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소 포장 과자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질소 기체는 상온에서 화학적으로 비활성이며 이를 이용하여 식품의 선도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며 과자봉지의 충전제로 쓰인다."라고 한다. 질소가 언제부터 과자봉지의 충전제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기의 약 78%를 차지하고 있다는 흔하디흔한 질소가 과자봉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건 그저 겉멋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소가 과자봉지 안에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찍이 누군가는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따라왔다."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적어도 롯데제과의 타코스를 먹기 위해 과자봉지를 뜯어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의 빛나는 통찰력에 감탄함과 동시에, 이 표현이 그저 농담이 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솟구칠 게 틀림없다. 혹시나 타코스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타코스는 약 22%의 과자와 약 78%의 질소로 이루어져 있는바, 만의 하나라도 빵빵한 포장에 속아 친구와 나눠먹을 요량이었다면 꽤나 민망한 상황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가령 떡과 오뎅이 대략 4:1의 비율로 되어있는 떡볶이를 친구와 먹는다고 가정하면 떡을 네 개 먹고 나서 오뎅을 하나 먹는 게 매너일 텐데, 타코스를 먹을 때면 질소를 네 번 흡입하고서야 비로소 과자 하나를 먹을 수 있는 셈인 것이다. 나는 차라리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괜찮지만 못 먹는 질소 따위로 양을 채워 실질적으로 가격을 올리는 이따위 짓거리를 보면 꽤 화가 난다.

 

2. 담배와 침

 

흡연자들의 흡연권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건물 내의 모든 곳을 금연구역으로 설정하고 무작정 흡연자들을 밖으로 내모는 행위도 일면 가혹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굳이 걸어 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를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흡연권만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하필 담배를 피우는 이의 바로 뒤에 걸어가게 되어 담배연기를 도리 없이 모조리 흡입하게 될 때면, 그를 앞질러 가면서 뒤로 에프킬라를 뿌리며 걷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과연 그는 자신의 담배연기와 나의 에프킬라가 적어도 내게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거리에서 침을 마구 뱉는 사람도 역시 곱게 보아 넘기기 어렵다. 최악인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다가 침을 뱉는 것인데, 나는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침을 뱉은 이가, 볼일을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러 와서는 자기가 뱉은 바로 그 침을  본인이 밟은 적이 있으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침을 밟은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개새끼냐?"라며 화를 낼 텐데, 내가 그때 그에게 CCTV를 증거로 들이밀며 "니가 바로 그 개새끼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이 무척이나 흥미로워질 거라고 항상 생각하곤 한다.

 

3. 야구천국 불신지옥

 

며칠 전 어느 글에서 "야구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야구관련 방송이 봇불을 이루는 현 상황은 야구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천국이지만, 야구를 싫어하는 이에게는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야구를 딱히 싫어하지 않았지만 점점 불신지옥으로 빠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을 먹은 후에 스포츠 채널을 차례로 돌려보면 당연하다는 듯 모든 구장의 야구경기가 중계중이고, 심지어 경제 채널(SBS CNBS)에서조차 이대호의 경기를 중계해준다. 뿐인가, 야구경기 재방송은 물론이고 야구관련 방송까지 재방송이 넘쳐나고, 게다가 어느 날엔가는 어느 스포츠 채널에서 "48시간 동안 야구만 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진짜로 48시간 연속으로 줄창 야구 관련 방송만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가끔은 나도 한때 해태의 팬으로서 해태왕조에 관한 영상을 즐겁게 보기도 했고, 야구 레전드에 관한 영상도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거의 변태적으로 지나치다. 지금의 스포츠 방송을 보면 방송사가 '야구천국과 불신지옥' 중 하나를 택하라고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천국의 주민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그래놓고는 또 월드컵 시즌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축구관련 방송을 늘어놓고는 '보편적 시청권' 운운하며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려고 안간힘을 쓸 게 뻔한데, 그런 꼬락서니는 더욱 보기 싫다).

