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서평단 알림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서평단 도서입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소위 높으신 분들이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는 소식이 종종 나오는데, 그때 그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그런 일이 없다, 기억이 안 난다, 오해가 있었다" 등등, 그들은 주로 이딴 말들을 해대는데, 나는 그걸 볼때마다 도대체 저런 대가리, 그러니까 후안무치에 건망증에 대화불능의 대가리를 달고서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것은, 그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래서 더 얄밉고 혐의가 짙어보이는 그들이 잠깐 세간의 관심을 끌다가는 곧, 무혐의나 집행유예로 풀려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들의 '모르쇠'에는 무슨 신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디케의 눈>에 대한 신문광고를 보고 처음 떠올렸던 것은, 바로 그 '모르쇠'의 비밀을 혹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였었다.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하여 법조계의 논란을 야기하였고, 결국 연재를 그만두고 검사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저자가 못 다한 이야기를 한다면 무언가 큰 비밀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지나친 기대만은 아닐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후안무치에 건망증에 대화불능의 대가리가 탐났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대가리를 보면서 매번 분개해하느니 차라리 이쪽에서도 그런 대가리를 한 번쯤 달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런 대가리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 모양이니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서, '수사 제대로 받는 법'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란다 경고'에 얽힌 이야기와 '경찰차 뒷좌석'에서 들은 범인 진술의 증거효력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모르쇠'의 비밀이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사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ㅡ굳이 구분하자면ㅡ'수사 제대로 하는 법'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목이기도 한 '디케의 눈'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통해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저자는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가 단순히 공정한 법집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진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기란 매우 어렵고, 그래서 법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法)에 대한 인식이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가 말하는 '쉽게 깨지는 유리병' 같은 법은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뿐이어야 할 진실이 또 다른 진실과 맞붙고, 확실한 증거가 명백한 위증으로 드러나고, 재판이 오판이 되고, 창조론과 진화론이 뒤엉키는 등의 다양한 사건과 판례를 접하다 보면, 과연 유일한 '진실'과 절대적인 '법'이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지 조금씩 회의감이 들면서 저자가 말하는, 법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십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서로 대립되는 논쟁점들을 가진 각 사례에 관한 저자의 친절하고 재미있는 설명을 읽다보면, "법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처럼 구애와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법이 어렵고 생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쉽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도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이 책이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미국 판례를 소개하는 데 치우쳐져있다는 점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막상 현실로 눈을 돌리면 법에 대한 인식은 또 일변해버리고 만다. 멀리 갈 것 없이 최근만 보더라도, 어느 강연에서 모 회사가 제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 동영상이 버젓이 존재함에도 그 회사가 관련된 비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고, 백주대로에서 폭행을 행사하고도 '야당'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며, 수천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하고도 경제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풀려나는 사람도 있는 게 부조리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공평해 보이는 법의 이면에는 또 다른 논리가 있다고 법의 유연함과 정당성을 옹호하지만, 그 논리는 현실 속에서 언제나 약자의 희생으로 귀결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이 책은 사람들이 법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이 책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법'과는 여전히, 상당한 괴리가 있지 않나 싶다.

들려오는 소식이 하도 어이없는 것들뿐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도 자연히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하여 이 책의 평가가 조금은 부당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자가 일종의 '고급 정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일반에 널리 알리다가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던 전력(前歷)을 고려할 때, 이 책이 '흥미로움'을 넘어 부조리한 현실에 다다르지 못한 것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디케가 눈을 감고 '삼가고, 또 삼가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나 약자에 대한 외면으로 귀결될 때, 그 눈을 가린 천을 기꺼이 벗겨서 약자의 실상을 똑바로 보게 하는 것이 또한 법조인의 의무가 아닐까.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디케의 '감은 눈'보다는 오히려 시민의 '뜬 눈'이 더 신뢰할 만하고, 그래서 디케가 부디 '감은 눈'을 뜨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너무 법을 불신하는 지나친 말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미친 소' 때문에 들썩이고 있다. '미친 소'를 사람이 먹고 죽을 확률은 로또에 걸린 사람이 돈을 찾으려다 번개를 맞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친 소'를 걸러낼 만한 확실한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미친 소'의 전면적 수입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어느 쪽이든 '인간'의 관점에서만 비롯된 것일 뿐, 정작 미쳐버린 '소'에게는 관심이 없다. '소'가 '미쳤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소'는 대체 왜 '미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당사자인 '미친 소'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친 소'는 말이 없다. 아니, '소'는 본래부터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아니, '소'는 사실 온몸으로 말을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의 말을 들어줄 사랑과 연민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 아닐까.

