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을 오래 하고 글과도 멀어졌다.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2016년이었던가. 책을 읽는 대신 이런저런 일을 했다. 국어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했으며 각종 대외활동에 참여했다. 한때는 농구에 빠져서 대한체육회 대학생 기자단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는데 그 덕에 진천 선수촌에도 가 봤다. 세 번 정도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선수 식당에 들러 턱이 빠져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신들의 만찬이 있다면 분명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다. 고백건대, 그냥 놀았다. 하필 코로나가 겹치다 보니 눈 감았다 뜨니 일 년, 이 년이 훌쩍 지나갔다. 어디 제대로 놀러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시간을 썩히는 날이 늘었다. 설상가상으로 영화도 잘 안 보게 됐고…… 집에서 뭘 했더라. 게임을 했던가. 드라마를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연애도 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코로나가 퍼진 땅에서 연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년 드디어 복학을 했다. 호기롭게도 소설 창작 수업을 신청했다. 글을 얼마 만에 써 보는 거야…… 햇수로 치면 6년? 7년? 한유주 작가님이 수업을 진행하셔서 작가님의 책을 샀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 첫 장을 펴고 포기하는 일을 두세 차례 반복했다(사실 지금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학기 초부터 머릿속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다. 굿을 하는 박수 무당이 떠나질 않았고, 관련된 내용을 찾다 보니 어쩌다 세월호 이야기까지 쓰고 싶었다. 학교 광장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데 겨우내 가지마다 노란 리본이 묶여 흩날렸다. 정말이지, 너무 큰 이야기 아닌가. 결국 망쳤다. 합평 일이 당도했는데도 겨우 네 쪽밖에 소설을 쓰지 못했고, 민망하게도 그 네 쪽의 소설만으로 합평을 받았다. 그때 소설의 도입부로 가져왔던 그림이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었다. 그래도 나름……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고작 네 쪽이지만 쓰는 게 어찌나 힘들고 고통스럽던지. 일전에 '혼불'의 최명희 작가님이 당신께서는 바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새기는 심정으로 쓴다고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첫 단락만 가져와 볼까. 글자는 작게, 9 포인트로.
장 폴 마라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독재자에 가까웠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공포 정치를 선도했다. 과격한 숙청으로 온건파의 반발을 산 마라는 결국 집 욕조에서 피살당했다. 피부병을 앓았으므로 주로 치료약을 섞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업무를 봤고, 지저분한 욕실에 몸을 누인 채 한 여인이 들고 온 조리용 식칼에 심장을 찔렸다. 여인은 열려있던 문을 통해 들어왔다. 인민과의 소통을 표방했던 마라는 집의 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여인은 곧 단두대에 섰고, 마라는 종내 살이 문드러져 탈락할 때까지 천천히 썩어갔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최후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안에서 마라는 평온히 눈을 감았다. 심한 가려움증으로 부르트고, 오랜 시간 물에 불어 푸르렀을 마라의 살갗은 도자기의 그것처럼 하얗고 매끄러웠다. 반신욕을 하듯, 정돈된 욕실에서 저항과 부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마라는 가만히 몸을 늘어뜨렸다. 그림 바깥을 향해 수평으로 기울어진 얼굴, 입꼬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옅은 미소가 어렸다. 죽음을 예견하고 스스로 십자가의 오른, 기꺼이 못 박는 자들에게 손과 발을 내어준…….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 한 생애 위로 그리스도의 성채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 그림 앞의 너, 갈빛으로 은은히 내리는 서광에 눈을 빼앗긴 채 마라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그림 한 귀퉁이로부터 쏟아지는 조광이 마라의 전신을 감싸고 있다. 너는 의아하다. 마라는 구원받은 것일까? 쇄골 아래 깊은 자상을 남긴 가해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흰 광목천을 순식간에 적실 만한 핏물로써 모든 죄가 씻겨나간 것일까? 마라는 그렇게 믿었기에 저토록 순응하는 얼굴로 자기의 임종을 맞을 수 있었을까, 너는 마라의 감은 눈꺼풀 너머로 묻는다.
