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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최근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미친 소' 때문에 들썩이고 있다. '미친 소'를 사람이 먹고 죽을 확률은 로또에 걸린 사람이 돈을 찾으려다 번개를 맞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친 소'를 걸러낼 만한 확실한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미친 소'의 전면적 수입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어느 쪽이든 '인간'의 관점에서만 비롯된 것일 뿐, 정작 미쳐버린 '소'에게는 관심이 없다. '소'가 '미쳤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소'는 대체 왜 '미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당사자인 '미친 소'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친 소'는 말이 없다. 아니, '소'는 본래부터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아니, '소'는 사실 온몸으로 말을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의 말을 들어줄 사랑과 연민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 아닐까.
<희망의 밥상>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의 실상은 정말로 끔찍하다.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소들에게 푸른 풀밭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소들은 제 한 몸 편히 누일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채 온갖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뒤섞인 사료를 먹고 비대해질 것만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직 '무게'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소들은 몸만 거대할 뿐 제대로 서는 것조차 하지 못해서, 도축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다른 소들과 엉켜서 쉽게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예사라고 한다. 심지어 사료에는 동물의(소를 포함한) 몸 일부도 갈아져서 들어가 있기에, 초식성 동물인 소들은 본의 아니게 육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가 미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인간이 '소'만 유달리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할 특별한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소고기만큼이나 인간은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등을 두루 좋아하고, 소의 처우에 잔인하고 무정한 것만큼이나 돼지나 닭, 그리고 새우나 연어와 같은 어류의 처우에도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쏟을 리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장식 농장에서는 임신한 돼지에게 조차도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고, 닭들은 종종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펄펄 끓는 물에 담가지기도 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였을 돼지와 닭들이 각각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고 서로의 볏을 쪼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도록 맘껏 뛰어다닐 자유가 허용되는 대신 돼지들은 꼬리가 잘리고 닭들은 부리를 잘린다고 한다.
불행하게도(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동물들의 수난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그저 '먹거리'로서만 가치를 지니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 지상명제로부터 '인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범벅된 사료를 먹고 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들은 죽음조차 편안하게 맞지 못하여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기계적으로 '처리되고', 바로 그 '처리된' 고기가 '인간'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농약에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그저 크고 빠르게(혹은 수송상의 이유로 느리게) 자라도록 '처리되고', 이것이 또한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것이다. 그것의 치명적 위험성은 가리어진 채.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로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이윤 추구'에 가장 큰 책임을 묻는다.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마저도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들의 행태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의 '재력'에 회유된 정치가들의 동의 혹은 묵인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분별한 이윤추구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향후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올 것이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몇 가지 예로, 상품가치로서 인정받은 특정 종(種)의 작물들만이 재배되면서 종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거나,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이 오염되고 낭비되면서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침팬지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 책의 저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희망의 근거로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 맞서서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비윤리적인 생활환경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등이 있음을 소개하고, 그들이 이룬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선택의 영향력을 옹호한다. 즉, 자신의 지역에서 난 유기농 식품을 먹고, 보다 존중 받으며 길러진 동물들을 먹고(물론 저자는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육식을 가급적 적게 섭취할 것을 권한다),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진 먹거리를 먹고자 하는 등의, 사람들의 윤리적 선택이 모여져서 종래에는 다국적 기업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구의 희망은 개인의 '희망의 밥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뇌라는 기관(우리의 두개골 속에 든 끈적끈적한 세포로 이루어진 해면 조직)은 가장 놀라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신과 마음이 유리되어 버리면 그 기술은 악마적인 목적에 악용될 수가 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사랑과 연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똑똑할 수는 있으나 지혜로울 수는 없다. (p423)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극도의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재배되거나 길러진 식물과 동물을 사람이 먹게 되면 그들이 죽으면서 해소되지 못한 '화'의 독소가 그대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라는. 물론, 이것은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희망의 밥상'에 요구되는 것도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인류의 발전된 영농기술(농약과 비료, 유전자 변형 등)은 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는 게 현실이고, 그것은 과학적 수치로 계산되는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치 따위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희망의 밥상'에 필요한 것도 생명 자체와 지구의 환경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최근에 벌어지는 '미친 소'에 대한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한 번쯤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친 소'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오직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만 국한된다면 '미친 소' 사태는 언제라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미친 소' 문제가 우리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 것은 뇌 용량이 2MB에 불과한 사람이(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있어서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동물의 공포'가 실상 '인간의 횡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의 뇌 용량이 2GB를 넘어 2TB에 이르더라도 인간이 경제적, 과학적 수치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양적인 차이에만 불과하고, 따라서 거기에 사랑과 연민이 자리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들을 위해서도, 최소한 마음속에나마 조그마한 촛불 하나쯤은 켜두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연민이 없는, 그저 똑똑하기만 한 뇌의 악마적 사용이 초래한 광우병이 결국 뇌에 대한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미친 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소'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더욱 절실한 일이 아닐까.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ㅡ제러미 벤담 (p123)
ps. 그러고 보니 뇌 용량이 2MB인 사람은(그러니까, 행여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사랑과 연민이 있어서 지혜로울 것은 고사하고 어차피 똑똑하지도 못한데, 이건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설상가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