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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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초구는 역시 한가운데 꽉 찬 직구다.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나 짧다고 한탄하고, 꿈꾸던 세계여행을 마치고는 어느새 또 긴급구호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선택한, 그야말로 열정의 화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한비야는 결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하여 왜 재미있는 세계여행을 그만두고 긴급구호가가 되기로 한 것이냐는 질문에도 명쾌하게 단언한다. "그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물론, 이런 대답은 좀 더 그럴 듯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식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100%의 진심과 열정을 깨닫는 순간에는 기어이 새삼스런 감동을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과연 내게도 그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었더란 말인가!

2구는 차라리 몸에 맞는 볼이다. 아니, 공이 궤도를 벗어나 몸에 맞은 볼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2구도 초구와 마찬가지로 한가운데 꽉 찬 직구다. 오히려 홈플레이트를 벗어난 것은 이쪽이어서 포수의 미트를 가로막고 있다가 직구에 맞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에라리온, 팔레스타인 등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하고 참혹한 상황들을 외면하다가 그만 얻어맞고 만 셈이라고나 할까. 물론,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종종 TV에서 보여주는 잔혹한 현장의 모습을 눈으로 보기도 했고, 간혹 이런 저런 책을 통해 그 참혹함을 읽기도 했던 바다. 하지만 한비야가 전해주는 현장의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의 모습'과, 그러므로 품어야만 할 '씨앗의 희망'이다. 요컨대 그건, 그저 아파하며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사구(死球)가 아니라, 살아있음으로써 필연코 맞닥뜨려야 할 직구인 것이다.

3구는 더 이상 없다. 아니, 3구는 나의 몫이다. 비록 해변으로 떠밀려온 모든 불가사리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일 어느 불가사리를 돕는 일도, 어쩌면 내게는 그닥 가치 없을 2만원을 매달 정말로 절실한 누군가에게 투자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게" 2만원을 쓰는 일도, 설령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만행을 직시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일도 모두 내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비야는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만 그 '길'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세계의 여러 재난지역들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절망적인 상황들ㅡ그러나 그 속에서도 꿈틀대던 "생명의 본능"을 상기시키고, 여전히 한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내 촛불을 기꺼이 받아주시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투수교체' 사인이다. 사실 '선택'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한비야의 열정과 진정 그리고 헌신 앞에서, 그녀가 건네주는 '공'을 '기꺼이' 받지 않을 재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껏 '진짜' 야구공으로 마음껏 던져본 기억이 없다. 언젠가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진짜' 야구공은 생각 이상으로 무겁고 단단해서, 가지고 '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진짜' 야구공의 '무게'와 상대의 매서운 타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지 못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한비야의 열정에 찬 행보를 접하면, 문득 나도 있는 힘껏 직구를 던져보고 싶은 감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야구공은 무겁고 혹 홈런이라도 얻어맞을까봐 두렵지만, 직구를 던지지 못하는 한 나는 결코 '진짜' 야구란 걸 경험하지 못할 게 아닌가.

