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소년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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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오늘 하루를 되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왕이면 한 십수 년쯤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흥미진진해지지는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상상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쓰잘 데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후회'라는 감정을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십수 년 동안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감히 단언하건대 그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후회'를 안고 '지금'을 살아가는 게 고작이니까 말이다.

아디치 미츠루의 단편 모음집인 <모험소년>은 이미 제목에 쓰인 '모험'과 '소년' 그리고 '시간'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7개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은 유독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천착하는데, '시간'의 건너편에는 바로 '소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거'가 한결같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소년' 시절, 치기만 하면 무조건 홈런이라도 될 것 마냥 기대에 부풀어하고, 영웅을 좇아 그의 흉내를 내며, 치기어린 꿈에 사심 없이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되돌아간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자각하도록 만든다.

물론, '모험'으로 가득했던 '소년' 시절이 끝난 지금,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되돌아간 시간이 투영하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또한 어쩔 수 없이 씁쓸하기만 하다. 뜬금없는 홈런을 기대하기보다는 확률 높은 안타를 노리고, 영웅을 동경하는 대신 한걸음 물러난 범인의 길에 만족하며, 꿈을 한구석에 밀어 넣고 지극히 현실적인 삶과 씨름하는 모습만이 '지금'의 시간을 삭막하게 채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로'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 '소년'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봉인해둔 타임캡슐 속 '소년의 꿈'은, 시간이 흐른 뒤에 지극히 생경한 '과거'로만 현현한다. 그것은 그저 아름답고 그리운 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절된 과거처럼 보인다.

아다치 미츠루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다분히 환상적인 매개체를 작품 곳곳에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도라에몽의 주머니'나 '시간의 계단'처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힘에 의해 주인공은 '단절된 과거' 혹은 '멈추어진 시간'과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과 상상이 아니라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냉혹한 시간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끊임없이 흐르는,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을 문득 깨닫게 한다. 수록된 마지막 단편 '스케치북'에서 멈춰진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낡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박한 꿈이 현재와 만나는 것도 아마도 그런 시간의 연속성 덕분이 아닐까. 

어쨌거나, 적어도 현실에서라면 어떤 환상과 상상을 동원하든 간에 결국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멈추어진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한 일이다. 그저 언제나 '지금'을 사는 게 고작이면서, 굳이 '소년의 모험'을 '과거'로만 치부하며 꽁꽁 싸매어 두기만 하는 것은 꽤나 애석한 일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모험'이란, 반드시 '소년'의 전유물만은 아닐 테니까. '쓸데없는 것' 사이에 묻혀버린 '소년의 모험'은, 그래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다. 그리고 그럴 때ㅡ과거와 지금의 시간이 이어질 때, 비로소 '지금'을 사는 일도 조금은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린 커져버린 몸과 함께, 쓸데없는 것까지 키워버린 모양이군."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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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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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선더볼트 키드였다. 비록 엘렉트로 별의 볼튼 왕이 남긴 유산인,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를 집에서 발견할 수 없었고, 특히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궁극의 비기인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도 도무지 알 수 없긴 했지만, 다음의 여러 행적들ㅡ높은 곳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물질을 떨어뜨렸다거나, 신나게 밖에서 놀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철철 흘렸다거나, 냄새도 별로고 몸에도 별로일 소독가스를 좇아 보건소 차량의 뒤를 미친듯이 뛰었다거나, 오로지 성(性)의 학문적 탐구심을 충족시켜 줄 자료를 찾기 위해 집 안, 특히 부모님의 방을 탐색해 보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은, 내가 선터볼트 키드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일화들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실은 거의 모든 소년들이 선더볼트 키드였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선더볼트 키드였다고 밝히는 빌 브라이슨의 커밍아웃에 새삼스레 놀랄 이유는 전혀 없겠지만, 그가 이 책(원제: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kid)에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에 대한 추억을 펼쳐내며 과시하는 비상한 기억력은 확실히 놀라움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1950년대 미국 디모인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이야기는 가끔 시,공간적 격차로 인해 낯설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유머로 인해 대체로 과장에서 시작해 종종 황당으로 끝나더라도 재미있게 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더볼트 키드'라는 강한 유대감은 그의 이야기들을 어느새 내 이야기로 치환하는 것을 그리 무리없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나 나나,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살았던 것이다.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던, 유쾌하고 재미있고 또 조금은 따뜻했던 그러한 세계를. 

