’의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 그만 떨리고 말았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역광>, 권여선


나는 여전히 내 안의 결핍을 두고 괜찮다, 괜찮다, 쓰다듬어 줄 손길이 그리운 거다. 신기한 듯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그냥 그렇게 생겨서 참 이쁘다고 했던 엄마가 눈물나게 보고 싶은 거다. 권여선, 나는 오늘 그녀에게서 나의 고통이, 나의 슬픔이, 나의 주저함이, 나의 초조함이, 나의 흠결이, 다 괜찮다는 다독임을 받았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건 이런 다독임이 너무나 고마운 줄 알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 그런 다독임을 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등을 보이며 거절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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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벌고 잘 살기 - 나와 그들의 새로운 일하기 실험
김진선 지음 / 슬로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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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2014년 4월 16일 이후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그동안 개인주의적 삶을 반성하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것이 독서토론 모임들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꼭 세월호가 아니었더라도 마흔이라는 나이, 직장에서 점차 줄어드는 나의 입지, 미래에 대한 불투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하며 하나씩 시작했지만 타고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독서토론 모임은 너덧 개까지 늘어났다. 친구들과 하는 문학독토, 회사 직원들과 하는 UX독토, 선배들과 시작한 생태/교육 독토, 참여연대 강의에 다중지성의 정원 세미나까지. 그 와중에 100북스 같은 데서 강연이 있으면 쫓아가기도 하고, 조중걸 선생의 미학강의에도 덜컥 가겠다고 손을 들어버렸다. 지금은 다리를 다쳐 모든 걸 스톱한 상태이지만 친구들과 하는 글쓰기 모임과 앞으로 나의 활동의 기초가 되어줄 생태/교육 독토(현 우리미래)는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시작은 모두 그럴듯했다. 다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목마름이 있던 터라 조금만 건드려주어도 쉽게 넘어왔다.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힘이 되었다. 하지만 지속에는 다른 공력이 필요했다. 가령 나와 생각이 맞지 않을 경우,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낯선 것에 대한 반응이 결국 다음 모임의 지속을 가늠하는 기초가 되었다. 무엇을 읽느냐도 중요했다. 아무리 생각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는 것은 그다지 남지 않았다. 쉽더라도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책이 더 효과적이었다. 혼자 읽을 엄두가 안 나는 것들을 독토를 핑계 삼아 읽으려 했던 욕심은 결국 자신에게 '완독'이라는 허무한 메달만 안겨줄 뿐, 승리의 기쁨도 함께 나눌 사람도 저만치 달아나게 했다. '어려운 책을 소화하는 데 급급해 삶과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자성하는 저자의 독백이 내심 반가웠던 것은 나의 시행착오가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사실 '공부 = 책 읽기'라는 등식은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면 우선 책부터 떠올리는 오랜 습관이 있다. 많은 것들을 책으로 먼저 배웠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잡지를 만들면서 기획회의를 준비할 때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서점과 도서관이었다. 그 주제에 대한 현재 트렌드를 파악하기에는 서점이, 역사적 흐름과 전반적인 배경, 맥락을 파악하기에는 도서관이 알맞았다. 그렇게 일단 세상에 나온 생각들을 한번 일갈해야 좀 알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 같은 것이 솟구쳤다. 서점과 도서관에만 가면 맥박이 뛰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삶의 에너지에 강력한 전원을 공급받은 양 짜릿했다. 어쩌면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처럼 공감하는 말도 없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를 권장하고, 그에 익숙하게 키워진 착실한 모범생으로서 다른 방법과 다른 답을 찾고자 하는 내면적 욕구를 무던히 죽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익숙한 습관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그 분야를 꿰뚫고 통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정통인 사람의 책을 찾아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마치 영어문장 1200개를 외우면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고, 정석을 통째로 외워버리면 수학을 잘하게 된다는 생각이 다른 학문 분야에도 확장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의 초중고 학업 능력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무엇보다 학문을 파고들어 가며 느낄 수 있는 희열을 거세한 학습법이기 때문에 후반전에서 거의 낙오한다. 평생 공부인데, 일단 그런 낮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더 나아갈 힘을 모두 소진하고 마는 것이다. 여전히 과학, 인문 분야에서도 암기와 반복을 강조하는 학습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 눈으로 읽고 마치 제 것인 양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시켜 자신의 언어로 구술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독서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그들이 주창하는 구술과 암송은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암송의 목적이 남들에게 잘난 척하고, 그것을 '안다'라는 사실로 자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복적으로 사색하고, 곱씹으며, 그렇게 정말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의 삶에 적용하고 연결하려는 노력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나는 더 알고 싶은 욕망으로 허우적거렸다. 하나를 읽으면 더 읽어야 할 책이 한보따리가 늘었다. 늘 조금만 빌려오자 마음 먹고 도서관을 가지만, 나올 때는 남편 대출증까지 탈탈 털어 한보따리씩 지고 왔다. 그 중에는 필사하며 심독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목차를 보고 주요 내용만 발췌해서 읽는 책도 있고, 결국 반납할 때까지 손을 대지 못하는 책도 있다. 뭐든 하나에 꽂히면 지뢰찾기게임처럼 한쪽 영역을 모두 다 짚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 크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나의 생김이고, 그 노력을 통해 진주를 발견하는 보람도 있으니 잘못된 악습이라고만 치부할 것은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욕심을 덜어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되니까. 점차 빌려오는 양도 조금씩 줄고, 빌려온 책을 완독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으니 경과는 나쁘지 않다. 공부를 할 때, 책에만 의존하는 경향도 스스로 경계하고 있으니 그 또한 매우 바람직하다. 