분명, 한비야의 직구와 나의 직구는 다를 것이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세기와 방향으로 감히 던질 수 없거니와, 또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의 직구를 던지면 그뿐일 터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조금쯤은 한비야의 직구를 닮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새장 밖으로 나아가려는 그녀의 열정이 담긴 초구와, 어둠 속을 밝히려는 그녀의 촛불과도 같은 2구 모두. 그러니까 이쪽도, 좌우지간 힘차게 와인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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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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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누구나 그런 '순간'들을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거짓을 말했던 순간, 용기가 필요했을 때 비겁하게 돌아선 순간, 우정을 외면하고 의리를 저버렸던 그런 순간들을. 그 중 어떤 순간들은 너무도 사소해서, 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쉽게 잊혀져 버린다. 하지만 또 어떤 순간들은 끝내 잊혀지지 않고, 언제나 화인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며 때때로 뚜렷한 기억으로 떠올려지곤 한다. 그리고 그때 그 기억이 야기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부끄러움과 고통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부유한 가정의 아들 아미르와, 그 집 하인의 아들 하산은 각기 편부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미르는 수니파인 파쉬툰인이고 하산은 시아파인 하자라인이지만,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둘 사이에 그런 것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즐거웠던 어린 시절은 어떤 한 '순간', 정확히는 1975년 겨울의 어느 날, 연날리기 대회 때 일어난 아미르의 배신으로 인해 비틀어져 버리고 만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할게요."라던 하산의 순수한 우정을 아미르는 한순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이후, 실 끊어진 연처럼 표류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아미르는 바바와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고, 거기서 만난 소라야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바바)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었던 라힘 칸에게서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고, 아미르는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십수 년만에 돌아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미르는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과 마주한다. 부족한 것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이 유일한 세계였던 아미르에게 낯선 아프가니스탄은 마침내 '진실'을 보여준 것이다. 더불어 바바가 숨겨야 했던 '진실'까지도.

사실 이 책 <연을 쫓는 아이>의 배경인 아프가니스탄은 조금은 낯선 곳이지만, 정작 내용은 그리 낯설지 않다. 역자도 지적하듯이, 아프가니스탄인인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의 아름답고 정겨운 소소한 일상과 풍습은 물론이고, 그 속에 자리한 부당한 편견과 비참한 현실 등 모든 것을 솔직하게, 그러나 한결같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소설 속에 생생히 묘사해 놓았고, 이로 인해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의 선명한 이미지를 수시로 구현해내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의 어떤 한 순간에 저지른 과오로 인해 고뇌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는 누구나 지니고 있을 법한 어두운 기억과 공명하며 조금은 무감각해진 상처를 살며시 건드리는 한편, 그러한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덕분이다.

소설 속 아미르의 여정은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을 넘나들며 장대하게 전개되고, 그에 걸맞게 책 분량은 꽤나 두툼한 편이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촘촘하게 연결되면서 어떤 부분에서도 방만하다거나 불필요한 느낌은 없고, 지루할 틈도 전혀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아미르와 하산의 기억부터, 하산이 가장 좋아했던 '로스탐과 소랍' 이야기, 아내 소라야와의 결혼 과정, 그리고 아미르와 소랍(하산의 아들)의 만남까지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곳곳에 부여된 암시와 의미를 찬찬히 따라가는 재미가 실로 기대 이상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용기'와 '치유'를 통해 '속죄'의 길로 나아가는 아미르의 인간적 '성장'에 거듭 감탄하고, 한없이 감동받으며, 적잖은 위로를 받게 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 아미르가 저질렀던 한순간의 배신은 그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바바의 거짓이 얽혀 있었고, 파쉬툰인과 하자라인의 뿌리 깊은 갈등이 설켜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한 가지는, 적어도 아미르는 그가 과오를 저질렀던 그 '순간'의 기억을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했다는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아미르는 그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반면, 언젠가 하산이 이야기했던 '꿈'에 나오는 '괴물'은 '자신'의 대척점에서, 그러한 '순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과오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잔인하고 난폭한 아세프 같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과오'로부터 '회한'을 이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실 끊어진 '연'을 향해 달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연'을 손에 넣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적어도 마음대로 표류하는 '연'을 되돌리려는 '치유'일 테니까. 그리고 '괴물'이 아닌, '자신'이 되기 위한 '용기'일 테니까. 그리하여 '치유'와 '용기'로서 '연'을 좇아 천 번이라도 달린다면 '연'은 언제고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고, 이 책은 가르쳐주는 듯하다. 마치 "삶이 언제나 계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결국 신이 용서할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신은 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너 역시 용서할 것이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길 바란다. 할 수 있다면 네 아버지를 용서하렴. 원한다면 나름 용서하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을 용서하거라.  (p45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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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사전 1
허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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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부자 내각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혹자는 이렇게 항변했다. "단지 부자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확실히, 딴은 그럴 듯한 말이다. 비록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현실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원칙이 좀 더 들어맞게 마련이니, 일단 부자라면 있는 죄도 오히려 없다고 해야 할 판이니까 말이다. 뭐, 죽은 뒤에야 바늘구멍에 들어가든 쥐구멍에 들어가든, 내가 아는 한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부자에 대한 이러한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식 한편에는 부러움과 시기심 또한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로지 정당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한 평생 자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겠지만, 돈에 대한, 부에 관한, 부자를 향한 욕망은 언제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여 욕망이라는 놈은 틈만 나면 이렇게 유혹한다. '폼 나게 살아보자', '돈 걱정 없이 살아보자', '죄 안 짓고(있는 죄도 없는 죄로 만들며) 살아보자' 이건 정말, 꽤나 혹하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분명 부자가 되는 편이 좀 더 유리하다.

