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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ㅣ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평점 :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즈, Dame Kiri Te Kanawa sings>
시리도록 하얀 책장을 넘기며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을 쥐어 뜯으며, 가슴을 쥐어 뜯으며 탄식하고 또 탄식할 수 밖에는 없었다. 이런 일을 이제서야 책으로 접하게 된 나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고 그에 따라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답답하게 먹먹한 가슴을 어찌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힘들었다. 계속 찡하게 아려오는 코끝이 신경쓰였고 뿌옇게 흐려진 눈앞이 거슬렸다. 아, 이 애통함을 어찌 전할 수 있을까.
어릴 적 경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성실하고도 정의로운 용사였다. 고모부가 경찰이었고 그 분은 언제나 웃으셨다. 늘 착하셨고 듬직했다. 그래서 나의 머릿속엔 경찰은 착하다,는 이미지가 콕 하고 박혀버렸다. 또 중국 여행을 가서 본 제복입은 멋지고 잘생긴 경찰들로 인해 경찰은 멋있다,는 이미지까지도 박혀버렸다. 하지만 착하고 멋있기는 개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죄 없는 시민을 향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밟는, 무자비하고 몰상식한 인간들이었다.
간이 의무대를 차려놓은 교실은 더 아수라장이었다. 대부분이 이마가 깨진 사람들이었는데도 얌전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얼굴이 피칠갑이 되어 부어오른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양호한 편이었다. 네댓 사람이 계속 사람들을 들고 들어오는데 사지를 못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머리가 조금 깨진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계속 들려오는 사람들을 먼저 돌보라고 몇 번이나 자기 차례를 양보해야 했다. (중략)
나중엔 정말 응급처치를 해줄 아무런 대안들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에게 빨간 소독약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의식을 잃고 실려와 바닥에 동댕이쳐진 환자들은 이미 넘쳐나고......
그런데도 미친 전투경찰들은 바로 문 앞까지 다가왔다. 우리가 있는 교실 복도 창을 모두 깨뜨리며 가장 잔인한 욕설과 인상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경찰이 아니었다. 밖에서 전투경찰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기 우해 우리는 벽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었다. " 야, 새끼들아. 여긴 환자들 있는 곳이라고...... 사람 죽어가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야. "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돌아온 대답은 기가 막혔다. " 이 개새끼들 니들 오늘 다 죽었어. " 그들은 환자까지도 다시 짓밟을 태세였다.
p. 168-169
한국의 현대사를 다룬 영화를, 얼마 전 '부러진 화살'을 보며 경찰과 시민의 대립 장면을 접할 수 있었다. 제복과 방패로 시민 앞을 둘러싼 경찰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 하고 되짚어보니 ' 그래, 저건 다 옛날 일일 뿐이지 '하고서는 말했던 것 같다. 제대로 민주주의가 갖춰진 현재, 저런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위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년도는 2006년. 21세기에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위 본문을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대추 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을을, 아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자신들의 인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과 대항했다. 무장한 경찰들을 보고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들의 자존심. 하지만 자존심만으로 무장경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송경동 시인은 머리에 벽돌을 맞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의식을 잃었다.
하, 전투경찰. 이토록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하고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전투경찰의 일기를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단지 훈련소에서 줄 잘못 섰다는 이유로 전 국민과 고참들에게 욕 먹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고 우리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글이었다. 자신들도 한 부모의 자식들이라고, 우리가 시위를 제지하는 것도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인을 지키고 싶어 전경이 된 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은 그저 사회에서의 치안 업무를 당당히 하기위해 전투 경찰이 된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정치인의 똥개 새끼들...'하는 욕을 들으며 시민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창에 맞는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본문을 읽으며 똑같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정치인의 똥개 새끼들...'하고 욕을 했던 내 모습과 눈물을 흘리며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락을 까먹는 전경들의 모습이 겹쳐지나갔다. 아아, 대체 이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한진중공업에 관한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김진숙'이라는 이름만 알았고, '김여진'이라는 배우가 한진중공업 어쩌고해서 경찰에 불려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김진숙이라는 여성이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한심하게도 그 크레인이라는 것을 굴삭시 버켓이란 이미지로 떠올리고 있었다. 흙이 잔뜩 굳어있는 버켓에 올라가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크레인이 35m라는 것을 알기에는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언젠가 김진숙님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 알라딘에는 많은 글들이 게재되었다. 알라딘 입성 초반, 아주 혈기왕성했던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 분의 사진은 관중들을 향해 외치던 멋지고 당당한 흑발의 여성이었는데 알라딘에서 그녀의 모습은 초라한 백발의 여성노동인이었다. 그 충격에 나는 잠깐 "아아, 김진숙 님이 이런 분이셨구나"하고서는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 활기찬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진숙님이 노동인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생각치 못했다. 그냥 인권 단체에서 일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여성의 몸으로서 남자도 하기 힘든 용접공을 하다니. 왠지 남녀차별의 분위기가 풍기는 생각인줄은 알지만 여성 노동자라니, 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성의 몸으로 엄청난 혹사의 일을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고있기에 나는 더더욱 그랬다. 여성노동자라니...
송경동 시인이 군데군데 뽑아놓은 김진숙님의 <소금꽃나무>라는 책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울컥했다. 이런 끔찍한 생활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써 간접적으로 접하는 나도 이러한 일을 마주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직접 겪은 자들은 도대체 어떠한 고통을 품고 있을까. 대체...
이소선 어머니가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분이 타계하신 날. 나는 뭐지?하는 마음으로 클릭했다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또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두번 놀랐다. 그리고는 또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에 글을 쓴 송경동 시인에 다시 놀랐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글귀를 읽으며 이해하지 못했던 때와는 달리 너무나도 어머니의 마음이 잘 이해되었다. 나이에 상관않고 언제나 당당하고 또 씩씩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우셨고, 응원하셨고, 도우신 어머니. 희망버스를 타고 크레인에 가 김진숙을 만나는 것이 유언이었다는 어머니. 비정규직을 철폐하기 위해 한 몸 바치셨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께
전태일을 아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바늘구멍 같은 어머니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갔기에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당신은 가난하고 힘없는 아들을 가둔 벽을 허물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만인을 살리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에미 노릇’으로 지켰습니다
당신에게는 배고픔도 슬픔도 고통도 분노도 외로움도
사랑이었습니다
독재정권의 연행도 구속도 구타도
사랑이었습니다
평화시장을 살리고 유가협을 세우고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힘이었습니다
전태일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를 것입니다
당신은 만인의 해방을 위한 길을
오직 사랑으로 걸어갔기에
영원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고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2년 전부터 알아오던 한 누나가 있다. 그 누나는 해양 대학을 나와 선장일을 하다가 여자의 몸으로 배를 타는 것은 결혼에 좋지못하다고 생각하여 부모님이 있는 시골로 내려와서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매일 성실하게 살았다. 첫번째 시험은 합격하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말도 없던 것을 보아서는 그랬던 것 같다. 대신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군청의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 누나의 친구가 농협의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배가 아프다며 웃으며 말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하면 인간 취급도 못받지"하고서는. 그리고 이제야 이 책을 읽고 비정규직의 애통함을 알 수 있었다. 나도 한 번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편에 함께 서서 응원해주고 싶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