<희망의 밥상>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의 실상은 정말로 끔찍하다.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소들에게 푸른 풀밭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소들은 제 한 몸 편히 누일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채 온갖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뒤섞인 사료를 먹고 비대해질 것만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직 '무게'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소들은 몸만 거대할 뿐 제대로 서는 것조차 하지 못해서, 도축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다른 소들과 엉켜서 쉽게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예사라고 한다. 심지어 사료에는 동물의(소를 포함한) 몸 일부도 갈아져서 들어가 있기에, 초식성 동물인 소들은 본의 아니게 육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가 미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인간이 '소'만 유달리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할 특별한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소고기만큼이나 인간은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등을 두루 좋아하고, 소의 처우에 잔인하고 무정한 것만큼이나 돼지나 닭, 그리고 새우나 연어와 같은 어류의 처우에도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쏟을 리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장식 농장에서는 임신한 돼지에게 조차도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고, 닭들은 종종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펄펄 끓는 물에 담가지기도 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였을 돼지와 닭들이 각각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고 서로의 볏을 쪼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도록 맘껏 뛰어다닐 자유가 허용되는 대신 돼지들은 꼬리가 잘리고 닭들은 부리를 잘린다고 한다.

불행하게도(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동물들의 수난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그저 '먹거리'로서만 가치를 지니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 지상명제로부터 '인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범벅된 사료를 먹고 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들은 죽음조차 편안하게 맞지 못하여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기계적으로 '처리되고', 바로 그 '처리된' 고기가 '인간'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농약에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그저 크고 빠르게(혹은 수송상의 이유로 느리게) 자라도록 '처리되고', 이것이 또한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것이다. 그것의 치명적 위험성은 가리어진 채.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로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이윤 추구'에 가장 큰 책임을 묻는다.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마저도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들의 행태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의 '재력'에 회유된 정치가들의 동의 혹은 묵인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분별한 이윤추구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향후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올 것이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몇 가지 예로, 상품가치로서 인정받은 특정 종(種)의 작물들만이 재배되면서 종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거나,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이 오염되고 낭비되면서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침팬지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 책의 저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희망의 근거로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 맞서서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비윤리적인 생활환경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등이 있음을 소개하고, 그들이 이룬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선택의 영향력을 옹호한다. 즉, 자신의 지역에서 난 유기농 식품을 먹고, 보다 존중 받으며 길러진 동물들을 먹고(물론 저자는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육식을 가급적 적게 섭취할 것을 권한다),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진 먹거리를 먹고자 하는 등의, 사람들의 윤리적 선택이 모여져서 종래에는 다국적 기업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구의 희망은 개인의 '희망의 밥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뇌라는 기관(우리의 두개골 속에 든 끈적끈적한 세포로 이루어진 해면 조직)은 가장 놀라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신과 마음이 유리되어 버리면 그 기술은 악마적인 목적에 악용될 수가 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사랑과 연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똑똑할 수는 있으나 지혜로울 수는 없다. (p423)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극도의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재배되거나 길러진 식물과 동물을 사람이 먹게 되면 그들이 죽으면서 해소되지 못한 '화'의 독소가 그대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라는. 물론, 이것은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희망의 밥상'에 요구되는 것도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인류의 발전된 영농기술(농약과 비료, 유전자 변형 등)은 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는 게 현실이고, 그것은 과학적 수치로 계산되는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치 따위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희망의 밥상'에 필요한 것도 생명 자체와 지구의 환경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최근에 벌어지는 '미친 소'에 대한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한 번쯤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친 소'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오직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만 국한된다면 '미친 소' 사태는 언제라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미친 소' 문제가 우리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 것은 뇌 용량이 2MB에 불과한 사람이(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있어서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동물의 공포'가 실상 '인간의 횡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의 뇌 용량이 2GB를 넘어 2TB에 이르더라도 인간이 경제적, 과학적 수치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양적인 차이에만 불과하고, 따라서 거기에 사랑과 연민이 자리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들을 위해서도, 최소한 마음속에나마 조그마한 촛불 하나쯤은 켜두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연민이 없는, 그저 똑똑하기만 한 뇌의 악마적 사용이 초래한 광우병이 결국 뇌에 대한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미친 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소'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더욱 절실한 일이 아닐까.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ㅡ제러미 벤담 (p123)

ps. 그러고 보니 뇌 용량이 2MB인 사람은(그러니까, 행여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사랑과 연민이 있어서 지혜로울 것은 고사하고 어차피 똑똑하지도 못한데, 이건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설상가상일까?