<한국의 부자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하되, 허영만 화백의 경험을 보탠 이 책 <부자사전>은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감정을 정확히 꿰뚫으며 시작한다. 즉, "부자들에게 흠잡을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부자에 대해 품기 쉬운 일방적인 증오와 편견에 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한편,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지 않는다."라며 부자를 향한 욕망을 슬그머니 부채질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부자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이중적 잣대 위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멋진 시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멋진 시도가 끝내 성공적이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100인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취재를 통해 드러나는 부자들의 방식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애초에 부자들이 매력적인 방식으로 부를 쌓았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자들의 인간적 고뇌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자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깊어질 뿐이다. 가령,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불만 없이 적은 보수를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고용한다든지, '초(秒) 관리 운동'이랍시고 담배 피고, 커피 마시고, 전화 한 통화하는 모든 시간을 금액으로 환산한다든지, 심지어 '무자비함을 배우라'든지 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글쎄, 어쩐지 박지원의 <양반전>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어진다. "그만 두시오, 그만 두오.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뱉고 돌아설 수 없는 게 바로 욕망의 무서운 점이다. 부자가 되면 도둑놈도 도둑놈이 아니게 되고, 더욱이 일단 부자가 된 뒤에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자기기만적 유혹은 결코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욕망에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더라도, 실상 이 책에서 무슨 대단한 비법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실망하기 딱 알맞다. 한 예로, '부자가 되는 최선의 방법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데, 그야 물론 맞는 말이지만 조금 허탈해진다. 또 다른 예로, 100명의 부자들 중 다수가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럼 A라는 방법이 돈을 버는 최고의 수단인가? 결코 아니다.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날린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무엇일까? 바로 부자들에게는 '안목'이란 게 있기 때문이란다. 결국 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고, 안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면 '당신은 부자인가, 안부자인가?'라는 원초적 질문 외에 무엇이 더 남는단 말인가.

부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전혀 불식시키지 못하고, 부자를 향한 욕망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면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실 이 책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앞에서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본래 부자가 되는 방법이란 것은 대개 아주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법이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허영만 선생님께서 비로소 부자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그려주셨다."는, <한국의 부자들>의 저자인 한상복의 말 자체에는 동의하더라도, 그 말이 품고 있는 그 이상의 의미까지는 아무래도 공감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만화를 통해서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부자들의 세계를 접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 '인간의 삶'까지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마치 '사전'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전'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듯, <부자사전>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나 역시 종종 자극이 될 수 있는 원칙들을 여럿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허영만 화백의 '그림'이 '글'에 비해 많이 아까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100명의 부자들을 분석한 것은 나름 괜찮은 시도로도 보이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부자가 지닌 인간적 고뇌와 삶의 무게를 좀 더 가깝게 느끼는 데에는 오히려 100이라는 숫자가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별 '사연(이야기)' 없는 100명의 부자들의 '얼굴'은 어쩐지 '가면'처럼 무감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그림'이라는 '얼굴'을 달기로 했다면, 그 '얼굴'에 얽힌 사연에 좀 더 집중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그야 물론, 그랬다면 이미 '사전'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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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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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녀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군대에서 누나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녀석이 죽기 며칠 전에, 녀석이 아파서 수술을 받았다는 것, 그런데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 등의 사실을 이미 전해 듣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나는 녀석이 죽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녀석의 죽음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 믿지 못할 소식에 과연 내가 뭐라고 말을 했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나가 녀석의 죽음을 알려주면서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고, 내게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도.

