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은 일하다 보면 버스 끊기기가 일쑤일 정도로 정말 바빴다.
새삼 회사일로 생색을 내는 건 딸아이의 겨울방학 준비를 못 한 것에 대한 변명이다.
점심 문제 때문에 내가 아는 모 단체의 지역아동센터에 딸아이를 보내기로 뒷공작을 했는데,
아뿔사, 날치기 통과의 여파로 지역아동센터 급식예산이 날라갔다.
애당초 저소득 자녀를 대상으로만 운영되어야 하는 곳에 편법으로 집어넣었던 건데,
차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 다니게 할 낯짝이 없었다.
밥 주는 학원을 다시 수소문할 새도 없이, 생활계획표 한 장 그릴 시간도 없이 방학이 되었다. 

일단 오전에는 집에서 혼자 자율학습 및 놀이를 하다가,
점심은 엄마 또는 아빠가 집에 들러 밥을 차려주고,
오후에는 태권도-피아노-미술을 다니기로 부랴부랴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자율학습 교재인데, 서점에 들러 조사도 못 해보고 덥석 베스트셀러를 사 버렸다. 

 

 

 

 

 

 

'기적의 수학 문장제'는 양반이다.
하루 분량이 3쪽 내외인데, 2-3학년용이라 문제가 쉬워 10분도 안 되어 뚝딱 푼다.
문제는 '기적의 계산법'.
한 쪽당 자그마치 30개의 계산문제가 빼곡하고, 하루 분량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구구단 문제만 있어 하루 5쪽을 풀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자릿수가 커지면서 딸아이가 슬금슬금 버거워졌나 보다.
어느 순간 답안지를 베낀다는 심증이 있었는데, 결국 오늘 물증을 잡고야 만 것이다. 

채점 후 딸아이를 방으로 불렀다.
엄마에게 숨기는 거 없냐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혼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딸아이는 대뜸 눈물을 글썽이며 순순히 실토를 했고, 난 정말 슬퍼졌다.
분량을 다 못 풀면 엄마가 혼낼까봐 무서워서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놀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을 못 느끼는 걸까?
왜 엄마에게 솔직하게 분량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안 한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옆지기와 셋이서 한참 이야기 나누어 보니
'엄마에게 칭찬받는 딸"이 되고 싶은 욕심이 거짓말을 불러왔다는 거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옆지기는 애당초 지루한 교재를 자율학습용으로 고른 엄마야말로
딸아이를 거짓말 하도록 몰아세운 범인이라며 벌 주고 싶어 했다. -.-;;
각설하고 어쨌든 교훈은 남겨야 할 거 같아 옆지기와 의논 끝에 몇 가지 벌을 정했다. 

1. '기적의 계산법' 분량을 줄인다.
일단 시험삼아 내일 3쪽으로 줄이기로 했다.
각 쪽마다 걸린 시간을 기록한 뒤 2쪽으로 더 줄일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2. '기적의 계산법'과 '기적의 수학 문장제' 뒷면의 답안지를 잘라낸다.
잘라진 책을 볼 때마다 너를 믿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는 걸 조금 부끄러워하되,
더 중요한 건 앞으로는 분발해 혼자 목표량을 세워 정직하게 공부하자고 다짐하는 것. 

3. 하루에 1권씩 독서록을 쓴다.
금요일까지 매일 1권, 총 4권의 독서록을 쓰기로 했다.
정말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다면 진실한 노력을 보여 달라고 했다.
랑랑별 때때롱에서 순수한 아이를 귀하게 여긴 권정생 선생님의 마음을 배웠으면 했고,
이솝우화에서는 거짓말의 교훈을 찾아내길 바랬다.
수학 동화 2권에서는 수학이 얼마나 재밌는 과목인지 느꼈으면 좋겠다.
4권 다 읽은 책이지만 새로 읽고 그날 읽은 만큼만 쓰라고 했다.

 

 

 

 

 

 

 

  

 

 

 

 

 

 

 

 

엄마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은 이 쪽팔린 일을 공개하는 것. 내가 범인임을 인정하는 것.
옆지기가 내게 내리는 벌은... 딸아이랑 둘만 맛있는 것도 보고 놀러가는 것. 쳇.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11-01-04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어는 영어 숙제를 하다 마로 같은 행동을 하는 걸 현장에서 발각나버리는 바람에...
마침 마님이 외출 중이라 문제지 들고 손 들라고 벌을 세웠다죠..

잠시 후...

'우아악 팔이 뜨거워...!' 그 말에 웃겨서 엄하게 벌주려던 계획이 날아갔던 것이 생각나네요..

마노아 2011-01-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계산법인 걸요. 마로에게 가장 좋은 계산이고요.^^

세실 2011-01-04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때가 있더라구요. 보림인 베낀적 없는데 규환이가 한동안 베꼈답니다. 모른척 넘어가 주었어요. 물론 답안지는 숨겼구요. ㅠ

하루에 1권씩 독서록을 쓰는 착한 마로네요.

조선인 2011-01-04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쿡쿡
마노아님, 님이 격려해주니 마음이 놓여요.
세실님, 아, 집집마다 있는 일이군요. 어제는 정말 슬펐는데, 오늘은 좀 기운이 나요.

