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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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구는 역시 한가운데 꽉 찬 직구다.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나 짧다고 한탄하고, 꿈꾸던 세계여행을 마치고는 어느새 또 긴급구호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선택한, 그야말로 열정의 화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한비야는 결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하여 왜 재미있는 세계여행을 그만두고 긴급구호가가 되기로 한 것이냐는 질문에도 명쾌하게 단언한다. "그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물론, 이런 대답은 좀 더 그럴 듯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식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100%의 진심과 열정을 깨닫는 순간에는 기어이 새삼스런 감동을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과연 내게도 그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었더란 말인가!

2구는 차라리 몸에 맞는 볼이다. 아니, 공이 궤도를 벗어나 몸에 맞은 볼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2구도 초구와 마찬가지로 한가운데 꽉 찬 직구다. 오히려 홈플레이트를 벗어난 것은 이쪽이어서 포수의 미트를 가로막고 있다가 직구에 맞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에라리온, 팔레스타인 등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하고 참혹한 상황들을 외면하다가 그만 얻어맞고 만 셈이라고나 할까. 물론,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종종 TV에서 보여주는 잔혹한 현장의 모습을 눈으로 보기도 했고, 간혹 이런 저런 책을 통해 그 참혹함을 읽기도 했던 바다. 하지만 한비야가 전해주는 현장의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의 모습'과, 그러므로 품어야만 할 '씨앗의 희망'이다. 요컨대 그건, 그저 아파하며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사구(死球)가 아니라, 살아있음으로써 필연코 맞닥뜨려야 할 직구인 것이다.

3구는 더 이상 없다. 아니, 3구는 나의 몫이다. 비록 해변으로 떠밀려온 모든 불가사리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일 어느 불가사리를 돕는 일도, 어쩌면 내게는 그닥 가치 없을 2만원을 매달 정말로 절실한 누군가에게 투자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게" 2만원을 쓰는 일도, 설령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만행을 직시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일도 모두 내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비야는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만 그 '길'을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세계의 여러 재난지역들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절망적인 상황들ㅡ그러나 그 속에서도 꿈틀대던 "생명의 본능"을 상기시키고, 여전히 한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내 촛불을 기꺼이 받아주시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투수교체' 사인이다. 사실 '선택'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한비야의 열정과 진정 그리고 헌신 앞에서, 그녀가 건네주는 '공'을 '기꺼이' 받지 않을 재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껏 '진짜' 야구공으로 마음껏 던져본 기억이 없다. 언젠가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진짜' 야구공은 생각 이상으로 무겁고 단단해서, 가지고 '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진짜' 야구공의 '무게'와 상대의 매서운 타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지 못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한비야의 열정에 찬 행보를 접하면, 문득 나도 있는 힘껏 직구를 던져보고 싶은 감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야구공은 무겁고 혹 홈런이라도 얻어맞을까봐 두렵지만, 직구를 던지지 못하는 한 나는 결코 '진짜' 야구란 걸 경험하지 못할 게 아닌가.

분명, 한비야의 직구와 나의 직구는 다를 것이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세기와 방향으로 감히 던질 수 없거니와, 또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의 직구를 던지면 그뿐일 터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조금쯤은 한비야의 직구를 닮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새장 밖으로 나아가려는 그녀의 열정이 담긴 초구와, 어둠 속을 밝히려는 그녀의 촛불과도 같은 2구 모두. 그러니까 이쪽도, 좌우지간 힘차게 와인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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