그러나 불행히도, 빌 브라이슨이 묘사하는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가 좀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는 '과거'가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더볼트 키드였던 빌 브라이슨이 마음껏 만화책을 볼 수 있었던 키디 코랄과, 그가 사탕을 실컷 훔쳐 먹어도 들키지 않았던 조그만 잡화점 그룬드와, 당시 매혹의 대상이었던 백화점 융커는 당연한 귀결로 이제 사라지고 말았고, 그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예외만은 아니었다. 빌 브라이슨은 흥분되고 아름답던 많은 것들을 과장해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하지만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약간의 자조를 담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옛날의 디모인은 그렇게 멋진 세상이었다. 이제 그런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돌이켜 보면, 선더볼트 키드라면 누구나 "사람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긴 비비탄 총을 서슴없이 사람을 향해 쏘아댔고, 놀이터에 대인용 함정을 파기 위해 미친 듯이 땅을 파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을 알았다면 당연히 빌 브라이슨처럼 맘에 들지 않는 여럿을 태워버렸겠지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선더볼트 키드는 감옥에 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형법 9조 "14세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에 힘입은 바가 아니라, 간혹 선더볼트 키드이기를 포기한 녀석만 아니라면 선더볼트 키드는 결코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는 법은 없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행동하는 것과는 별개일지라도, 우리는 약한 자는 돕고 악한 자는 처벌해야한다는 '바른생활'을 한결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더볼트 키드도 대부분은 끝내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요컨대 가장 변한 것은, 실은 '선더볼트 키드'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재미있고 유쾌한 추억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공감과 아련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그 세계의 아이들은 몸집도 작고 때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어른들에 비해서는 문명화된 존재들"이었다는 빌 브라이슨의 명확한 지적이 시사하는 바처럼, 선더볼트 키드를 선더볼트 키드이게 했던 것은 단지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나 선더비전 그리고 수많은 놀이만이 아니라, 사실은 조금은 순수하고 따뜻했던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던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그러한 따뜻했던 마음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즐거웠던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변화'의 중심에 선 사람들에게, 유쾌하며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행복하지만 날카롭게 상기시켜준다. 기실, 더 이상 선더볼트 키드가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란, 결국 '문명'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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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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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주 잠깐 서예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다. 당시에 다녔던 대부분의 학원이 그랬던 것처럼 서예학원도 딱히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부드러운 붓으로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곤욕이었던 것은 하루에 한자 5자를 외우는 일이었다. 一이 '하나'고 二가 '둘'이고 三이 '셋'이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지만, 左가 '왼'이고 右가 '오른'이라는 데에 이르면 결코 납득하기 쉽지 않았고, 외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선생님은 5자를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으셨는데, 어려서부터 외박을 즐기지 않았던 나는 곧 깔끔하게 학원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집에 못가는 것보다야 학원을 안가는 게 나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서예'와의 짧은 인연은 금세 끝나버렸지만, 학원에 다니던 당시에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가기 싫은 학원을 버티다버티다 마지못해 늦게 갔었는지, 혹은 도대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한자를 외우는 게 만만치 않아서 늦게까지 붙잡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학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커다란 종이를 책상에 널찍하게 펼쳐놓으시고는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부드러운 붓을 아무렇게나 일그러지도록 거칠게 다루자 바위가 생겨났고, 다시 붓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바위에서부터 우아하게 올려치자 난이 생겨났다. 또 한쪽 여백에 알 수 없는 한자를 몇자 적으셨고, 마지막으로 붉은색 낙관을 힘주어 찍으셨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어린 내 눈에도 정말로 근사해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독자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이 책 <화인열전>의 매력 역시, 단연 '그림'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굳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듯한, 8명의 화인들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주고, 더욱이 이러한 내용이 좀 더 그림을 '잘' 감상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령, "절파(浙派)풍의 전통과 남종문인화풍과 진경산수적 요소가 뒤섞인 최득의작"이라는 설명을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겸재 정선의 <득의산수>라는 그림을 보며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가볍게 감탄하는 정도야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기 이전에, 본 대로 느껴도 좋다는 의미다.

사실, 이 책에서 아쉽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저자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으로 확신하며 그 작품을 사제 간의 합작품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소나무 그림이 강세황이 노년에 그린 것이라며, 과연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오주석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그림 우측 상단의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씨가 훼손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표암'이라는 글씨가 그림의 값을 올리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현재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화인열전>에서 빈번히 드러나는 저자의 성급한 추측과, 아는 대로 혹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보려는 듯한 태도에는 상당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즐기는 바로써 보건대, 비록 삼공(三公)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권 p288) 

<병암진장첩>을 두고 김이도가 쓴 화첩의 발문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글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발문을 인용하며 <병암진장첩>이 또 다른 <삼공불환도>(단원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예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김이도가 쓴 글의 진의는 "삼공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내 마음대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스스로 흡족해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을 만한 좋은 그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꼬리 잡는 듯하기는 하지만, 책 속에서 단원의 그림에 대한 찬사 후 "이래야 단원이지."라는 저자의 감탄이 "이것이 단원이구나." 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다.