울보 2011-01-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안쓰러운마음도 들고 속상한 마음도 들고 참 여러마음이 님 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했을것같아요,
그래도 마로가 조금씩 커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자아자 화이팅하자구요, 엄마가 이런일로 의기소침하거나 힘들어하면 아이들은 또 얼마나 괴롭겠어요, 엄마들이 힘내자구요,,

마녀고양이 2011-01-0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집은여, 1월 3일부터 복습의 의미로, 문제집 4페이지씩 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저도 까먹고 코알라도 까먹고... 머 이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는. ㅡㅡ;;;;

마로 혼자서 이거저거 하기가 벅찰거 같아요. ㅠ
차라리 오전에는 맘대로 놀기.. 이런건 어떨까요? 내내 오락하고 놀더라도 말이죠.
참... 좋은 따님 두셨어요, 진심으로요.

조선인 2011-01-04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그래요, 힘내야죠. 아자아자.
마녀고양이님, 오후에 하는 학원이 죄다 노는 용도라... 가계를 생각해서도 하나 줄이고 싶은데, 이 녀석이 포기를 안 하네요. 자율학습은 최소한의 공부습관을 들이기 위한 거였는데, 분량 오류로 엄한 애를 잡았다고 후회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무스탕 2011-01-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안지 베끼기는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지요. ㅎㅎㅎ
벅찬 부분은 엄마랑 의논을 해서 해결 방법을 찾았으면 좋았을텐데 마로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네요. 이런것도 시행착오를 거쳐서 다음부터는 터지기(?) 전에 의논을 할테지요.
그래도 마로 참 씩씩해요. 많이 칭찬해 주세요 ^^

BRINY 2011-01-0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 한번 없이 어린 시절 보낸 사람 있을까요?
답안지 베끼기도 못해서 속터지게하는 애들도 많답니다.
(제가 이런 '위로'를 하면 '네 애가 아니어서 그렇지'라는 표정이 되는 어머님들도 계시긴합니다만)

조선인 2011-01-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하하 일단 벌을 잘 수행하면 그걸로 칭찬하려구요. ㅋㅋ
briny님, 답안지 베끼기도 못 하는 게 왜 속이 터질까 갸우뚱해집니다만, 어쨌든 위로가 됩니다. ㅎㅎ

BRINY 2011-01-0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제 제출만 해도 기본점수를 주는 과목들이 있어요. 그러면 인터넷검색자료건 친구 과제건 무조건 베껴서라도 내야할텐데, 무기력하게 베끼기조차 안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거든요.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쉬운 문제를 내도 문제조차 읽지 않고 그냥 백지 내버리는 학생들도 있구요. 그런 자포자기 상태 학생들 보면 속터져버립니다. (앗, 저만 속터지는걸까요?)

무스탕 2011-01-04 17:09   좋아요 0 | URL
아뇨. briny님 말씀대로 옆에서 봐도 속터져요.
저도 회사일 때문에 그런거 많이 보거든요. 문제는 읽지도 않고 그저 3번만 찍어서 내는 애들요. 시험 시작하면 바로 엎어져 잠자기시작해서 끝나기 10분전까지 자고 깨서는 3번만 주루룩~ 찍고는 퇴실... -_-;

BRINY 2011-01-05 10:45   좋아요 0 | URL
그런 사람들은 왜 꼭 3번으로 찍는 걸까요? 그것도 궁금해지네요.

2011-01-05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1-01-0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아, 자포자기, 이제 이해됩니다.
무스탕님, 으... 그렇군요.
속닥님, 아... 하루 2쪽씩 시간 재 가며... 시간 재며 풀게 하라는 지침은 읽었는데, 솔직히 흘렸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에, 또, 지역아동센터는... 제가 급식비를 낸다고 해결될 수 없는 '인건비' 문제가 발생했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던 지라. 쩝.
briny님, ㅋㅋㅋ 한국사람이 원체 3을 좋아하잖아요.

같은하늘 2011-01-07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일도 있군요.
엄마, 아빠가 모두 직장을 다니시니 마로가 혼자 힘들겠어요.ㅜㅜ
그래도 대견하게 잘 지내고 있는 마로 많이 칭찬해 주셔야할 것 같아요.
우리 아이는 제가 옆에서 닥달을 해도 이제는 머리 좀 컸다고 딴청 피우거든요.-.-;;;

조선인 2011-01-0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하늘님, 아이를 키우다보면 정말 천당과 지옥은 수시로 오가나봐요. ㅋㄷㅋㄷ

2011-01-0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어릴 때 주구장창 학습지 풀어야 했는데 정말 지겹고 힘들었거든요. 참 많이도 답 베껴서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나쁜 일인 줄도 몰랐구요. 엄마를 기쁘게 한다? 아뇨, 말해봐야 "할 일은 해야하니까"라는 답이 올 것 같아, 그러니까 긁어부스럼이라는 생각에(괜히 말해봐야 엄마 감시만 심해질거라는...) 답 베끼고 말았죠, 뭐. 그런데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울 엄니 다 알고 계셨더만요. 그러면서도 왜 학습지는 주구장창 시키셨을까요?

개인적으로 "기적의" 라던가 "~만 하면 완벽히 한다" 따위의 제목을 가진 책들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어요. 그럼에도 "기적의 한글학습" 사서 애 시키고 있다죠. 읽어보니 다른 애들은 수월하게 익혔다는 것 같은데 우리애는 다 헛갈려해요. 아직도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 때는 언제 올까 싶기도 하구..

여튼, 그런데 말이죠.. 왜 마로의 방학 생활 및 학습 계획은 엄마만의 몫인가요? 당사자도 아닌데 살짝 억울해요.

조선인 2011-01-1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귄, 우리 부부 사이에 억울한 건 옆지기가 더 할 듯. 나보다 집안일 많이 한다고 꽤나 불만이거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