합평에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작가님이 출석부대로 이름을 호명하자 모두가 머뭇거리더니 '어렵다'는 평을 했다. 할머니를 주제로 소설을 써왔던 남자 후배는 첫 단락을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전체를 못 읽었다고 고백했다. 다시 읽어보니 과했던 측면이 있는 것도 같다. 단어도 그렇고 난삽한 측면도 있다. 저러니까 열 페이지를 못 채웠지. 저 첫 단락을 쓰는 데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결국 최종본 기한을 무려 이틀이나 넘겨, 성적 발표일 직전 새벽에야 메일로 보내드렸다. 처음에 고안했던 굿으로써 영혼을 달래는, 한 편의 무가 같은 소설은 온데간데 없고…… 실망스러웠다. 다른 수업은 어땠더라. 다 국문과 수업이라 기억도 안 난다.
나는 소설은 더는 안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상하게 단념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하면 쓸 수 있겠는데? 하는 이상한 야심 같은 게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너무 재밌는 거다. 한 학기 동안 강독한 소설 중 정이현 작가의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가 좋았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풍금이 있던 자리'도 생각이 나고…… 좋았던 구절은,
그런데 어떻게 페이스북에서 절 찾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나중에 내가 물었을 때 조은자 여사는 여전히 친절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21세기잖니.
본성이 성실한 학생은 못 되다 보니 강독 소설도 미루고 미루다가 수업을 앞두고서야 읽곤 했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강의실은 대체로 비어 있었다. 대부분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 탓이었다. 빈 강의실에 들어가서, 날이 추우니 히터를 틀고 소설을 읽었다. 그때 강의실에 같이 있던 동기와는, 강의실에 같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급속도로 친해졌다. 정이현의 소설뿐 아니라 강화길, 김멜라 작가의 소설도 읽었고…… 이것들은 그렇게까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었고…….
여름 방학에는 아무래도 미리 소설을 써둬야겠다는 생각에 같은 과 사람들과 소설 스터디를 결성했다. 그래봐야 세 명밖에 없는 초라한 스터디였지만 나름 철저히 규칙을 정해 진행했다. 이번엔 뭘 쓸까 고민하던 찰나 휴대전화 사진 갤러리를 뒤적거리다 몇 년 전 영국에서 찍은 정체불명의 동상 몇 점을 발견했다. 상체는 땅에 묻혀 있는 형태였고, 새벽에 버스를 잘못 내린 탓에 우연히 지나치게 된 동상이었다. 소설적으로 건드릴 만하겠는데, 싶어서 당장에 쓰기 시작했다. 아침 열 시부터 인적 드문 스타벅스 카페를 찾아가 오전 내, 오후 내 써서 반 장을 채웠다. 그게 끝이었다. 방학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놀았다. 누워 있거나 영화를 보거나,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밖으로 나다녔다. 내 소설 제출일에 임박해서는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를 핑계로 소설 스터디는 유야무야됐다.
또 무슨 호기였는지 이 학기에는 무려 소설 수업 두 개에 시 창작 수업 하나를 신청했다. 창작 수업이 무려 세 개. 강의실에 같이 있던 동기는, 이제는 급속도로 친해져버린 동기가 내게 미쳤냐고 물었다. 한 학기에 소설 수업 하나만 들어도 힘든데 두 개나 듣고, 거기에다가 시 수업까지 듣는다고? 직전 학기에 소설 네 쪽을 써낸 네가? 하지만 왠지 두렵지가 않았다. 나에겐 방학 동안 써둔 반 페이지의 소설 첫 단락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내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하나는 염승숙 작가님, 하나는 백수린 작가님이었다. 이제와 생각하지만 언제 저런 작가님들께 수업을 들어보겠는가. 대학생으로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힘들긴 했어도 행복한 한 학기였다. 나, 다시 소설 읽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소설 수업은 학생들이 소설 쓸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초반에는 기성 작가 작품을 강독하는 형식이다. 수업을 두 개나 듣다 보니 한 주에 단편 소설만 네 다섯 편을 읽고 감상을 써 가야 했다. 그때는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많기도 많은 것이 학교 수업에 다른 과제도 있으니 소설 한 편 읽는 시간, 마음 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주혜, 김지연, 최은미…… 또 누구더라. 소설을 읽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좋은 소설을 읽으니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박탈감? 허탈감? 도 들었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그랬는데, 이런 사람이 작가를 하는구나 싶었다. 글도 결국은 재능의 문제 아니겠는가. 