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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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980년, 컬러TV의 국내 시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해의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무렵, '한 남자'가 10개월 여의 어둠 속 칩거를 끝내고 마침내 총천연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ㅡ

위에서 언급한 '한 남자'란 다름 아닌 '나'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컬러TV가 시중에 유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누리게 된 것과 내가 태어난 것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유사한 인과관계를 주장할 사람이 족히 수만은 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른바 '컬러 시대'에 태어난 내가 좀 더 "반짝반짝 눈이 부신" 삶을 살기는커녕, 흑백텔레비전의 무채색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되리라고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상관없던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은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단 하나의 장래희망을 고르지 못하곤 했지만, 그게 훗날 장래희망이 그저 맘대로 고른다고 되는 게 아님을 예견한 셈이 되리라고도, 나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보통의 존재'임이 이제는 분명해졌고, 이건 확실히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자랑은커녕 '보통의 존재'는 판타지나 로망과는 억만광 년쯤 떨어져있으면서 콤플렉스와는 꽤나 사이가 좋은, 가능하다면 이쪽에서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감투다. 화려하고 넓은 집과 비싸고 멋진 차, 근엄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와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를 비롯한 완벽한 가정,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능력 등등. TV화면에 비치는 찬란한 어떤 판타지 같은 삶들은 '보통의 존재'에게는 당연한 귀결로 허락되지 않고, 그 대신 '보통의 존재'는 그 대척점의 삶 속에서 콤플렉스에 휩싸이며 번민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럼에도 끝내 내게 고스란히 물려진 것들에 대해, 그리하여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 않은 나의 존재에 대해. 과연 이러한 '보통의 존재'에게도 희망과 로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 '보통의 존재'를 자처하는 이석원은 이 책에서 '보통의 존재'로서 '보통의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보통의 존재'답게 그의 이야기들은 대개 소소한 것들에 관한 것이고 종종 음울하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며 자주 애잔함과 서글픔을 자아내지만,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글은 놀랍게도 독자에게 애틋한 공감과 위로를 전해준다. '보통의 존재'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던,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내밀하고 꺼림칙한 고민과 불안들이 책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저자의 사유와 만나 고요하게 가라앉고, 또한 나아가 보통의 존재에게도 허락된 따스한 추억과 소소한 즐거움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숨겨둔 빛바랜 희망이 새삼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종래에 그는 '보통의 존재'인 스스로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틀림없는 '보통'의 존재이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데에 있다고.

평일 밤 아홉 시쯤, 느지막이 서점을 찾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적한 서점 이곳저곳을 거닐 때면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이런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여웠던 적도 있었지만 행복 중의 으뜸은 평범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서점을 찾고 있다. (p308)

생각해보면 타인의 삶을 접하며 느꼈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색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지닌 이의 삶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찬란함, 그로부터 비롯되는 선망과 부러움이 그 하나고, 마치 검푸른 바다색과 같은, 깊이 침잠할 대로 침잠해 버린 삶을 사는 이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비롯되는 연민과 자기기만적 안도가 다른 하나다. 여기에는 '공감'이 자리할 여지는 적다. 이에 비해 이석원이 공개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삶은 무채색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치 무채색이 빛에 의해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듯, 적나라한 자기응시로 드러내는, 그러나 결코 과잉되는 법이 없는 그의 감정들이 내밀하고 절제된 글들을 통해 독자라는 빛에 닿아 이런저런 감정 상태를 낳는 듯하다. 때로 유치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 같기도 한 그의 글 속에서 이렇듯 커다란 공감과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닮은 '보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의 존재'란, 간단히 말해 지갑에 5천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화려하고 찬란한 어떤 것들을 원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지갑에는 언제나 5천원 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이 5천원으로는 영원한 사랑을 사는 데에도, 주연 배역을 사는 데에도, 금석 같은 친구를 사는 데에도, 이상적인 가족을 사는 데에도 불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5천원으로 종종 추억과 즐거움과 행복을 사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나 서점에서 책을 뒤적일 때에나 즐겨 찾는 블로거의 새로운 글을 읽을 때 5천원은 충분하고, 이것은 결코 값싼 자기만족이 아니다. 중요한 건 보통의 존재에게도 5천원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고, 이건 이석원이 말하듯, 우리의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우러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젠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p99)

생각하기에 따라서 '보통의 존재'도 얼마든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이석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설령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쪽에서 고분고분 믿어줄 마음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쉽게 꺼내기 힘든 고민도 서슴지 않고 펼쳐내는 그의 솔직한 글들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과 더불어 독자의 마음마저 솔직하게 만들어 주고, 하여 독자가 그의 글 속에서 문득 조우하게 되는 솔직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존재'는 종종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슬픔과 좌절의 필요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보통의 존재'라고 너무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보통의 존재'에게도 즐거움과 행복은 남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보통의 존재'란 나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기운을 내자!

