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지음 / 은행나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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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직후'에 나온 몇몇 축구선수들의 자서전이 혹평을 받은 것은, 당시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열광을 마케팅에 '이용'했다는 측면보다는 좀 더 진지하고 제대로 된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는, 책 '내용'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축구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던 월드컵 4강과 관련된 이야기는 오히려 축구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시지 않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반갑기만 한 시원한 물줄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이 워낙 부실하다 보니 도저히 축구팬들의 기갈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2002년 월드컵 '직전'에 나온 홍명보의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는 2002년 월드컵의 열광으로부터 일정 부분 비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간 시기로 인해 일단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다. 결과적으로 2002년 월드컵의 그 놀라운 성과를 거의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서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홍명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90년 월드컵을 시작으로 이미 3차례 연속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1994년 월드컵에서는 수비수임에도 두 골을 기록하며 월드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며, 무엇보다도 10년 이상 한결같이 대표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홍명보였기에 2002년 월드컵의 엄청난 성공에 편승하지 않고도 자서전을 낼 수 있었다는 의미다(물론, 그렇더라도 홍명보의 자서전 역시 월드컵 특수에 힘입은 바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축구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한국축구사의 가장 위대한 선수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홍명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2002년 월드컵 전에 출간되었기에 기대할 수 있음직했던 차분함과 진지함이, 한편으로는 종종 심심함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흔히 '홍명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대로 홍명보의 자서전이 진지함으로 가득 차있다고 하는 건 그 자체로 좋고 나쁠 것은 없다. 설령 그의 축구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애조차도 너무 진지하여 심지어 그의 부인 조수미 씨가 결혼 이후에 너무나 과묵한 홍명보 때문에 인형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을 정도였다고(말할 상대를 찾지 못했기에)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렇듯 진지함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홍명보의 자서전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라고 할 만한, 한국축구에 대한 차분한 진단과 제안, 일본 J리그를 경험하며 느낀 한,일 축구의 의미 있는 비교와 그로부터 얻은 교훈 등, 언제 어디서나 '축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의 열정과 진지함은, 유감스럽게도 사뭇 무미건조하게 읽힌다. 좋은 진단이고 좋은 비교이고 좋은 제안이지만, 대체로 간단한 감상으로 끝나고 좀 더 깊이 있는 방향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부록을 제외하면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홍명보가 다른 축구인에 대해 평하거나 혹은 다른 축구인이 홍명보에 대해 평하는 짤막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고, 특히 6장 '아내가 쓰는 나의 사랑, 나의 가족'은 홍명보의 아내인 조수미 씨가 직접 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다시 약간 수정을 했다고는 하지만 2장 'J리그 통신'은 예전에 모 스포츠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을 옮겨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글들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홍명보'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와 기대를 고려할 때, 이 책이 실제로 홍명보 자신의 육성을 전하는 데에 꽤나 적은 분량을 할애하고, 그로 인해 좀 더 내밀한 홍명보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지 못했다는 것은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홍명보의 자서전은 월드컵 직후에 나온 일부 태극전사들의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책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책 자체의 내용에 그리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 보인다.

