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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지음 / 은행나무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2002년 월드컵 '직후'에 나온 몇몇 축구선수들의 자서전이 혹평을 받은 것은, 당시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열광을 마케팅에 '이용'했다는 측면보다는 좀 더 진지하고 제대로 된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는, 책 '내용'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축구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던 월드컵 4강과 관련된 이야기는 오히려 축구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시지 않는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반갑기만 한 시원한 물줄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이 워낙 부실하다 보니 도저히 축구팬들의 기갈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2002년 월드컵 '직전'에 나온 홍명보의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는 2002년 월드컵의 열광으로부터 일정 부분 비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간 시기로 인해 일단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다. 결과적으로 2002년 월드컵의 그 놀라운 성과를 거의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2002년 월드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서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홍명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90년 월드컵을 시작으로 이미 3차례 연속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1994년 월드컵에서는 수비수임에도 두 골을 기록하며 월드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며, 무엇보다도 10년 이상 한결같이 대표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홍명보였기에 2002년 월드컵의 엄청난 성공에 편승하지 않고도 자서전을 낼 수 있었다는 의미다(물론, 그렇더라도 홍명보의 자서전 역시 월드컵 특수에 힘입은 바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축구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한국축구사의 가장 위대한 선수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홍명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2002년 월드컵 전에 출간되었기에 기대할 수 있음직했던 차분함과 진지함이, 한편으로는 종종 심심함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흔히 '홍명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대로 홍명보의 자서전이 진지함으로 가득 차있다고 하는 건 그 자체로 좋고 나쁠 것은 없다. 설령 그의 축구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애조차도 너무 진지하여 심지어 그의 부인 조수미 씨가 결혼 이후에 너무나 과묵한 홍명보 때문에 인형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을 정도였다고(말할 상대를 찾지 못했기에)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렇듯 진지함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홍명보의 자서전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라고 할 만한, 한국축구에 대한 차분한 진단과 제안, 일본 J리그를 경험하며 느낀 한,일 축구의 의미 있는 비교와 그로부터 얻은 교훈 등, 언제 어디서나 '축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의 열정과 진지함은, 유감스럽게도 사뭇 무미건조하게 읽힌다. 좋은 진단이고 좋은 비교이고 좋은 제안이지만, 대체로 간단한 감상으로 끝나고 좀 더 깊이 있는 방향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부록을 제외하면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홍명보가 다른 축구인에 대해 평하거나 혹은 다른 축구인이 홍명보에 대해 평하는 짤막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고, 특히 6장 '아내가 쓰는 나의 사랑, 나의 가족'은 홍명보의 아내인 조수미 씨가 직접 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또한, 다시 약간 수정을 했다고는 하지만 2장 'J리그 통신'은 예전에 모 스포츠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을 옮겨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글들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홍명보'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와 기대를 고려할 때, 이 책이 실제로 홍명보 자신의 육성을 전하는 데에 꽤나 적은 분량을 할애하고, 그로 인해 좀 더 내밀한 홍명보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지 못했다는 것은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홍명보의 자서전은 월드컵 직후에 나온 일부 태극전사들의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책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책 자체의 내용에 그리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 보인다.
축구선수로서의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리고 선수로서 마지막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축구인생을 되돌아보고 싶었다는 홍명보의 자서전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홍명보의 자서전이 일정 부분 유용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축구팬과 홍명보 자신 모두에게 <영원한 리베로>가 결코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보다도 '홍명보'라는 훌륭한 재료를 책에서 충분히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과 2004년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홍명보의 행보는, 그래서 그러한 아쉬움을 그의 또 다른 자서전에 대한 기대로 치환하게 만들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홍명보'라는 이름 석 자의 무게가 여전하고, 그의 축구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원한 건 홍명보일 뿐 이 자서전이 영원할 필요는 없다. 최근 U-20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변함없이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홍명보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길, 좀 더 충실하고 매력적인 자서전이 언젠가 꼭 다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