댓글(2)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from [로처의 사랑방] 2008-05-28 20:32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불과 얼마 전부터 ‘웰빙’ 이나 ‘참살이’라는 말이 유행 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진 듯 하구요. 환경이나 먹거리에 유기농 바람도 불고 있습니다. 최근의 경향에 따라, ‘슈퍼사이즈 미’라는 영화도 있었구요, ‘슬로우 푸드(Slow food)’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방송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다큐에서도 먹거리에 대해서 다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유기농과 자연을 얘기..
 
 
로처 2008-05-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코리아에서 보고 방문했습니다.
제가 불과 반 년전에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미친소는 남의 나라 얘기였는데,
변화는 참 빠르게 찾아옵니다.

중간에 쓰신 어떤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 맞지요?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이 책 맞는 듯 합니다.
정답이라면 저는 경품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

제 글 오래전 글이지만 먼댓글 걸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요, 건강하세요

Fenomeno 2008-05-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이 쓰신 글도 잘 읽어보았습니다.
도표로 대단히 알기 쉽게 정리해 놓으셨네요.
게다가 한국 내의 관련 사이트들까지 정리해 두셨구요. ^^

중간에 언급한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가 맞네요.
경품은..미처 준비를 못해서..^^;

님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독서하세요.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2007-2008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최종전까지 이어진 맨유와 첼시의 치열한 우승 레이스 끝에,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최근 4시즌 동안 맨유와 첼시는 두 번씩의 우승을 나눠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다소 비약하자면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승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맨유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팬 층을 보유한 팀이고, 첼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주로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오는 22일에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사상 최초로 잉글랜드 팀끼리 맞붙게 되었고, 그 두 팀이 바로 맨유와 첼시라는 사실은 그러한 비약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어쨌거나, 바야흐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성시대라는 것에 이견을 제기하기 어렵다. 굳이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매치 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최근 몇 년간 유럽대회에서 잉글랜드 클럽이 이룩한 성과와 유명선수들의 잇따른 프리미어리그행 소식은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만든 두 축은 역시, '세계화'와 '자본주의'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최근의 위축된 축구 이적시장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금으로 이적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잉글랜드 클럽들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전세계로 방영되는 프리미어리그의 인기에서 비롯된 해외자본의 대대적인 투자인 까닭이다.

사실 이 책에서도 일부 지적하듯이,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축구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이 영국의 훌리건을 '문명의 수치'라고 부를 정도로 영국 축구는 훌리건들의 폭력과 광기에 몸살을 앓아야 했고, 심지어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헤이젤 참사'와 '힐스브로 참사'로 인해 몇년간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대회 참가가 제한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위기를 기화로 하여 영국 축구는 거대 자본을 끌어와 축구장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테일러 리포트'로 대변되는 영국 축구의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1992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세계적 확대와 자본의 결합이 더욱 공고하게 맞물리면서 오늘날 프리미어리그는 유례없는 성공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성공이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밝은 면이라면, 그 반대쪽에 자리한 어두운 면이 없을 수 없고,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어두운 면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미어리그가 세계로 퍼지면서 함께 흘러 들어간 영국 훌리건 문화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든가,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민주적 행태를 주창하는 세계화 이론에도 불구하고 셀틱과 레인저스의 뿌리 깊은 종교적 갈등이 근절되지 못하는 현상이라든가, 혹은 우크라이나의 카르파티 구단이 유럽세계와 유럽의 축구구단이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 모델에 집착하여 나이지리아의 흑인 선수를 영입했음에도 상이한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 것 등의 사실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카르파티의 주장인 유리는, "역사상 카르파티 최고의 순간들은 구단이 모두 지역선수들로만 이루어진 통일된 구단이었을 때 일어났죠."라고 말하는데, 이는 축구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 명제로 새겨들을 만하다.