독서는 결국 공부의 한 방법이다. 이때 독서는 '통독'과 '완독'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독서가 진짜 공부가 되려면 ‘숙독(熟讀)'과 ‘지독(遲讀)',’완독(緩讀)',’미독(味讀)'이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 사이가 가장 치열한 '수행처'이고, '실험장'이며, '학습장'인 것이다. 아는 것은 공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는 것을 행할 때 그것이 진짜 공부가 된다. 공부란 결국 내가 살면서 겪는 의문과 시행착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보다 나은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우보(牛步)'인 것이다. 남들 앞에서 아는 것을 자랑하고, 위에 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를 깨닫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타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이어야 한다. 호기심을 적절히 주체하고, 무엇보다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한다. 공부는 삶의 다름 아니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지속해야 할 일이다. 내일 당장 시험을 앞둔 공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면, 이 불같은 욕망이 좀 수그러들 수 있을까.


사람 사이 관계 맺기

친구들과 하는 문학독토에서 가치관이 다른 언니와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서로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그저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었는데 책을 통해 삶의 가치를 꺼내놓다 보니 막연하게 느껴졌던 거리감이 실체를 띠고 나타났다. 중산층, 가정주부,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안온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의 도발적인 생각과 말은 부담이 되었고, 그 부담에서 나오는 반작용이 나 또한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닌 사람에게 너무 애쓰지 말자,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수업에서는 나름 진보라고 생각하는 역사교사의 터무니없는 성차별 의식을 듣고 피가 더워지는 걸 느꼈다. 정의당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과시하는 부르주아적 삶에 대해서는 갸우뚱하다가 다소 폭력적인 발언에 씁쓸해하며 수강을 접었다. 직원들과 하는 독토에서는 맥락없이 부유하는 생각들로 가득 찬 상대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몹시도 피곤하게 여겨졌다.


독토는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자리다. 하나의 텍스트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읽은 것을 확인하며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고 보다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중심을 책에 두느냐, 사람에 두느냐는 각각의 독토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배움에 비중을 두는 경우에는 각자의 개성을 죽이고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노력을 들인다. 풍부한 토론을 목적에 두는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견이 있을 때 서둘러 합의하기보다는 각자의 입장에 대해서 충분히 서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 원칙들이 머릿속에 있었지만 실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배경과 조건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얕잡아 본다거나 무시하는 우를 종종 범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라는 생각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지 않은 방식과 태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종종 분개했다. 