 

4. 귀를 닫은 모든 것

 

지난주의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라운드는 한국 축구팬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경기들로 가득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44년만의 우승을 위한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고, 볼튼은 이청용이 10개월 만에 복귀한 상태에서 강등을 벗어나기 위한 힘든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맨유와 선덜랜드는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소속팀 간 맞대결로 관심을 끌었다. 마지막 라운드는 모든 경기가 동시에 치러지기에 어느 한 경기만이 생중계될 수 있었고, SBS ESPN은 맨유와 선덜랜드의 경기를 생중계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좋지 않았다. 박지성과 지동원 모두 결장한 것은 물론, 역전 우승을 노리던 맨유는 맨시티의 승리로 인해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한마디로 시즌 말미의 의미 없는 경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반면에 맨시티의 경기에는 환희가 넘쳐흘렀다. 맨시티는 추가시간에 2골을 터뜨려 거짓말 같은 역전승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더할 수 없이 드라마틱한 경기였다. 볼튼의 경우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청용이 출전하여 시즌 첫 슈팅을 기록하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지만, 끝내 볼튼은 승부를 뒤집지 못하고 2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슬픈 일이지만, 역시 그 경기에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득했다.

물론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어느 경기를 중계하든 모든 축구팬들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아마도 맨유팬들은 극적인 역전우승을 기대하며 맨유경기를 마음 졸이며 지켜봤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방송사에서 시청자 투표라도 했다면 과연 맨유 경기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유감스럽게도 SBS ESPN은 언제부턴가 시청자 게시판을 닫아 놓았고, 당연하다는 듯 자기들 좋은 대로 했다. 영국으로 날아가 맨유와 선덜랜드의 경기를 현지 생중계하는 것은 아마도 꽤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중계에 관련된 일부 사람들은 영국에서 좋은 추억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올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보다가 결국 TV를 꺼버렸고, 그건 의심의 여지없이 화나는 일이었다.

 

5. 모기

 

대학생 때 하숙방에서 하룻밤 사이에 십 수 마리의 모기를 잡은 적이 있다. 적어도 열다섯 마리 이상을 잡았고, 그건 내가 자려고 누웠다가 적어도 열 번 이상을 일어나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작은 방 한 칸에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모기가 숨어 있었는지에 관해서, 지금도 일종의 경이로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모기의 가장 나쁜 점은, 다시 말해 모기가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점은 꼭 사람이 잘 때 피를 빨아서는 사람을 깨운다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짓거리를 쉴 새 없이 해대면 제아무리 '생태계의 조화' 어쩌고저쩌고 해도 모기의 멸종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예전에 위키백과에서 본, "과학자들은 모기를 멸종시키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건 절대로 내 탓만은 아니다.

 

6. 마일리지

 

내 알라딘 마일리지는 현재 4980원이다. 한편 생각하면 4990원까지는 아니라 다행이지만, 대관절 왜 이런 마일리지 같은 것들은 조금 넘치는 경우는 없고 언제나 조금 모자라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혹 마일리지 합계가 5020원이 될 것 같으면 컴퓨터 시스템이 알아서 4980원으로 수정하는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20원은 현금으로 결제하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인터넷 환경이라는 건 때때로 지독하게도 융통성이 없다. 내가 20원의 5배인 100원을 주겠다고 해도 아마 4980원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가끔 지독하게 융통성이 없는 경우를 만난다. 얼마 전에는 쿠폰으로 통닭을 시켜 먹으려고 했더니 몇 장의 쿠폰이 유효기간 만료였다. 언제나 그 집에서 시켜 먹었고 몇 번은 공짜로 먹기도 했는데 쿠폰의 유효기간이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나도 기분이 별로라 그냥 다른 데에서 돈 내고 시켜 먹었다. 미스터 피자와 작별하게 된 데에도 쿠폰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우리 집은 도미노 피자와 미스터 피자를 한 번씩 시켜 먹곤 했는데, 도미노 피자는 쿠폰을 모아 여러 번 공짜로 먹었지만 미스터 피자는 단 한 번도 공짜로 먹지 못했다. 도미노 피자를 좀 더 자주 사 먹은 것도 한 이유겠지만, 결정적으로 미스터 피자의 쿠폰은 그 유효기간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았다.