2#
사실,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라면 별로 말할 게 없다. 흔히 하는 분류로, 세상에는 개(혹은 다른 동물)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이 책 <말리와 나>는 전자의 사람들인 '나'와 가족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수컷 개인 '말리'가 함께 엮어내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려고 하는 말썽꾸러기 개' 말리가 보여주는 좌충우돌 견생기(犬生記)가 꽤나 시끌벅적하여 일상이 범상한 것은 결코 아니기는 해도, 그렇다고 말리가 고양이처럼 우는 것은 아니고(아, 고양이 똥은 먹는다), 상근이처럼 TV에 나오지도 않으며(그러나 개봉되지 못한 영화에는 출연한다), 애견학교를 수석 졸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하지만 애견학교에서 퇴학은 당한다) 일단은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볼 이유가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실은, (이미 슬쩍 말했다시피)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말리가 보여주는 수많은 말썽들이 웃음을 자아내고, 간혹 드러나는 말리의 충성심과 우정이 감동적이며, 사람과 개가 이루어내는 따스한 교감이 뭉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감정들의 한편에 '슬픔'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 어쩌면 이 책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이 행복한 이야기의 결말을 모두 말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나'와 '말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이 현실에서 존재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결말이기도 하다. 뭐, 그렇다. 현실에서 말리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하여 '말리'는 죽었다! 그것뿐이다. 단지, 말리가 인간 수명의 7분의 1을 사는 개인 까닭에, '말리'에게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죽음'이 찾아왔을 뿐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슬픔'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것도 명백하지만,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당연한 이치를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슬픔'과 '죽음'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행복'과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리가 보여주는 순수한 生의 기쁨과 한없는 애정은,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삶'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주는 듯하다. 13년간 지속된 '말리'의 말썽도, 강인한 신체도, 한결같은 우정과 충성심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지만, 영원할 수 없는 만큼 그러한 일상이 주는 사랑과 즐거움과 기쁨은 더욱 소중한 것이라고, 말리는 온몸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리의 죽음은, 그토록 슬프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이 서로 무관하지 않듯이, 행복하기에 슬플 수 있고 슬퍼서 행복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골칫덩어리 개'로 살던 '말리'가 '훌륭한 개'로 죽으면서 남기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으리라.

"...골칫덩어리라고? 전혀 아니야.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마, 말리."
말리는 이것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이제까지 말리에게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 말이다. 나는 말리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말리, 넌 훌륭한 개야." (p365)

3#
내가 '녀석'의 죽음을 실감했던 것은, 휴가를 나가서 집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도착했지만, 여느 때와 달리 개가 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언제나처럼 맹렬한 환대와 반가움을 보이던 녀석도 없었고, 녀석의 밥그릇도, 전용 화장실도, 녀석의 집도 모두 치워버린 후였다. 이제 더 이상 청소기를 돌릴 때 녀석이 시끄럽게 짖어 댈까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자를 움직일 때면 밑에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의자에 끼일까봐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외출할 때면 혼자 남는 녀석이 안쓰러워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드디어 녀석의 '죽음'과 '슬픔'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더불어 녀석과 함께 했던 모든 일상이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었는지를, 나는 절감할 수 있었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군대에 복귀하던 날 아침. 나는 누나의 말대로 잠시 절에 들러 녀석의 평안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내 눈가에도 언뜻 무언가가, 아주 잠시 맺혔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행복하지만 슬픈 눈물 한 방울이...