다소 비판적 입장에서 이 리뷰를 썼지만, 여전히 나는 <화인열전>이 흥미롭고 의미 있는 좋은 책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아는 만큼 보는 것' 만큼이나 '보는 대로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능호관 이인상' 편의 부제,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오로지 '아는 자'만이 감상할 수 있는 그림만이 과연 훌륭한 그림인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록 左가 '왼'이라는 것조차 모를지라도, 그저 '근사하다.'는 유치한 감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아는 만큼 좀 더 볼 수 있는 여지가 커지리란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無知)'와 '과신(過信)'의 사이에서 솔직한 '자신의 느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건 다만 '모르는 자'의 변명일 뿐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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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GO! FC 오렌지 1
나우다 타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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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GO! FC 오렌지>는 여타의 축구만화와는 꽤나 차별성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축구만화들이 영웅적인 능력을 선보이는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그의 화려한 축구 여정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GO! GO! FC 오렌지>는 '난요 오렌지'라는 한 축구팀이 한 시즌을 치러내는 동안의 희로애락에 주목한다. 그래서 일본의 2부리그인 'F2'에 소속한 난요 오렌지가 팀의 존속이 위태로운 절체정명의 상황 속에서 1부리그인 'F1'으로의 승격을 향한 대 분투기를 펼치는 것이 바로 이 만화의 중심 줄거리가 된다. 

물론,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은 이 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6세의 나이로 일본 F2의 꼴찌 팀 난요 오렌지의 구세주로 떠오르는 와카마츠 무사시의 능력은 여느 다른 축구만화 주인공들의 능력에 비해 한 치의 모자람도 없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재능을 지닌 무사시라고 할지라도 '난요 오렌지'라는 '팀'에서 그는 여전히 한 명의 팀원일 뿐이다. 그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현실을 이 만화는 결코 예사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의 팀으로서 난요 오렌지가 처한 상황은 여러모로 절망적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난요 오렌지에 모여든 팀원들이 서서히 융합되면서 난요 오렌지를 만년 꼴찌 팀에서 승격을 노리는 팀으로 탈바꿈 시킨다. 재정적인 곤란에서 비롯되는 많은 악조건들과 무사시의 대표팀 차출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선수들의 부상과 경고 누적으로 인한 어려움 등, 승격을 위한 난요 오렌지의 한 시즌은 매우 처절하면서도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고난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난요 오렌지의 행보는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더욱이 작가는 경쟁하는 라이벌 팀들을 넘어야 할 적으로서만이 아니라 모두 각자의 이유로 '승격'이라는 꿈을 지니는 박력 넘치는 팀으로 묘사하고, 또한 '승격'이라는 최고의 목표를 위해 선수들과 구단은 물론이고, 서포터와 지역 주민들의 노력과 염원이 합쳐지는 지점까지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만화의 감동을 한층 배가 시킨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독자들을 난요 오렌지의 서포터인 '오렌지 맨'의 하나로 동참시키고, 나아가 '오레 오레 오렌지'라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응원구호에도 의외의 감동을 받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만화가 지니는 힘이다.

총 13권인 이 만화의 분량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그러나 스페인에서의 어린 시절 중, 전(前) 난요 오렌지의 구단주와 난요 오렌지를 세계적인 클럽으로 만들겠다는, 장난 같은 약속 하나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온 무사시가 난요 오렌지를 세계적인 클럽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모두 담기에 역시 13권은 터무니없이 적은 분량이다. 작가는 무리하지 않고 13권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한다. 여전히 난요 오렌지의 시즌은 계속되고, 그것은 1부리그로 '승격'을 이루든 혹은 2부리그에 '잔류'하든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어쨌거나 힘겨운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 작가는 딱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산뜻하면서도 여운 있는 마무리는 독자에게도 역시 만족스럽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GO! GO! FC 오렌지>는 '승격'으로 대변되는 '클럽의 꿈'을 주제로 한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축구만화'다. 몇몇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축구팬에게는 분명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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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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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읽으며 누나에게 넌지시 '개를 훔치는 방법'을 묻자, 이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답이 맥없이 따라 나온다. "개를 찾는다. 개와 친해진다. 개를 훔친다." 재미없게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따라한 게 명명백백한 이 대답은, 그러나 또 재미없게도 틀린 대답이 아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를 훔칠 수 있단 말인가. 11살의 초등학생인, 이 책의 주인공 조지나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녀가 자신의 보라색 노트에 직접 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1단계: 적당한 개를 찾는다." 이 정도면 '완벽한 방법'의 1단계로서 역시 부족함이 없다.