쿠폰을 주는 건 그것을 미끼로 소비자가 다시 자기네 것을 사먹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그깟 쿠폰 따위로 외려 소비자의 반감을 사게 하는 건 정말로 멍청한 짓이다. 모름지기 마일리지 혹은 쿠폰이란 건, 최대한 소비자가 편하게 그리고 자주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7. 하의실종

 

다음 검색창에서 '하의실종'이라고 치면 약 12600건의 기사와 약 37100건의 이미지가 검색된다. 그리고 블로그에서는 약 45900건이, 웹문서에서는 무려 약 444000건이 검색된다. 그 뿐인가, 뭔놈의 '종결자'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하의실종 종결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의실종'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하의실종'이라고 해서 놀란(?) 마음에 해당기사를 클릭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하의실종'이라고 해서 '실종 신고' 따위를 생각할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이제는 화가 날 뿐이다.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그 많은 거짓말쟁이들의 눈에는 명명백백히 입고 있는 '하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좀 더 많이 어렸다면 그 '하의'란 것이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는 어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착하지 않다. 그저 바라거니와, 실종된 하의들이 다시 주인의 하체로 무사히 돌아가기를...아니, 하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쪼록 하의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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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데 있어 내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키는 대로 읽는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종종 약간의 의무감을 동반하고 읽는 소위 '무거운' 책은 어지간해서는 연속적으로 읽지 않는다. '무거운' 책 한 권쯤이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낼 수도 있지만, 그걸 다 읽고 다시 또 한 권의 '무거운' 책을 연이어 집어 드는 건 절대로 '내키는' 일이 아니까 말이다. 물론, '무거운' 책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무거운 게 아니라 그 내용이 꽤 어렵고 따분하며 무엇보다 재미없다는 걸 의미하고, 이를테면 '철학', '종교', '인문', '역사' 등을 다루는 책들이 바로 내게는 '무거운' 책이다. 몸에 좋은 약은 대체로 쓰게 마련이니 나는 이런 '무거운' 책의 위대함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쓴 약을 하나 삼킨 후 사탕 하나 입에 물 사이 없이 또 다시 꾸역꾸역 쓴 약을 입에 집어 넣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나는 절대로 부정할 생각이 없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후 <역사사용설명서>를 읽고, 그 다음으로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와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를 차례로 읽은 지난 7,8월의 내 독서 여정은, 그래서 위와 같은 평소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약간 흥미 위주의 책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차례대로 '역사', '역사', '역사', '종교' 서적을 읽은 셈인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가장 먼저 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짧게 덧붙이자면, 이 책은 책을 읽을 때 기대함직한 거의 모든 것들을 독자에게 제공해 주는 듯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 만족감, 나열된 사실 속에서 큰 줄기를 헤아리는 통찰력, 권력의 일방적인 역사관에 대한 대항의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시사점 등, '무거운' 책이 과연 몸에 좋은 것임을 이 책은 훌륭히 증명했고, 게다가 이 책은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덮은 다음에 <역사사용설명서>라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을 들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흥미로움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사용설명서>는 제목의 유머러스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는) 농담으로라도 재미있다고 할 만한 책은 아니다. 원제는 '역사의 사용과 악용'이라는 좀 더 근엄한 제목을 갖고 있거니와, 실제로 이 책은 원제 그대로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끌어와 눈앞에 현란하게 들이밀며 역사가 어떻게 사용 혹은 악용되는지를 깊이 파고든다. 당연히 책은 유머와는 거리가 멀고, 혹 저자가 유머를 구사했을지라도 그게 나와 코드가 맞는 게 아닌 건 틀림없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상당히 유익하다. '유익하다'는 말은 대개 '재미없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나 또한 여기서 어느 정도 그런 뜻으로 사용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역사'라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문들을ㅡ그것이 무엇이든ㅡ가져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상당히 유익하며 심지어 의외로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데에 열렬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유익함과 깊이가 생각할 거리를 늘려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외려 그와 관련해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고,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더 길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정말로 '유익'하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이미 말했듯 '역사' 보다는 '흥미'를 좇아 집어 든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책의 구조적인 문제다.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은 33명의 역사 속 인물들을 다루는데, 이는 사진을 제외하면 한 인물 당 기껏해야 10여 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할애됨을 의미하고(이 책은 개정,증보되어 발간된 것으로, 처음 나왔을 때는 무려 50명을 다루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독자가 이 책이 다루는 인물과 깊이 있게 마주하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보다 더 실망스러운 건, 이 책이 소개하는 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도 못하면서 이내 섣부른 평가를 내리고 만다는 점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대해 저자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짧은 글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락슈미바이에 대해서는 "19세기 인도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으며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외부의 평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락슈미바이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과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실망밖에는 얻을 게 없다.