축구선수로서의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리고 선수로서 마지막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축구인생을 되돌아보고 싶었다는 홍명보의 자서전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홍명보의 자서전이 일정 부분 유용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축구팬과 홍명보 자신 모두에게 <영원한 리베로>가 결코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보다도 '홍명보'라는 훌륭한 재료를 책에서 충분히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과 2004년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홍명보의 행보는, 그래서 그러한 아쉬움을 그의 또 다른 자서전에 대한 기대로 치환하게 만들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홍명보'라는 이름 석 자의 무게가 여전하고, 그의 축구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원한 건 홍명보일 뿐 이 자서전이 영원할 필요는 없다. 최근 U-20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변함없이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홍명보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길, 좀 더 충실하고 매력적인 자서전이 언젠가 꼭 다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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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순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마누엘라 브란다오 지음, 박영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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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대인배'라고 할 만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탓에, 23살 짜리가 자서전을 썼다고 하면 일단 '10년은 이르다, 이 애송아!'와 같은 냉소어린 반응을 보여주는 게 상례겠으나, 그 '애송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가 지난 시즌 보여준 '압도적'인 활약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이니, 여기서는 그냥 그가 대략 3억원의 '주급'을 받고 있으며 곧 4억원에 재계약할 가능성이 높다고만 말해두는 것이 낫겠다. 물론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세상은 '애송이'에게 수억씩을 그냥 집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속이 쓰리긴 해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아직 어린 녀석이지만 세계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명이고, 이것은 곧 그의 자서전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축구선수의 자서전이라는 말과도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분명히 밝혀두자면, 호날두의 화려한 이력을 최대한 부각시키려는 듯한, 책 표지를 덮어버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발롱도르 수상ㅡ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다!"라는 내용의 띠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 낫다. 이건 끝내 '엄친아'스러운 어린 녀석에 대한 시기를 포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호날두의 자서전에 대해 갖기 쉬운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즉, 이른 나이에 거둔 성공과 잘생긴 외모, 여기에 자못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호날두의 태도가 합쳐져서 형성하는 어떤 화려한 이미지는, 호날두의 자서전을 그저 젊은 축구선수의 성급하고도 화려한 성공담으로 치부할 우려가 있지만, 정작 호날두가 그의 자서전에서 풀어내는 글 속에는 그가 경험한 '순간'들에 대한 '의외의' 진지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곧, 책의 방점이 '최고'가 아닌 '순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실상 원제는 그저 <MOMENT>이기도 하거니와, 책이 해외에서 발간된 건 그가 발롱도르를 수상하기 전의 일이다). 

호날두의 자서전이 '의외로' 진지할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호날두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그의 삶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는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호날두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인생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들ㅡ이를테면 어린 시절부터 축구선수가 되기 위한 목표를 위해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했던 외로움이랄지, 포르투갈 국가대표선수로 경기에 나설 때 느꼈던 자부심과 책임감이랄지, 혹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견뎌내야만 했던 괴로움과 절망이랄지, 또는 공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소신 같은, 감정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순간'들에 대해 사뭇 열정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호날두는 다만 그러한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꽤나 진부한 주제를, 그의 지나온 삶으로 여실히 증명하며 찬찬히 풀어낸다.

물론, 여전히 호날두의 자서전은 호날두가 직접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수많은 화려한 사진들을 배경으로 인쇄된 글들은, 아쉽게도 사진들처럼 아름답지는 않고, 아주 논리적인 문장도 아니며(그렇다고 글이 엉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경험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다시 말하지만, 그는 고작 23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충분히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항상 배우고 더 나아지려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어린 아이로 생각하고 싶다는 호날두의 삶에 대한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는 '의외로' 적지 않은 감흥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호날두의 말마따나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최고'의 순간이 과연 올지도 불확실하기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다만 '순간'에 충실한 것만이 '최선'일 뿐인 것이다.

호날두의 동료이자 박지성의 '베프'이기도 한 파트리스 에브라는 예전에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호날두를 꼽으며 이렇게 덧붙였었다. "재능을 갖고 있는 선수는 많지만, 그들이 전부 호날두처럼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 법이다. '순간'이 중요하다는 말 따위야 어떤 '애송이'라도 떠들어 댈 수 있지만, 호날두는 연습장에서, 경기장에서, 그리고 그의 삶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행동으로 증명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러니까 여전히 갈 길이 먼 젊은 나이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거나 호날두는, 적어도 말만 앞세우는 '애송이'는 확실히 아닌 셈이다. 뭐, 이 정도면 23살 짜리의 자서전을 읽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정확히 말하자면 호날두는 85년 2월생인데, 그의 자서전이 유럽에 나온 것은 2007년의 일이다).

누구에게나 목표지점이 있지만, 때로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때가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언젠가는 끝이 날 이 여정의 가장 큰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이 여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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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GO! FC 오렌지 1
나우다 타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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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GO! GO! FC 오렌지>는 여타의 축구만화와는 꽤나 차별성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축구만화들이 영웅적인 능력을 선보이는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그의 화려한 축구 여정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GO! GO! FC 오렌지>는 '난요 오렌지'라는 한 축구팀이 한 시즌을 치러내는 동안의 희로애락에 주목한다. 그래서 일본의 2부리그인 'F2'에 소속한 난요 오렌지가 팀의 존속이 위태로운 절체정명의 상황 속에서 1부리그인 'F1'으로의 승격을 향한 대 분투기를 펼치는 것이 바로 이 만화의 중심 줄거리가 된다. 