"안녕, 민경! 넌 훌륭한 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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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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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의 웃음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그야 물론, 이등병이 군대에서 웃을 일이란 본래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설령 아주 가끔일지라도 인간으로서 드러내는 쪽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종종 억지로까지 참아야 한다는 건 꽤나 가혹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뜩이나 웃지 못해 슬픈 이등병들에게 한 가지 더 가혹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절대로 이등병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글쎄, 그것이 왜 가혹한 일인지는 아마도, 최소한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이 지니는 치명적인 매력과 관계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저자인 빌 브라이슨이 20년 전에 유럽을 여행했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는 유럽 여행기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여행기와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은, 바로 저자가 여느 여행객들이 그러하듯 그저 낭만적이라거나 감상적인 사람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여 유럽대륙의 최북단인 함메르페스트에서 시작되는, 현실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그의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싫고, 그건 그거대로 밥맛이고, 요건 또 뭐냐는 식인데, 이건 관광을 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 차라리 시비를 걸기 위해 떠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일 정도다. 특히나 파리에 대해서는, '파리가 자신을 싫어할 뿐더러 죽이려고까지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데, 모르긴 몰라도 파리 입장에서는 질 나쁜 보험사기단에라도 걸린 기분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평과 불만, 심지어 다소 지나쳐 보이는 일방적 편견조차도 불편하다기보다는 자못 통쾌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에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일본인에 대해선 종종 나온다), 저자가 만약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찌개 하나를 함께 떠먹는 것을 두고 입을 뗀다면(그게 불평이나 불만,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는 데는 내 포르쉐 모형 자동차를 걸 수 있다) 나는 기꺼이, "그럼요, 나도 가끔 내가 떠먹는 게 찌개인지 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라며 반가워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불평은 유쾌하기조차 하다. 그것은 그가 마치 투덜이 스머프처럼 떠들어대는 온갖 불평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한국인들의 음식 문화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情을 이내 찾아낼 수 있는 의외로 솔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더불어 지녔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에서 그에게 씹히지 않는 나라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가 그 모든 나라에 대해 그 이상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모든 것이 낙후되었다고 투덜대면서도 함메르페스트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애향심에 존경을 표한다든지, 이탈리아인들의 무질서와 뻔뻔함에 대해 핏대를 올리다가도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태도에 감명을 받는다든지, 혹은 심지어 그토록 증오심(?)을 보이는 파리에서조차 자본주의의 파고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고서점을 접하고 그는 파리에 대한 사심 없는 찬탄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게 칭찬해놓고 다시 뒤통수를 쳐대는 게 그의 7번째쯤 되는 특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이 지닌 최고의 가치는, 이른바 빌 브라이슨 표 유머가 가져다주는 참을 수 없는 '재미'에 있다. 그저 아름다움과 찬양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유명한 도시와 건축물, 문화재 등에 대한 조롱이 재미있고,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풍자가 또 재미있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과 해학이 역시 재미있는 것이다. 더욱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웃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 미덕인 이등병 생활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만큼 웃음에 대한 내성이 상당히 강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풋-'하고 터지는 웃음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이 책은 기발하고 특별하게 재미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모든 이등병들의 금서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자꾸 애꿎은 이등병들을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영원한 해병'은 들어봤어도 '영원한 이등병'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등병이라고 딱히 억울해할 것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등병의 슬픔은 곧 다른 이의 즐거움이다. 그렇다! 이 책은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읽고 즐거워할 만한 책이고, 사실은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여행기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쩌면 사진 한 장 없이 1990년대 초의 유럽을 묘사한 이 책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다른 책이 못내 보고 싶어진다면, 이거야말로 저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만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자의 '대만족'이 독자의 '대만족'인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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