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아주 잠깐 서예학원을 다녔던 적이 있다. 당시에 다녔던 대부분의 학원이 그랬던 것처럼 서예학원도 딱히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부드러운 붓으로 새하얀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곤욕이었던 것은 하루에 한자 5자를 외우는 일이었다. 一이 '하나'고 二가 '둘'이고 三이 '셋'이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지만, 左가 '왼'이고 右가 '오른'이라는 데에 이르면 결코 납득하기 쉽지 않았고, 외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선생님은 5자를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으셨는데, 어려서부터 외박을 즐기지 않았던 나는 곧 깔끔하게 학원을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집에 못가는 것보다야 학원을 안가는 게 나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서예'와의 짧은 인연은 금세 끝나버렸지만, 학원에 다니던 당시에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가기 싫은 학원을 버티다버티다 마지못해 늦게 갔었는지, 혹은 도대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한자를 외우는 게 만만치 않아서 늦게까지 붙잡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학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커다란 종이를 책상에 널찍하게 펼쳐놓으시고는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부드러운 붓을 아무렇게나 일그러지도록 거칠게 다루자 바위가 생겨났고, 다시 붓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바위에서부터 우아하게 올려치자 난이 생겨났다. 또 한쪽 여백에 알 수 없는 한자를 몇자 적으셨고, 마지막으로 붉은색 낙관을 힘주어 찍으셨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어린 내 눈에도 정말로 근사해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독자에게 친절하지는 않은 이 책 <화인열전>의 매력 역시, 단연 '그림'에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굳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당시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듯한, 8명의 화인들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주고, 더욱이 이러한 내용이 좀 더 그림을 '잘' 감상하는 데에 유용한 지식을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령, "절파(浙派)풍의 전통과 남종문인화풍과 진경산수적 요소가 뒤섞인 최득의작"이라는 설명을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겸재 정선의 <득의산수>라는 그림을 보며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가볍게 감탄하는 정도야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기 이전에, 본 대로 느껴도 좋다는 의미다.

사실, 이 책에서 아쉽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저자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으로 확신하며 그 작품을 사제 간의 합작품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소나무 그림이 강세황이 노년에 그린 것이라며, 과연 60대 노필의 선비화가다운 품격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오주석은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그림 우측 상단의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씨가 훼손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표암'이라는 글씨가 그림의 값을 올리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현재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화인열전>에서 빈번히 드러나는 저자의 성급한 추측과, 아는 대로 혹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보려는 듯한 태도에는 상당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즐기는 바로써 보건대, 비록 삼공(三公)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권 p288) 

<병암진장첩>을 두고 김이도가 쓴 화첩의 발문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글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발문을 인용하며 <병암진장첩>이 또 다른 <삼공불환도>(단원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예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김이도가 쓴 글의 진의는 "삼공의 벼슬 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내 마음대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스스로 흡족해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을 만한 좋은 그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꼬리 잡는 듯하기는 하지만, 책 속에서 단원의 그림에 대한 찬사 후 "이래야 단원이지."라는 저자의 감탄이 "이것이 단원이구나." 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다.

다소 비판적 입장에서 이 리뷰를 썼지만, 여전히 나는 <화인열전>이 흥미롭고 의미 있는 좋은 책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아는 만큼 보는 것' 만큼이나 '보는 대로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능호관 이인상' 편의 부제,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오로지 '아는 자'만이 감상할 수 있는 그림만이 과연 훌륭한 그림인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록 左가 '왼'이라는 것조차 모를지라도, 그저 '근사하다.'는 유치한 감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아는 만큼 좀 더 볼 수 있는 여지가 커지리란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無知)'와 '과신(過信)'의 사이에서 솔직한 '자신의 느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건 다만 '모르는 자'의 변명일 뿐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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