물론,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은 이 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16세의 나이로 일본 F2의 꼴찌 팀 난요 오렌지의 구세주로 떠오르는 와카마츠 무사시의 능력은 여느 다른 축구만화 주인공들의 능력에 비해 한 치의 모자람도 없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재능을 지닌 무사시라고 할지라도 '난요 오렌지'라는 '팀'에서 그는 여전히 한 명의 팀원일 뿐이다. 그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현실을 이 만화는 결코 예사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의 팀으로서 난요 오렌지가 처한 상황은 여러모로 절망적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난요 오렌지에 모여든 팀원들이 서서히 융합되면서 난요 오렌지를 만년 꼴찌 팀에서 승격을 노리는 팀으로 탈바꿈 시킨다. 재정적인 곤란에서 비롯되는 많은 악조건들과 무사시의 대표팀 차출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선수들의 부상과 경고 누적으로 인한 어려움 등, 승격을 위한 난요 오렌지의 한 시즌은 매우 처절하면서도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고난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난요 오렌지의 행보는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더욱이 작가는 경쟁하는 라이벌 팀들을 넘어야 할 적으로서만이 아니라 모두 각자의 이유로 '승격'이라는 꿈을 지니는 박력 넘치는 팀으로 묘사하고, 또한 '승격'이라는 최고의 목표를 위해 선수들과 구단은 물론이고, 서포터와 지역 주민들의 노력과 염원이 합쳐지는 지점까지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만화의 감동을 한층 배가 시킨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독자들을 난요 오렌지의 서포터인 '오렌지 맨'의 하나로 동참시키고, 나아가 '오레 오레 오렌지'라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응원구호에도 의외의 감동을 받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만화가 지니는 힘이다.

총 13권인 이 만화의 분량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그러나 스페인에서의 어린 시절 중, 전(前) 난요 오렌지의 구단주와 난요 오렌지를 세계적인 클럽으로 만들겠다는, 장난 같은 약속 하나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온 무사시가 난요 오렌지를 세계적인 클럽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모두 담기에 역시 13권은 터무니없이 적은 분량이다. 작가는 무리하지 않고 13권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한다. 여전히 난요 오렌지의 시즌은 계속되고, 그것은 1부리그로 '승격'을 이루든 혹은 2부리그에 '잔류'하든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어쨌거나 힘겨운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 작가는 딱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산뜻하면서도 여운 있는 마무리는 독자에게도 역시 만족스럽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GO! GO! FC 오렌지>는 '승격'으로 대변되는 '클럽의 꿈'을 주제로 한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축구만화'다. 몇몇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축구팬에게는 분명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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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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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내가 결혼했다.'는 발칙한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 발칙함이 너무 지나쳐서 감히 발칙하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아, 그래. 아내는 사람이고, 사람이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거지, 그게 뭐. 아무려나 남편이 임신했다는 것보다야 훨씬 정상적이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아내'는 그냥 아내가 아니라 '나'(소설 속 주인공인 덕훈)의 '현재' 아내이고, '나'와 이혼을 한 것이기는커녕 앞으로도 이혼할 생각이 없단다. 그런데도 '또' 결혼을 하겠다고?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이쯤 되면, 차라리 남편이 임신했다는 게 더 정상적인 것은 아닌가.

누구나 투톱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 팀은 투톱 시스템이야."라고 선언하는 아내(인아)의 말에는 묘한 욕망의 끌림이 있다. '무결점 스트라이커'라고 불리던 셰브첸코가 잉글랜드 무대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무결점 스트라이커'란 명성 자체가 심각한 결점임을 드러냈었던 데서 보듯이, 완벽한 스트라이커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강건한 신체를 이용한 헤딩력,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능력, 원샷 원킬의 골 결정력은 물론, 우아하고 세밀한 개인기와 어느 무대에서나 최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꾸준함과 적응력 등, 이 모든 것을 갖춘 원톱을 보유한 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기에 많은 팀들은 이러한 원톱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투톱 시스템을 선호한다. 적어도, 골을 넣기 위한 적극적인 욕망이 있는 한은 말이다.