ㅡ2010년, 컬러TV가 국내에 시판된 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태어난 후 서른 한 번째 새해를 목전에 둔 '한 남자'는 종종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한 때때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끝내 마음속 로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꽤나 잘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존재로서'ㅡ

아무튼 기운 내.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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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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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이 축구였다면, 나머지 2할 중 1할은 필히 무협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답답하고 억압된 시간 속에서 무협지는 구원이자 해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주옥같은 가르침은 언제나 남의 나라 언어나 복잡한 공식 속이 아니라, 오직 무협지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가령 "언제나 3푼은 감추어 두어라."라거나 "안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라거나, 혹은 "칼에는 흑도 백도 없다."라는 가르침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당시에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었더라면, 아마도 내가 지금쯤 조그만 방파의 수장이 되는 일쯤은 우습지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그렇듯 당시에 무협지의 세계를 신봉했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서로 이곳저곳의 책방에서 무협지를 빌려와서 돌려 읽는, 일종의 '무협 계'를 형성한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려온 무협지를 대체로 작가의 이름으로 통칭했고, 그것으로 그날 하루의 운이 결정되곤 했다. 이를테면, 거의 빨간책을 방불케 하는 '와룡강'을 누군가 빌려오면 잠깐의 자극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식상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금강'이라면 한편 웅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형적인 하루를 보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설봉'이나 '용대운'을 누군가 빌려올 참이면 그날은 무협의 멋을 제대로 느낄 하루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실험성이 두드러진 '좌백'은 꽤나 독특한 하루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진산'이라면, 그날의 운은 사뭇 유려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협작가 '진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진산이 무협작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여성 작가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진산의 글은 무엇보다도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진산의 무협 속에는 여타의 무협에서 한결같이 되풀이되곤 했던 '협(俠)'의 이미지가 옅은 대신 '정(情)'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고, 그 무대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기보다는 오히려ㅡ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ㅡ'청산녹수(靑山綠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진산의 무협은, 칼과 검이 난무하는 호쾌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산처럼 혹은 물처럼, 그렇듯 변함없거나 혹은 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서정시인 셈이다.

아마도 유일한 무협 단편집일 거라는 이 책에서 '서정시'와 같은 진산의 스타일은 꽤나 맞춤한 듯 어울린다. 물론 단편의 태생적 숙명상, 기인이사들과 뭇 군웅들은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의 신세내력만 읊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이 필요한, 장편이 지닌 광활한 강호의 호쾌한 매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개인과 가족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 사이의 내용으로 범위를 좁히고 있는 각 단편은 소박하지만 응축된 테두리 안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이야기들의 매력을 뽐낸다. 그러면서도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복수와 무인의 자기완성 등,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십분 녹여내는 솜씨는, 조금 과장하자면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각 단편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각각의 소재를 변주하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가령,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노랫말과 이야기를 병치시킨다거나('청산녹수'), 한 단체 속 동료를 각기 주인공으로 삼는 연작을 쓴다거나('고기만두' 외 3편), 또는 2인칭 시점을 도입하는('잠자는 꽃') 등, 진산은 소재의 소소함과 형식의 다양함으로 이 단편집을 풍성한 매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진산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과 이 단편집의 의의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문장을 떠올린 후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글을 쓴다는 진산의 글은 실로 유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저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꽤나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진산'의 무협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단편무협을 모은 이 책이 적어도 당분간은 진산의 마지막 무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산은 작품해설에서 수록된 단편 '날아가는 칼'의 마지막 문장, "그 후, 어떤 칼도 날지 않는다."가 작별 인사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러한 진산의 결심은 이 책의 제목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진산 무협의 팬들은, 역시 책 속 단편 '고기만두'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내가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원인 모양이다. 그 불가능이 이렇게 기쁠 수가." 단편 '청산녹수'의 '희'처럼,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려는 '진산'이 그 불가능한 소원의 기쁨을 깨달아 언젠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강호를 추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산처럼 굳건하게 맞아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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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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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누나가 나를 붙잡고 뭔가에 대해 하소연을 할 때, 이성과 객관을 유지한 채 자못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다분히 훈련된 깨달음으로, 무심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대꾸를 했다가 원망과 탄식이 뒤섞인 한소리를 듣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채 마냥 넋놓고만 있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여서, 가령 "뭐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대!"랄지 혹은 "그거 정말 웃기는 짬뽕이군!"과 같은, 상대의 말에 감정적으로 완벽히 동조하는 모습을 입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웅변하지 않는 한, 역시 한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한소리'란 이 책의 제목과 사뭇 유사해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긴 해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인간수컷은 필요없어!" 아, 필요 없어서 슬픈 짐승, 그 이름은 인간수컷이어라!