문예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늘 했던 생각이, 글은 결코 배워서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날고 기던 사람이 더 뛰어난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게 일 년 동안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 등단 작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철학과라든가 사회과학 전공이라든가 여타 학문 전공생들도 많다. 소설 수업에도 영화과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얘기를 나눠본 결과 소설 읽고 쓰는 게 좋아서 나처럼 소설 수업을 두 개나 듣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소설 제출일이 딱 붙어 있지는 않았다. 하나는 개천절까지, 하나는 12월 초까지만 내면 됐다. 지난번에 촉박하게 시작해 피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이 주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집에서는 글을 쓰지 않으니 매일 학교가 파하면 스터디 카페로 가서 밤을 새거나, 새벽까지 글을 썼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세운 원칙이 있었다. 주어X 대명사X 문장은 짧게. 서사를 완전히 배제한, 이미지로만 구성된 글을 쓰고 싶었다. 그간 소설을 쓰면서 가장 힘들어 했던 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였는데, 내가 만든 이야기는 내가 읽어도 구차하고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잘하는 묘사로만, 이야기를 제거한 채 선보이고 싶었다. 저번 학기에는 그러다 실패했다면 이번에는 그래도 7페이지 글을 써냈다. 내가 읽어도 글이 하도 어려웠어서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친구들에게 시험 삼아 읽혀본 결과 모두가 어렵지만, 그래도 읽을 만하다는 평을 내렸다.
문제의 합평일.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다들 너무 좋았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 멋진 글에 놀라 반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웬걸, 그날 합평은 활발했는데 내 소설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한 학우가 이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나? 질문을 던졌고 다른 누군가 이건 소설이라고 답변하면서 열기가 더해갔다. 염승숙 작가님께서 합평을 마무리하셨는데 먼저는 불평을 토로하셨다. 읽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면서. 그래도 작가가 단어 하나하나 고심하면서 쓴 게 보인다고, 내가 고생한 점을 알아주셔서 감사했다. 물론 고쳐야 할 지점이 태산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단락을 가져와 볼까.
육지를 향해 파고든 깊은 포물선, 선이 꺾이는 중간점에서 비켜선 곳에 뗏목이 있었다. 굵직한 대나무를 노끈으로 엮는 형태였다. 모래톱 위로 평행선을 그으며 다가갔다. 가는 모래알이 신발의 모양대로 푹푹 파였다. 수분이 날아간 대나무가 질긴 속성을 잃어버리고 깨어졌다. 길게 튿어진 상처 안쪽으로 빈 공간이 들여다보였다. 닳아버린 노끈이 해조류에 뒤섞여 발에 차였다. 돛대가 꺾이고 노의 넓은 면이 갈라져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더는 그것을 뗏목이라 할 수 없었다. 나무들의 묶음, 이라 명명하는 것이 나았다.
밀물이 거세어지더니 무릎 아래로 바닷물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주 낮은 키의 해일이었다. 들이치는 물살이 부서지기도 전에 파도가 겹쳐 붙었다. 하얀 포말이 바위 틈을 파고들어 해안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젖지 않으려 황급히 뗏목 위로 발을 디뎠다. 물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밀려들었다.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단박에 가파른 경사도로 바닥이 기울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어깨를 찧었다. 침구에 실려 몸뚱어리를 몇 차례 벽에 부딪쳤다.
그 무렵에는 시도 썼다. 물론 합평 수업에 내야 하기에 썼는데, 연애시를 쓰고 싶어서 썼다. 어쩌면 내가 소설보다는 시에 더 적합한 문장을 갖고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작품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친구도 인정했고, 교수님도 과한 부분만 덜어대면 재밌게 잘 읽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수업이 아니면, 과제 마감 기한이 주어져 있지 않으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방학을 맞아 기업 실습을 진행하고 있고, 이제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또 언제 글을 쓰게 될까. 글을 쓰지는 않아도 여전히 읽고는 있다. 글 읽는 습관이 생긴 건 좋다. 어제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었다. 이제 오한기 작가의 '산책하기 좋은 날'을 읽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