한편,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유벤투스는 승부조작과 연루된 파문으로 세리에B로 강등되는 일이 있었다. 유벤투스는 아넬리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유벤투스의 부정은 곧 아넬리가의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 따르면, 잔니 아넬리의 조부는 언젠가, "기업가란 원래 정치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재력과 권력과 축구는 공고하게 얽혀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현 AC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르수코니의 재력과 권력이 어떤 식으로 AC밀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지, 또 반대로 AC밀란에 대한 팬들의 애정이 어떻게 베를르수코니의 정치권력으로 연계되는지를 통해서 자본과 얽매인 축구의 폐해를 드러내 준다. 또한, 브라질에 만연한 축구계에서의 부정부패를 자본주의가 몰아낼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있었음에도, 그것이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브라질 축구를 더욱 위축시킨 사례를 제시하면서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세계화'와 '자본주의'가 축구에 가져다 준 달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음울한 실패와 충돌 또한 자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세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도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대단히 흥미롭고 현장감 있게 펼쳐진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바탕으로 저자는 축구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러운 일이지만, 불행히도 결코 그렇지 않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저자는 암울한 현상들이 존재함에도 '세계화'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냉철한 저널리스트가 다분히 감상적으로 변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저자가 감상적으로 변하는 부분,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계화(혹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애써 잊게 되는 부분은 이 책에서 두 가지 정도로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매력'에서 바르샤의 민족주의를 다루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문화 전쟁'에서 세계화에 따른 미국의 문화 분열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바르샤가 세계적 상업주의에 빠지지 않고, 축구를 폭력과 광기로부터 구해낸다고 하며 적극적으로 바르샤의 가치를 옹호하는데, 그와 관련된 사례들은 대단히 낭만적인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 분열 내용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세계화'의 적이 미국이라는 항간의 인식에 대해 반박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이고, 더욱이 별다른 진지한 접근도 없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을 옹호하는 것은 아무래도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저자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그가 바르샤의 팬이라는 것과 그의 조국이 미국이라는 사실과 결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감상적인 면모는 저자가 관찰한 많은 현상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는 주요원인으로 지적할 만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이 일관된 하나의 주제로 엮이지 못하고 독자에게 다소의 혼란스러움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놀랍고 흥미로운 고찰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의 축구에서부터 이란의 축구까지 파고드는 저자의 광범위한 접근은 그 자체만으로도 꽉 찬 지적 포만감을 주며, 궁극적으로 저자의 고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은, 바로 독자의 몫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가 우리네 안방까지도 깊숙이 침투한 오늘날, 그 화려한 이면을 잠시 돌아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넘치도록 충분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 e - 시즌 2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2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나는 살아가면서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한자(漢字)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떠올린 건 和자와 樂자, 단 두자였다. 그 중 和자에 대해서라면, 나름대로는 내 주장만이 옳다고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며, 상대적인 관점에서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자고 하는, 진부하지만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樂자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이왕 나온 한 세상을 가급적 즐기면서 즐겁게 살자는, 진부하면서도 상당히 속물적인 의도가 가득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디 세상에 즐거운 일뿐이겠는가. 누구나 즐겁게 살고 싶은 마음은 매 한 가지겠지만, 의외로 樂이라는 것은 마치 희귀한 재화라도 되는 것인 양,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너무 없어서 도무지 세상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 있는 반면, 너무 많이 가져서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의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없이 살더라도 즐거운 마음을 잊지 말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내가 위에서 말한 樂도 그런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물질적 생활을 전제로 한다는 게 명백한 현실이 아닐까.

이 책 <지식e-시즌2>에서 보여주는 40가지의 에피소드들은 바로 그러한 현실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에 비하면 가슴을 울리는 에피소드들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대신에 보다 현실적이면서 현재 우리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들이 좀 더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40개의 에피소드들은 크게 喜,怒,哀,樂의 4개 챕터로 구분되어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喜,怒,哀,樂편의 각 에피소드들이 전적으로 그 글자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쌀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오직 기쁜 일일 리 만무하고, 치매와 관련된 에피소드에 그저 분노의 감정만 생기지는 않으며, 사람을 사랑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은 최민식의 일화가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며, 영국밴드 첨바왐바의 기행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喜,怒,哀,樂은ㅡ마치 사람들 간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ㅡ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나의 기쁨이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의 분노를 사고, 나의 슬픔이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며, 또 나의 분노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모두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古권정생 선생님의 일화가 당당히(?) 樂편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선생님이 한 해 수천만 원씩 들어오는 인세 수입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난함을 떨치지 못하신 건, 당신 혼자의 樂이 결코 진정한 樂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선생님의 樂이야말로 다른 이의 喜,怒,哀를 보듬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 옷 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 지내다보니 정이 들어 /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고 기다렸다. /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 살다 죽는 게 아닌가." (p369)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궁극적으로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불편한 진실에 슬퍼하고 분개해하면서도 끝내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지향하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식e-시즌2>는 자신이 가진 樂의 소중함을 되새겨주고, 다른 사람의 樂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고 즐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아빠 2008-06-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축구는 한국이다 - 한국 축구 124년사, 1882-2006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미리 밝혀두자면, 사실 이 책을 읽은 것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출간되는 축구서적에 대해서는 다소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더군다나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이 책의 제목에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가 강준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약간의 호기심과, 과연 저자가 무슨 논리로 이러한 발칙한(?) 명제를 이끌어내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것은 일종의 반감이었던 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선,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축구'의 속성과 '한국'의 속성을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그리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축구를 종교요 전쟁이라고 하면서 축구의 본질을 국제,국내적 갈등의 대리전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대리성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한다. 또한, 축구는 독특한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고, 이는 바로 한국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은 늘 국가,민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대단히 평화적이라고 하며, 2002월드컵 때 15개국 대표팀의 응원을 위해 헌신한 10만 '코리언 서포터즈' 활동을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축구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의미부여는 유달리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그대로 한국의 속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나 갈등과 경쟁이라는 축구의 속성이 한국인의 평화적 속성에 이르면, 축구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금세 위태로워 보인다. 게다가 축구가 한국이기 위해서는 축구를 너무 잘해도 열기가 시들해져서 곤란하고, 반대로 너무 못해도 범국민적으로 열광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적당히 잘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매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가치의 패러독스'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한국인의 지극한 축구사랑도 쉬이 수긍하기 어렵고, 축구의 집단주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중국과 한국의 비교는 너무나 도식적이다.