그런데 '인간수컷'이라는 생태계 내의 한 종으로서 내가 그 무용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얄밉게도 종종 그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을 인정받는 종이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바로 고양이가 그렇다. 온몸으로 주인에 대해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개와는 달리, 그 도도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고양이는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종인지. 하느님이 있다면 찾아가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신빙성 있는 가설에 따르면 고양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유쾌한 분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페리네 혹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할 목적으로 지구인들이 매료될 만한 종으로 변신한 것. 과연 인간이 고양이의 매력에 굴복한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이 대목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지구가 정복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인간과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고양이가 주연인 건,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버려진 새끼 고양이 무리와 도리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들을 만나자마자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러다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얻어맞아 피를 보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개, 겐도 역시나 주연이라 하기엔 약하다. 사랑과 질투와 반항과 우정에서부터 심지어 가출과 공주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정상태와 행동양태를 표출하며 요네하라 마리의 집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선사하는 고양이야말로 이 책의 주연으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손쉽게 집 하나를 점령한 자타공인 서열 1위 고양이 도리는 아마도 자신을 파견한 페리네 혹성에 이렇게 교신을 보냈을 게 틀림없다. "고양이 제176524839호, 임무완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추신. 멍청한 개 하나 포함"

하지만 비록 이 책에서 고양이에게 주연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었을지라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의 '행복함'은 무엇보다도 그 모습을 항시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개집에 언제나 개를 묶어두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유기견을 손쉽게 살 처분하는 일본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에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하며, 버려진 동물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또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는 등의 재기 넘치는 유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모습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도록 느껴진다. 특히 냉소와는 거리가 먼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이처럼 따뜻한 유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요네하라 마리를 두고 시인 황인숙은 "의롭고 명민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싱싱한 유머감각!"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시인의 언어가 표현하는 그 적확함을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따뜻함은 전염되는 까닭인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시선이 따뜻함만을 바라보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따뜻하다. '잡종'이라는 말에 정색하며 '비순종'이라는 말로 정정해주는 수의사가 있고(그는 밥먹듯이 동물병원의 상호를 바꾸는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사기나 의료사고와 같은 어두운 사건과 연루되어서는 아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고양이들에게서 죽은 자신의 고양이들을 떠올리고는 펑펑 우는 중년의 사내가 있고(다만, 그의 며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악독한데, 이건 비단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들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아픈 고양이들을 위해서 함께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나서주는 이웃이 있으며, 불쑥 찾아 온 개에게 기꺼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그 개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들의 따뜻함은, 미국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고양이의 잠든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여"라고 일제히 말한 것을 굳이 통역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요네하라 마리가 적고 있듯,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따뜻함'과 '행복함'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던 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요네하라 마리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려동물과의 필연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 새로운 동물을 입양하는 일은 이제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겪는 슬픔과 고달픔과 어떤 소동들의 난처함은 이 책에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도 결국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느끼는 덕분일 테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개와는 함께 살아봤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간수컷의 위치는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그 이유가 고양이 때문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에게 정복되어 모두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구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한 행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 책 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나는 고양이의 지구정복 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빠른 페리네 혹성인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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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에 길을 묻다 - 장원재의 한국 축구 산업화 제안 SERI 연구에세이 73