"차이를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왜 그것을 문제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같아서 함께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맞추는 과정이 즐거운 것 아닐까. 서로의 차이를 좁혀가며 조금씩 '함께'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일하기 방식일 테니 말이다." - P.87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차이에 익숙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남편이라는 동반자를 만나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늘 나와 다른 그에게 종종 놀란다. 다시 말하면 그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름과 차이가 창조의 근본이라는 책들은 두루 읽어 아름답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내 삶에서 그 다름과 차이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적어도 아는 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나와 다른 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셰어하우스에서 같이 살기로 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지향하며 함께 마을을 꾸려 정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극심하게 겪는 어려움도 바로 그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어디선가 공동체 운동이 실패로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나와 코드가 달라서'란 이야기를 듣고 웃었던 적이 있다. 오죽하면 마을운동의 성패는 각자의 ‘영성’(주1)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까. 회사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커뮤니케이션 미스, 혹은 부재는 당췌 나와 다른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대한민국 교육의 희생자들의 지옥구덩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사적인 친밀감이 있는 관계는 아니지만, 가치관이 공명한다고 느껴질 때 관계에서 신뢰가 생기는 것 같아요." - P.45


인문학 독서모임에서 시작해 전자책출판협동조합까지 예기치 않았던 삶의 반전과 확장을 지속하고 있는 제현주 대표는 카이스트, 맥킨지 컨설팅 출신의 재원이다. 딱 봐도 이성과 감성의 비율이 90:10으로 보이는 그녀는 명석함에 비해 살가움은 부족한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고 또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결행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책의 실험'이라는 지속가능한 출판을 모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흥미롭기만 하다. 무조건 일을 같이하려면 뜨겁게 심장이 맞부딪혀야 하고, 술이라는 윤활유로 끈끈하게 엮여야 하고,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살갑게 나누며 친밀감을 형성해야 한다는 익숙한 고정관념에서 좀 떨어져 있다. 대신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자신이 정확히 알고, 그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부담 주지 않고 지속하는 관계. 어쩌면 그 느슨하고 은근한 관계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와 다르다고 보채거나 짜증 내지 않고, 어차피 다 다른 거니까 라며 냉소적으로 외면하지 않고, 주의 깊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공명을 일으키는 신뢰야말로 시간을 통해 얻어낸 값진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름에 대한 인정 못지않게 관계의 온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의 지속은 물론 건강까지 책임지는 척도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일이란

저자 김진선은 첫 직장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으로 포털 사이트 네이버까지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2년 동안 새로운 일하기 모델을 탐색하면서 든 질문에 대한 실험을 이 책 <적당히 벌어 잘 살기>에 담아 출간했다. 스스로 '일과 삶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 탐색과 실험'이라는 주제로 명명한 그녀의 보고서는 몇 가지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그녀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1. 밥이 되는 공부가 가능할까란 '질문'을 세우고, '그래서 만났다' : 남산강학원, 롤링다이스, 이런 식으로 보고서를 정리했다. 2. 친구들과 꾸린 재미있는 일이 밥벌이가 될까? 3.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 어떻게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4. 적게 일하고 잘 살기 위해 어떤 활동을 모색할까? 등이 그녀가 설정한 질문이다. 질문을 세우고 답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 남다르지 않아 뜻하지 않게 전율하며 읽었다. 회사에서 작게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여기 저기 학습공동체를 기웃거리고, 친구들과 작당하여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고, 그 와중에 필연적인 갈등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갔던 그녀의 여정이 마치 내 얘기처럼 들려 반가웠다. 어쩌면 나의 고민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미생들의 고민이구나, 공감하며 위안이 되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논리는 이 시대의 요구와 맞닿아 있고, 그것을 성찰해볼 기회없이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양 착각하며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3만엔 비즈니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의 저자는 우리의 삶이 진정 행복한지 묻는다.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이 하고 있진 않은지, 주5일 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며 업무에 허덕이진 않은지,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말에 취미 활동을 몰아서 하느라 더 바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주말 활동에 더 많은 돈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 P.217