조지나가 하필 개를 훔치려고 하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어느 날 고물차 한 대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아빠 때문에 조지나가 집도 없이 고물차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게 그 근본적인 이유다. 맥도널드에서 씻고 학교에 갔다가 다시 고물차로 돌아와야 하는 삶을 사는 초등학생의 고뇌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법. 그런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개를 찾아주면 500달러를 사례금으로 주겠다는 오래된 전단지 하나가 조지나의 눈에 띈다. 500달러라면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이다(라고 조지나는 믿는다). 그래서 조지나가 당장 그 개를 찾아 나서게 되었느냐? 천만의 말씀. 이미 11살에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저술하는 조지나의 비상한 머리는 '전단지를 보고 개를 찾는다.'의 순서를 살짝 바꾼다. 즉, '미리 개를 찾고(훔치고) 곧 나올 전단지를 발견한다.'는 것으로. 그러니까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탄생배경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방법'도 현실에서 실행하다보면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가령, 고작 3단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인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만 해도 실제로 실행한다고 가정하면, 우선 코끼리의 크기에 맞는 냉장고가 있어야 하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 수 있는 인력 혹은 장비가 필요하다. 게다가, 어쩌면 코끼리에게 미리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 불가피하게 코끼리 몸의 일부를 절단해야 한다면 당연히 신체포기각서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무려 9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어려움이 오죽하겠는가. 더군다나 나도 어렸을 때 뭔가를 훔쳐봐서 아는 바지만, 어린 나이에 뭔가를 훔친다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개를 훔친다는 것은, 냉장고 문을 열어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래서 결국 조지나가 '완벽한 방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후반부에 슬쩍 등장하여 함축적인 대사를 별로 상관없다는 듯 툭툭 내뱉는 무키 아저씨의 말을 빌자면,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중요한 법"이고,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다. 조지나가 '완벽한 방법'을 실행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이런저런 문제점들은 계속해서 세부적인 '규칙'들로 보완되지만, 그렇게 '완벽한 방법'에 다가가면 갈수록 조지나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할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직 고약한 냄새가 나는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 마구 휘저어대지 않았던, 그녀가 개를 훔칠 마음이 없었던 그때로. 그리하여 마침내 조지나의 명저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9단계: 절대로 개를 훔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라도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렸을 때 괴도 루팡을 동경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바탕으로 "절도는 계획적으로"라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더하여 조지나가 세계적인 대도(大盜)로 성장까지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 책이 결국 이른바 '바른생활' 버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건 책 뒤표지에 언급된 몇몇 이력, 예컨대 '무슨 무슨 대학 올해의 책'이라거나 '미국 학부모 및 교사 단체 선정 올해의 책' 등을 보면 일찌감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 당연한 '바른생활' 이야기를 오로지 바르게만 이끌어 가지 않는 과정에 있다. 어느 누구도 도덕 선생님처럼 "개를 훔쳐서는 안 된다."고 설교하지 않고, 엄마나 친구들도 조지나에게 마냥 따뜻하고 친절한 조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은 영악하면서도 착한 조지나가 무키 아저씨의 따뜻한 배려 아래 스스로 '바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이 책은 기발한 착상으로, 퍽이나 유쾌하면서도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딱히 흠을 잡기 어려운 이 책에서 다소의 아쉬움을 느끼는 건 분량이 약간 적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의 주 타깃 층에 내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순전히 비유를 들어 말하기 위해 아이들과 아이를 둔 부모를 '개'로 상정하자면(맹세하건대 이때의 '개'에는 전혀 나쁜 의미가 없다), 이 책은 '개'의 마음에 들 만한 '거의' 완벽한 책이긴 한데, 다만 내가 '개'가 아니라고나 할까. 물론, 나도 언젠가는 '개'를 둔 '개'가 될 확률이 높으니 그때쯤에는 이 따뜻하고 바른 이야기를 좀 더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겠으나, 불행히도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까지는 '괴도 조지나' 쪽이 좀 더 마음에 들고, '완벽한 방법'으로 훔치려던 건 '개'였을 뿐이고, 나는 그저 '늑대'였을 뿐이고. 뭐, 그렇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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