장원재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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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K리그'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최종전을 장식했던 이 카드섹션의 문구는,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서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거리 곳곳을 채웠던 수많은 팬들은 월드컵이 끝남과 함께 일상으로 복귀했고, 그 일상에 K리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또 다시 맞이한 남아공 월드컵. 태생적인 속성상 충성스런 팬들을 보유하지 못해 텅비기 일쑤인 광주 월드컵 경기장에는 스크린에 펼쳐진 대표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처럼 수만의 관중이 몰렸고, 전국의 거리 곳곳에도 다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축구를 향한 조촐하고 썰렁하던 응원은 순식간에 다시 장엄하고도 열정적인 응원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축구팬은 아니고, 또한 그들이 모두 축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님은 자명하다. 국가 대항전이라는 월드컵의 특성상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들은 그저 '대한민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고, 더욱이 그것이 지구촌 축제라는 점에서 기꺼이 동참하여 즐기기를 원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화면을 보며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응원한 신명났던 경험이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으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이 바라고 응원하는 건 축구 그 이상의 것이고, 이것은 K리그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단지 월드컵에서나 가능한 것들이라고 종종 사람들은 단정하곤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K리그와 월드컵이 같은 '축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 명백한 이상, 그러한 섣부른 단정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꽉 찬 관중석과 열정적인 응원, 팀이 이기고 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는 환희와 슬픔, 상대에 대한 적대적 반응과 경기에 대한 순수한 찬탄, 기실 이 모든 것들이야말로 바로 축구를 묘사하는 '모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같은 유럽의 일부 축구리그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요컨대, 축구를 향한 열정적인 응원과 열광은 결코 월드컵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K리그의 과제는 분명해지고, 아울러 유럽리그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모델로 하여 K리그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이 책의 작업도 의의를 지닌다.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콘텐츠인 축구. 산업화에 따라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하는 축구. 이러한 축구를 좀 더 예쁘고 매력적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드라마'라는 소스를 더하여 축구팬들을 만족시키고, 나아가 축구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도 어필해야 한다는 건, 월드컵에서 펼쳐졌던 축구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당연한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년에 고작 한 달뿐인 그 특별한 환희를 일상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이 한국축구의 당면과제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가 잘 '알고만' 있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선순환'의 구조를 마련하여 열정을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지만, 막상 그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면 여기저기서 난관과 맞닥뜨리게 마련이다. 마냥 유럽의 열정적인 리그를 모델로 하고자 하여도 많은 해법들이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기에 섣불리 시도하기가 만만치 않다. 가령, 대기업에 기생하는 형태인 현 '기업' 프로팀은 시민을 기반으로 자생하는 '지역' 프로팀으로 가는 것이 백 번 옳겠지만, 매년 적지 않은 적자를 감수하는 각 팀들이 기업의 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재정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몇년 전 거의 모든 내셔널리그 팀들이 K리그로의 승격이 불가하다고 밝힌 데서 보듯, 승강제는 강등하는 팀과 승격하는 팀 모두에게 현실적으로 '부담'이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책의 제안도 특별히 새삼스러울 것은 없고, 더욱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도 사실 무리가 있다. 동남아의 선수를 영입해 K리그의 시장을 아시아로 확대하자거나, 대학팀들을 리그로 끌어들여서 K리그와 N리그를 각각 16-16 혹은 그 이상의 숫자로 편제하자는 제안들은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동남아의 선수들이 K리그에서 선호되는 남미와 동유럽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란 회의적이고, 또 16-16 이란 편제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그것이 곧 K리그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와는 제반환경이 사뭇 이질적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거의 유일한 모델로 삼은 것도 '현실적인 취사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언급한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의들은 그 시도 자체로 반가운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이 책이 한국축구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내용 자체도 소략한 편이지만, 적어도 월드컵의 열광만을 기대하며 가능성이 희박한 월드컵 단독 개최를 위해 눈먼 돈을 쓰려는 한국축구협회나 혹은 단발성 이벤트에 대한 환호만을 기대하며 K리그의 일정까지도 바꿔주며 유럽의 유명팀과의 친선경기를 환영하는 프로축구연맹에 비하면, 이 책의 제안은 차라리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라고 할 법도 하다. 무엇보다도 4년마다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노력만큼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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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1930-2010
헤르만 악셀 일러스트 / ODbooks(오디북스) / 2010년 4월
절판


1930년에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월드컵부터 지난 2006년 독일에서 열린 제18회 월드컵까지 모두 아우른 이 책은 일러스트의 향연으로 무엇보다도 눈이 즐거운 책이다. 각 선수들의 특징을 묘사해내는 캐리커처나 각 대회의 주요사항을 포착하는 시선은 재미있으면서 독특하고, 주요 경기의 골 장면이나 특정 선수의 플레이를 재현해낸 일러스트는 치밀하면서도 재기가 넘친다. 책의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월드컵의 특별한 순간이 펼쳐지면서 독자가 월드컵의 묘미를 만끽하도록 만든다.

월드컵의 첫 대회는 우루과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우루과이로 향하는 각국의 여정이 만만치 않았고, 그 긴 여정과 치열한 승부의 끝에는 월드컵 창시자인 줄 리메의 이름을 딴 줄리메 컵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4년 월드컵은 스위스에서 열렸다. 당시 독일이 헝가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사건은 '베른의 기적'으로 회자되는데, 여기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이 바로 베른에 내린 비와 최초로 나사식 뽕을 장착한 아디다스의 축구화였다. 독일은 조별예선에서 그들에게 대패를 안겼던 헝가리에 3대2로 승리를 거두었다.

