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한국이다 - 한국 축구 124년사, 1882-2006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미리 밝혀두자면, 사실 이 책을 읽은 것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월드컵에 즈음하여 출간되는 축구서적에 대해서는 다소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 더군다나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이 책의 제목에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가 강준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약간의 호기심과, 과연 저자가 무슨 논리로 이러한 발칙한(?) 명제를 이끌어내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것은 일종의 반감이었던 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선,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축구'의 속성과 '한국'의 속성을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그리 매끄럽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축구를 종교요 전쟁이라고 하면서 축구의 본질을 국제,국내적 갈등의 대리전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대리성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한다. 또한, 축구는 독특한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고, 이는 바로 한국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은 늘 국가,민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대단히 평화적이라고 하며, 2002월드컵 때 15개국 대표팀의 응원을 위해 헌신한 10만 '코리언 서포터즈' 활동을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축구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의미부여는 유달리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그대로 한국의 속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나 갈등과 경쟁이라는 축구의 속성이 한국인의 평화적 속성에 이르면, 축구와 한국의 연결고리는 금세 위태로워 보인다. 게다가 축구가 한국이기 위해서는 축구를 너무 잘해도 열기가 시들해져서 곤란하고, 반대로 너무 못해도 범국민적으로 열광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적당히 잘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매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가치의 패러독스'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한국인의 지극한 축구사랑도 쉬이 수긍하기 어렵고, 축구의 집단주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중국과 한국의 비교는 너무나 도식적이다.

물론, 저자가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이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한국축구의 124년 역사를 더듬는데, 그 과정은 한국에서의 축구가 정치사회와 얼마나 큰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제강점기에 한국축구가 민족의 '존재증명'으로서 기능했다거나, 북한과의 축구대결에서 어김없이 투영되는 '체제경쟁' 의식은 축구가 지니는 경쟁의 속성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식민지 지배와 남북 분단)과 공고하게 엮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5공화국 시절의 스포츠 정책에 의한 한국축구를 거쳐 2002년 월드컵의 엄청난 열광에 이르면,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축구'와 '한국'의 속성이 지니는 위태로운 연결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하나는, '축구' 대신에 다른 단어를 끼워 넣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5공화국이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리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던 것은 스포츠가 정치사회적으로 갖는 파급효과를 잘 인식했기 때문일 터이고, 그 중에서 '축구'는 다만 하나의 하위수단일 따름이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황우석 신화'의 파탄을 보도한 뉴스에서 뒤이어 박지성의 첫골 도전 소식을 전한 것을 박지성에게서 황우석의 대체가치를 찾는 것으로 의심하는데, 이는 바로 '축구'가 수단이라는 점을 저자도 인식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야구나 농구, 심지어 황우석도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요컨대, '축구는 한국이다'라는 명제에서 '축구'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한국' 대신에 다른 단어를 넣는 것은 어떤가의 문제이다. 해외에서 축구가 각 나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측면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예컨대, AC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AC밀란의 서포터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한 것이나, FC바르셀로나가 프랑코 독재에 대항한 카탈루냐 지역을 대변하는 팀이 된 것, 그리고 셀틱과 레인저스가 축구를 매개로 종교대립을 벌이는 등의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명백하게 각국의 다양한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 축구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대전제 하에서 축구를 매개로 하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의 고찰은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그러한 의미 부여에 있어서 한국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맺음말'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결론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국민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을 대조해서 보여주며, 明과 暗을 모두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정작 결론에서는 축구에 대한 광기를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사실상 국민적 열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대해 반대의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또 비판도 하며 서로 원없이 놀아보자고 끝맺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해 보인다. 더군다나, 국민적 열광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핵심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과잉으로 인해 '다른 것'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획일성'과 '과잉동조'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의 결론은 어느 쪽에도 적용되기 어려운 허무맹랑한 견해로까지 보인다.

한국축구가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어떤 관련을 맺으며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이 책의 고찰이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운 주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한국이 그러한 연관성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한국사회 내에서 축구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이다"에서 '의무'를 규명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축구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각의 환경과 공고하게 얽히면서 '의무'가 되는 지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만족할 만하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저술하기보다는 대부분 당시의 신문이나 관련된 저서, 혹은 TV자료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럼에도 난잡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동시에 상당히 압축적이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의무'에 대한 경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 '의무'가 정치적 이용이든, 과도한 민족주의의 표출이든, 혹은 자본주의의 잠식이든, 그것이 이제 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제외하고 그저 감성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더 이상 축구가 '즐거움'으로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축구가 '의무'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축구'를 사랑하는ㅡ혹은 경계하는ㅡ사람들의 진정한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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