가슴이 뜨끔했다. 소비를 통해 욕구를 해소하고,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스스로 노예적 삶을 승인하고 있는 나에 대한 뼈아픈 일침이었다.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면 되는데, 조금이라도 많이 쓸 생각에 자신을 함부로 내돌린 것은 아닌지.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라고 했던 존 러스킨의 말이, "돈과 지위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인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생각하는 능력을 소멸시켜버렸다."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이 떠올랐다. 시급 6,030원을 받으며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사치스러운 고민으로 들릴까. 월급도둑 운운하며 태업을 걱정하는 사장님들에겐 씨나락까먹는 소리일까.

실제로 일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왔다. 궁극적으로 높은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고, 원래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신이 주신 소명이라는 노동윤리는 떠도는 한량과 베짱이들을 공장으로 불러들여 고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해주기도 했지만 현재 발달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맑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며 필요한 만큼 노동하고 가져가야 한다고, 한나 아렌트는 일을 생존을 위한 노동, 작업, 그리고 정치적 활동으로 세분화했다. 현대의 능력주의와 소비주의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고, 소비라는 강력한 최음제로 자본주의를 돌릴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체제에 그닥 기여할 수 없는 인력들은 무능력이라는 오명을 쓰고, 점차 그 수를 늘여가고 있다. 과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금융자산을 통해 일하지 않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저자는 무엇 하나 정답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답을 찾아 다양한 색깔과 형태로 길을 만들어나가듯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이제 그 질문은 책장을 넘어 나에게 당도했다. 나는 이 질문을 어떻게 변형시켜 어떤 길을 만들어나가는 데 쓰이게 할 것인가. 언제나 시작은 지금과 여기. 혼자가 아닌 지금 옆에 잡은 작은 손. 타인에 대한 이해가 결국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사실. 나의 호흡을 알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것. 경제적 건전성을 확보하는 일.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차분히 하루하루 들여다보면 나 자신의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날 다리 골절로 흐르는 시간을 천천히 보게 된 이 시간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삶의 극적인 순간들이 돌이켜보면 모두 의당 그래야 했던 일로 여겨지는 것은 요즘 내가 불교책을 너무 많이 봐서 일까. 그래도 이 순간, 다리뼈가 부러져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모두 숙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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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을 ‘철학’이라 명명하도록 합시다. 이것을 철학이라 명명한다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 <주체의 해석학>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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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6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앎의 즐거움을 누린다면 `공부=독서`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해요. 아주 바람직한 자세인거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취업, 자기계발 목적으로 `공부=독서` 공식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독서로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회에 성공하는 사람으로 보는 반면에 책 안 읽고, 독서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규정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계발 목적으로 책을 억지로 읽으려고 하는데, 독서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나뭇잎처럼 2016-09-06 20:53   좋아요 1 | URL
`앎의 즐거움’은 곧 결국 내가 몰랐다는 걸 알게 되는 기쁨,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닫는 희열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앎은 반드시 책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삶 속에서도 깨우칠 수 있는 것이겠구요. 그러니 공부는 곧 독서이자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글쓰기와도 동의어가 될 수 있겠습니다. 독서가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어 쓸모 없음의 쓸모 있는 가치를 일깨우는 인문학이 어느덧 액세서리가 되는 희한한 시대, 이곳에서 독서의 참의미에 충실한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독서에 대한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사랑하는 책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자칫 독서가 자신의 도그마를 강화하는 재료로 쓰이면 곤란하니까요. 역사적인 첫 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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