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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의 웃음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그야 물론, 이등병이 군대에서 웃을 일이란 본래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설령 아주 가끔일지라도 인간으로서 드러내는 쪽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종종 억지로까지 참아야 한다는 건 꽤나 가혹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뜩이나 웃지 못해 슬픈 이등병들에게 한 가지 더 가혹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절대로 이등병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글쎄, 그것이 왜 가혹한 일인지는 아마도, 최소한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이 지니는 치명적인 매력과 관계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저자인 빌 브라이슨이 20년 전에 유럽을 여행했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는 유럽 여행기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여행기와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은, 바로 저자가 여느 여행객들이 그러하듯 그저 낭만적이라거나 감상적인 사람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여 유럽대륙의 최북단인 함메르페스트에서 시작되는, 현실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그의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싫고, 그건 그거대로 밥맛이고, 요건 또 뭐냐는 식인데, 이건 관광을 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 차라리 시비를 걸기 위해 떠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일 정도다. 특히나 파리에 대해서는, '파리가 자신을 싫어할 뿐더러 죽이려고까지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데, 모르긴 몰라도 파리 입장에서는 질 나쁜 보험사기단에라도 걸린 기분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평과 불만, 심지어 다소 지나쳐 보이는 일방적 편견조차도 불편하다기보다는 자못 통쾌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에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일본인에 대해선 종종 나온다), 저자가 만약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찌개 하나를 함께 떠먹는 것을 두고 입을 뗀다면(그게 불평이나 불만,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는 데는 내 포르쉐 모형 자동차를 걸 수 있다) 나는 기꺼이, "그럼요, 나도 가끔 내가 떠먹는 게 찌개인지 침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라며 반가워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불평은 유쾌하기조차 하다. 그것은 그가 마치 투덜이 스머프처럼 떠들어대는 온갖 불평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한국인들의 음식 문화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情을 이내 찾아낼 수 있는 의외로 솔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더불어 지녔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에서 그에게 씹히지 않는 나라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가 그 모든 나라에 대해 그 이상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모든 것이 낙후되었다고 투덜대면서도 함메르페스트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애향심에 존경을 표한다든지, 이탈리아인들의 무질서와 뻔뻔함에 대해 핏대를 올리다가도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태도에 감명을 받는다든지, 혹은 심지어 그토록 증오심(?)을 보이는 파리에서조차 자본주의의 파고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고서점을 접하고 그는 파리에 대한 사심 없는 찬탄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게 칭찬해놓고 다시 뒤통수를 쳐대는 게 그의 7번째쯤 되는 특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이 지닌 최고의 가치는, 이른바 빌 브라이슨 표 유머가 가져다주는 참을 수 없는 '재미'에 있다. 그저 아름다움과 찬양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유명한 도시와 건축물, 문화재 등에 대한 조롱이 재미있고,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풍자가 또 재미있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과 해학이 역시 재미있는 것이다. 더욱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웃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 미덕인 이등병 생활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만큼 웃음에 대한 내성이 상당히 강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풋-'하고 터지는 웃음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이 책은 기발하고 특별하게 재미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모든 이등병들의 금서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자꾸 애꿎은 이등병들을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영원한 해병'은 들어봤어도 '영원한 이등병'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등병이라고 딱히 억울해할 것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등병의 슬픔은 곧 다른 이의 즐거움이다. 그렇다! 이 책은 군대에 갓 들어간 이등병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읽고 즐거워할 만한 책이고, 사실은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여행기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쩌면 사진 한 장 없이 1990년대 초의 유럽을 묘사한 이 책은 그런 점에서는 조금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다른 책이 못내 보고 싶어진다면, 이거야말로 저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만족'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자의 '대만족'이 독자의 '대만족'인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