신성한 '사랑'에 있어서 '선택'이란 단어를 쓰는 게 온당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특정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선택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베스킨라빈스31'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과 조금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수많은 아이스크림이 하나같이 달콤한 것처럼 어떤 사랑이라도 달콤할 것임은 물론이지만,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만을 골라야할 때의 아쉬움과도 같이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도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다. 바로 그런 때에, 마치 '레인보우 샤베트'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함께 고르는 것처럼, 두 명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령, '섹시한 여자 한 명과 상냥한 여자 한 명'이라거나, 혹은 '잘생긴 남자 한 명과 재미있는 남자 한 명',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랑이 달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선택의 달콤함을 굳이 외면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리라.

골키퍼에게 자유를 허하라
이에 대해, "골키퍼를 두 명 두는 것은 반칙이야."라고 항변하는 덕훈의 말은, 불행히도 미약하기만 하다. 언뜻 생각하기에, 골키퍼는 한 명으로 제한하는 게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골키퍼는 존재 자체가 반칙인 것인지도 모른다. 1992년에 FIFA가 백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한 것도 발로 하는 축구를(종종 머리 혹은 그 밖의 부위도 쓰지만) 손이 수시로 맥 빠지게 만들었던 탓이 크거니와, 더욱이 실상 1863년 처음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됐을 당시에는 골키퍼란 포지션 자체가 없기도 했다(<포포투10월호> 참조). 그래서 그 무렵에는 필드에 있는 누구나 손을 사용할 수 없었음을 물론, 심지어 전술조차 2-9 시스템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나인톱 체제.

'투톱'을 부르짖는 아내는 그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다. 하지만 투톱이든 나인톱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시스템을 자신의 독점적 혜택으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애초에 인아는 덕훈에게 상대의 외도에 대해 묵인할 것을 규칙으로 정하자고 했고, 자신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인아는 골키퍼를 두 명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골키퍼에게 골라인을 벗어나서 마음껏 공격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해야 옳다. 단지, 실제로 덕훈도 다른 여자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아내만큼의 혹은 아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자를 만나지 못했고, 반면 아내는 그러한 또 한 명의 남자를 찾았을 뿐인 것이다.

그 즐겁던 동네축구는 누가 다 내쳤을까?
어린 시절 주로 즐겼던 축구는, 말 그대로 동네축구였다. 골대에만 붙어있어야 하는 골키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서 골키퍼는 대체로 '자유킵'이었고, 그래서 누구나 공을 발로 차다가도 골대 부근에서는 손으로 공을 잡는 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 축구골대는 반드시 직사각형의 반듯한 기둥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서, 그저 말뚝 같은 기둥 하나나 쓰레기통은 물론, 신발주머니 두 개를 벌려 놓는 것으로 축구골대를 대신했으며, 그럴 때는 아예 골키퍼가 필요 없기도 했다. 당연히 포메이션이나 인원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공을 향해 달리는 것이 전부였건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축구는 즐겁기만 했다.

어린 시절의 즐겁던, 그러나 제멋대로였던 축구는 당연히 공식경기로 인정될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언제 어디서나 수월하게 허용되는 방식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두 명의 남편과 결혼생활을 이어가려는 인아의 삶 또한 공개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비록 티베트나 모수족의 경우처럼, 현실 속에서도 일처다부제(혹은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모든 형태)가 영위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일 뿐,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곧 틀렸다는 의미가 될 수 없음 또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단지 '다름'과 '낯섦'에만 집착하는 와중에,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축구공의 진실.
축구공 안에 담겨 있는 위대함이란 행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축구공이란 행복과 가까운 데 있는 무엇이다.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자본가들이 선수들을 축구 노동자로 만들어 축구라는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더라도, 정치가들이 축구 열기를 이용해서 표를 훔쳐 가고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축구공 속에 깃든 행복만은 그들이 독점할 수도, 팔아먹을 수도, 훔쳐 갈 수도 없다.