물론, 저자가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이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한국축구의 124년 역사를 더듬는데, 그 과정은 한국에서의 축구가 정치사회와 얼마나 큰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제강점기에 한국축구가 민족의 '존재증명'으로서 기능했다거나, 북한과의 축구대결에서 어김없이 투영되는 '체제경쟁' 의식은 축구가 지니는 경쟁의 속성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식민지 지배와 남북 분단)과 공고하게 엮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5공화국 시절의 스포츠 정책에 의한 한국축구를 거쳐 2002년 월드컵의 엄청난 열광에 이르면,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축구'와 '한국'의 속성이 지니는 위태로운 연결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하나는, '축구' 대신에 다른 단어를 끼워 넣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5공화국이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리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던 것은 스포츠가 정치사회적으로 갖는 파급효과를 잘 인식했기 때문일 터이고, 그 중에서 '축구'는 다만 하나의 하위수단일 따름이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황우석 신화'의 파탄을 보도한 뉴스에서 뒤이어 박지성의 첫골 도전 소식을 전한 것을 박지성에게서 황우석의 대체가치를 찾는 것으로 의심하는데, 이는 바로 '축구'가 수단이라는 점을 저자도 인식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야구나 농구, 심지어 황우석도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요컨대,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에서 '축구'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한국' 대신에 다른 단어를 넣는 것은 어떤가의 문제이다. 해외에서 축구가 각 나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측면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예컨대, AC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AC밀란의 서포터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나, FC바르셀로나가 프랑코 독재에 대항한 카탈루냐 지역을 대변하는 팀이 된 것, 그리고 셀틱과 레인저스가 축구를 매개로 종교대립을 벌이는 등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명백하게 각국의 다양한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 축구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대전제 하에서 축구를 매개로 하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의 고찰은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그러한 의미 부여에 있어서 한국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맺음말'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결론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국민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을 대조해서 보여주며, 明과 暗을 모두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작 결론에서는 축구에 대한 광기를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사실상 국민적 열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대해 반대의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또 비판도 하며 서로 원없이 놀아보자고 끝맺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해 보인다. 더군다나, 국민적 열광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핵심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과잉으로 인해 '다른 것'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획일성'과 '과잉동조'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의 결론은 어느 쪽에도 적용되기 어려운 허무맹랑한 견해로까지 보인다.

한국축구가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어떤 관련을 맺으며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이 책의 고찰이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운 주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한국이 그러한 연관성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한국사회 내에서 축구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이다"에서 '의무'를 규명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축구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각의 환경과 공고하게 얽히면서 '의무'가 되는 지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만족할 만하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저술하기보다는 대부분 당시의 신문이나 관련된 저서, 혹은 TV자료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럼에도 난잡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동시에 상당히 압축적이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의무'에 대한 경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 '의무'가 정치적 이용이든, 과도한 민족주의의 표출이든, 혹은 자본주의의 잠식이든, 그것이 이제 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제외하고 그저 감성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더 이상 축구가 '즐거움'으로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축구가 '의무'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축구'를 사랑하는ㅡ혹은 경계하는ㅡ사람들의 진정한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