1966년 월드컵을 자국에서 치렀던 잉글랜드는 드디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며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을 살렸다. 자국을 위한 몇몇 특혜 문제로 도마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들은 우승을 할 자격이 있는 팀이었다. 한편,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른 게 바로 이 대회이기도 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연이어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 두 대회를 거치는 동안 크루이프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다. 물론, 1978년 대회의 경우 크루이프는 대회에 불참했지만, 그가 네덜란드 축구에, 그리고 세계 축구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토탈 풋볼'로 대변되는 새로운 전술의 선구자였으며, 또한 '크루이프 턴'의 창시자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마라도나에 의한, 마라도나를 위한 월드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손으로 골을 성공시키는 비신사적인 짓을 저질렀지만, 곧바로 세기의 골로 꼽히는 환상적인 골을 성공시킴으로써 그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결국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차지했고, 핸드볼 파울 논란은 '신의 손'으로 남았다.

지난 2002년 FIFA의 인터넷 투표를 통해 '세기의 골'로 선정되었다는 마라도나의 골을 헤르만 악셀은 위와 같이 묘사해 놓고 있다. 여러 차례 본 골 장면이지만, 이렇게 보니 또 색다르면서 재미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카메룬의 로저 밀러는 38세의 나이로 4골을 기록하면서 카메룬의 8강행의 1등 공신이 되었고, 그의 세레머니는 축구팬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42세의 나이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더욱 놀랍게도 또 다시 골을 기록하며 월드컵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선명히 새겼다.

브라질이 우승했지만, 그보다는 이탈리아 로베르토 바조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기억되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물론, 당시에 실축을 했던 건 바조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공을 허공으로 날린 건 꽤나 강렬했고, 무엇보다도 토너먼트에서 놀라운 활약을 선보인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다.

몇 번을 되풀이해봐도 감동적이고 놀라운,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안정환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넣은 골든골 장면이다. 그림의 오른쪽 편을 보면 이탈리아의 왼쪽 풀백 코코가 붕대를 감고 있는 게 눈에 띄는데, 그 묘사 하나만으로도 악셀이 얼마나 충실하게 그림을 그렸는지를 알 수 있다. 단, 골대 뒤편 걸개의 글씨는 차마 한글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의 우승팀은 이탈리아였지만, 이 대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지네딘 지단이다. 지단은 이 대회 직전에 이미 은퇴를 밝혔기에 이 대회는 지단이 마지막으로 축구 인생을 마무리하는 무대였고, 과연 그는 이 대회를 끝으로 그라운드 위를 떠났다. 물론, 그의 '박치기'는 영웅의 퇴장 장면으로 삼기에 그리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마지막까지 인상적이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과 관련해서, 이 책은 본선 32개국의 주요선수 한 명씩의 캐리커처를 수록해 놓고 있다. 당연히 한국의 선수는 박지성.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국가의 선수로는 아르헨티나의 메시와 나이지리아의 카누 그리고 그리스의 카라구니스가 선정되었다. 캐리커처의 얼굴 크기로만 따지면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16강 진출이 확실하다.


지난 월드컵의 역사를 모두 다루는 이 책은, 기실 그렇게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치 넘치는 일러스트가 이 책의 내용을 특별하게 바꾸어 놓았다. 글로 묘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그림 덕택에 생동감을 찾았고, 특히 각 대회의 특징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그림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록된 500여 컷 중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었고, 그래서 책을 들여다 보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게다가 도판의 크기는 시원시원해서 소장의 가치도 한껏 높여준다. 한 마디로 단언컨대, 가히 축구팬들의 보물이 될 만한 책이다.


덧.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이 책에서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선수들의 이름 표기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선수들의 이름 표기는 영어식 발음을 토대로 하는데, 그로 인해 실제 우리가 아는 선수의 이름 표기와는 사뭇 달라졌다. 가령, 월드컵 역사상 한 대회 최다골의 주인공인 프랑스의 쥐스트 퐁텐이 폰태인으로, 네덜란드 선수인 레이카르트가 리지카드로, 그리고 독일 선수인 게르트 뮬러와 루디 펠러가 각각 거드 뮬러와 루디 볼러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잉글랜드 선수인 리네커는 라인커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다양한 국적을 지닌 선수들의 이름을 일관되고 정확하게 표기하기란 어렵지만, 약간의 감수만 거쳤더라도 좀 더 나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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