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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선더볼트 키드였다. 비록 엘렉트로 별의 볼튼 왕이 남긴 유산인,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를 집에서 발견할 수 없었고, 특히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궁극의 비기인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도 도무지 알 수 없긴 했지만, 다음의 여러 행적들ㅡ높은 곳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물질을 떨어뜨렸다거나, 신나게 밖에서 놀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철철 흘렸다거나, 냄새도 별로고 몸에도 별로일 소독가스를 좇아 보건소 차량의 뒤를 미친듯이 뛰었다거나, 오로지 성(性)의 학문적 탐구심을 충족시켜 줄 자료를 찾기 위해 집 안, 특히 부모님의 방을 탐색해 보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은, 내가 선터볼트 키드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일화들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실은 거의 모든 소년들이 선더볼트 키드였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선더볼트 키드였다고 밝히는 빌 브라이슨의 커밍아웃에 새삼스레 놀랄 이유는 전혀 없겠지만, 그가 이 책(원제: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kid)에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에 대한 추억을 펼쳐내며 과시하는 비상한 기억력은 확실히 놀라움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1950년대 미국 디모인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이야기는 가끔 시,공간적 격차로 인해 낯설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유머로 인해 대체로 과장에서 시작해 종종 황당으로 끝나더라도 재미있게 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더볼트 키드'라는 강한 유대감은 그의 이야기들을 어느새 내 이야기로 치환하는 것을 그리 무리없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나 나나,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살았던 것이다.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던, 유쾌하고 재미있고 또 조금은 따뜻했던 그러한 세계를.
그러나 불행히도, 빌 브라이슨이 묘사하는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가 좀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는 '과거'가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더볼트 키드였던 빌 브라이슨이 마음껏 만화책을 볼 수 있었던 키디 코랄과, 그가 사탕을 실컷 훔쳐 먹어도 들키지 않았던 조그만 잡화점 그룬드와, 당시 매혹의 대상이었던 백화점 융커는 당연한 귀결로 이제 사라지고 말았고, 그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예외만은 아니었다. 빌 브라이슨은 흥분되고 아름답던 많은 것들을 과장해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하지만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약간의 자조를 담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옛날의 디모인은 그렇게 멋진 세상이었다. 이제 그런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돌이켜 보면, 선더볼트 키드라면 누구나 "사람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긴 비비탄 총을 서슴없이 사람을 향해 쏘아댔고, 놀이터에 대인용 함정을 파기 위해 미친 듯이 땅을 파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을 알았다면 당연히 빌 브라이슨처럼 맘에 들지 않는 여럿을 태워버렸겠지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선더볼트 키드는 감옥에 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형법 9조 "14세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에 힘입은 바가 아니라, 간혹 선더볼트 키드이기를 포기한 녀석만 아니라면 선더볼트 키드는 결코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는 법은 없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행동하는 것과는 별개일지라도, 우리는 약한 자는 돕고 악한 자는 처벌해야한다는 '바른생활'을 한결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더볼트 키드도 대부분은 끝내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요컨대 가장 변한 것은, 실은 '선더볼트 키드'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재미있고 유쾌한 추억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공감과 아련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그 세계의 아이들은 몸집도 작고 때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어른들에 비해서는 문명화된 존재들"이었다는 빌 브라이슨의 명확한 지적이 시사하는 바처럼, 선더볼트 키드를 선더볼트 키드이게 했던 것은 단지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나 선더비전 그리고 수많은 놀이만이 아니라, 사실은 조금은 순수하고 따뜻했던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던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그러한 따뜻했던 마음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즐거웠던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변화'의 중심에 선 사람들에게, 유쾌하며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행복하지만 날카롭게 상기시켜준다. 기실, 더 이상 선더볼트 키드가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란, 결국 '문명'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