또 하나의 진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하게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좌파도, 우파도.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p351)

어떤 다양한 형태의 축구와 사랑이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한 가지일 뿐이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축구는 '행복한 것'이고, 사랑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라는 '진실'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물론, 여전히 안정적이고 공식적이며 보편적인 규칙은 준수되어야 마땅하지만, 즐거움이 거세된 축구는 더 이상 축구가 아니며, 그럴 때 지켜야할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자살골은 '너'의 운명
축구에서 종종 벌어지는 자살골 중에는 웃긴 장면이 많지만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전혀 우습지 않고, 축구를 하다보면 자살골도 나오게 마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게 '우리 팀' 이야기라면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매력적이고, 요리에 능하고, 살림을 잘 살며, 시댁에 싹싹하기 그지없으며, 남편에게도 지극정성이며, 무엇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란,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임에 틀림없고, 더하여 상대의 외도는 물론이고 중혼도 허용하자는 그녀는 멋지고 진취적이며 화끈하기까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되는 건 재고의 여지없이 사양이다.

아무리 다른 모든 관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덕훈과 재경의 선택은 '자살골'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상당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독자를 이끌어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축구'도 좋고 '사랑'도 좋고 '진실'은 더욱 좋지만, 솔직히 '자살골'은 최악이니까. 그러니 아무쪼록, '자살골'만은 언제나, 그저 '너'의 운명이기를 삼가 바라고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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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17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 지음, 김운찬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기본적으로 내가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오독'을 의미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특히나 심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는 본문만 따지자면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가장 집중이 잘 된다는 화장실에서 주로 읽었음에도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에, 과연 내가 지금 읽는 게 한글인지를 의심했던 적이 수차례일 정도였다. 하기는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가 스포츠, 특히 축구에 대해 여기저기에 썼던(분명 이탈리아어로) 글들에 대해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영국 사람이 기호학적 해석을 곁들여 분석했고(아마도 영어로), 이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니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게 비정상인지도 모르겠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오독에 대한 나의 변이다).

변명은 이쯤 해두고 기꺼이 오독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일단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 축구가 그리 우호적인 대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축구는 그저 축구 그 자체일 뿐이지만, "축구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이 행하는 것들이 지니는 미묘한 차이와 과잉"에 대해 에코는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다시 말하면, "스포츠는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축구는 스포츠다. 그러므로 축구는 좋은 것이다."로 끝나는 삼단논법과 달리, 에코는 스포츠로서의 축구가 아니라 축구가 매체에 의한 재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각되고 소비되는 양태와 관련되는, 즉 하나의 기호로서의 축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다.

에코의 비판은 특히 훌리건이라고 칭할 만한 열성적인 팬들에게 신랄해지는데,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축구장을 찾는 팬들을 대리만족을 위해 매주 성교하는 커플들을 정기적으로 보러가는 관음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들에게 축구를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들은 좌절된 섹스광처럼 축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에코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팬"과 "안티팬" 사이에 서로 '교감적 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결과로 그들 사이의 대화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스포츠를 직접 몸으로 즐기지 않는 팬들은 스포츠를 말함으로써 자신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혼동하며 무책임을 전제로 하는 '스포츠 잡담'에 손쉽게 참여하는데, '스포츠 잡담'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능을 가지지 못한 채 '공허한 논의'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용한 '스포츠 잡담'이 "정치적 논쟁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용품"이 되는 데 있다. 팬들은 재무부 장관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의회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코치가 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거나 운동선수의 기록을 검토하는 데 집중하면서 '민주적 논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결국 이것은 실제 정치적 부분에 시민이 개입할 가능성을 낭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축구는, "인민의 아편"처럼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구ㅡ다른 프로 스포츠도 포함해서ㅡ에 대해 지니는 에코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축구팬을 자처하는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록 에코가 '팬'과 '훌리건'을 구분하고 축구의 장점도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코는 축구의 밖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 자신의 축구 실력이 형편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에코의 고백이 순전히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축구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닉 혼비의 말을 에코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축구팬의 입장에서 에코와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러나,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과연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에코의 물음은 축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와 애정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기억되어야만 하는 경구다. 왜냐하면, 사실상 에코의 질문에서 방점은 '축구경기'가 아니라 '혁명'에 찍혀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축구팬과 안티팬 사이의 접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가 그저 축구가 아니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축구가 모든 것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 한은 말이다. 그러므로, '예외적 승인'으로서 인정되는 아편(물론, 축구가 아편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의 효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아편의 폐해를 경계해야한다는 당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구경기'의 뒤에 가리어지는 '혁명'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축구팬은 축구에 악의적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와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 (중략) 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    

ㅡ김용택 <팔유팔파 中>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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