 

물론 애당초 '흥미'를 목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나쁜 역사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읽은 후에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를 읽으니 '나쁜 역사서'의 실제 예시를 접하는 느낌이 강렬한 건 어쩔 수 없다. 마거릿 맥밀런은 "나쁜 역사서는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가졌을 법하지 않은 통찰력을 가졌기를 바라거나 할 수 없었을 법한 결정을 내렸기를 기대할 때 그렇다. (중략) 나쁜 역사서는 충분한 근거도 없는 현상을 대충 일반화하고, 부합하지 않는 거북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라고 말하며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 역사서가 주는 교훈은 너무 단순하거나 그저 틀린 것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마거릿 맥밀런의 주장을 훌륭히 뒷받침한다.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는 이 책이 꽤나 오랫동안 책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밟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이라는 부제 중, '33'이라는 숫자에 끌려서 집어 들었다. 이미 앞에 읽었던 책에서 33명의 인물을 만난 후 다시 33명의 인물과 만나는 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어쨌거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괜찮았다. 기본적으로 33명의 인물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는 건 태생적으로 독자의 기억력과 책에서 다루는 인물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부담을 주는 일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33명의 스님들이 각각 하시는 말씀은 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기 일쑤였지만 이에 대해서는ㅡ스님들도 종종 말씀하시듯ㅡ"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잠언으로 넘어갈 수 있고, 또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스님들을 찾아뵌 후 그 생생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짧은 글 속에도 스님들의 큰 자취가 물씬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 과장하면 이 책을 처음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스님이 옆에서 죽비소리로 정신을 깨우쳐주는 듯한 상쾌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제 다만 사실을 말하면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심드렁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내 생각에 이런 책은 매일 조금씩, 특히 아침에 읽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안중근 선생의 말씀을 실감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불행히도 현대인의 아침은 지나치게 바빠서 입안의 가시보다는 위장의 공복을 신경 쓰기에도 벅찬 게 문제다. 뭐, 물론 대체로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런데 책 속에서 다른 스님들이 모두 어느 종교를 믿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한 스님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불교를 권장했을 때 외침을 잘 막아냈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이채로웠다(이 부분을 정확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건 분명하다). 나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년 전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교를 믿는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가 없다."라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공통점이 '아집'과 '독선'과 '편견'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디까지나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에 따른 섣부른 비약일 뿐이지만, 나는 위의 두 분을 작은 방안에 모셔두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끝장토론을 하게 하여 어떤 합의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한다면 그 방문이 결코 쉬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데 기꺼이 500원쯤은 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TV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면 충실한 시청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역시나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 채널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물론, 이때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더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얕은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주는냐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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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 6월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셈해보니 가뿐하게 100권이 넘는다. 100권은 실로 대단한 수치가 아닐 수 없어서 일일이 셈하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 같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공은 거의 대부분 만화책 <메이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완결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마냥 의심스러웠는데, 드디어 <메이저>가 78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내가 대략 50여 권을 읽다가 말았고, 그 이후에도 30여 권쯤 더 나왔으니 내 기억력으로 대관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한 바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는 이 희대의 대작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이야기는 실로 방대했고 꽤나 역동적이었으며 때로 감동적이었는데, 한편 진부했다. 왠지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작품 스스로를 '진부함'으로 구겨넣는 듯했다.

일명 '천재 열혈 야구소년'인 고로가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작 초등학생 꼬마에 불과할지 몰라도 고로가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리틀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러한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투수로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된 고로는 이제 왼손 투수로서 고교야구에서의 2막을 열어젖힌다. 야구부조차 없는 학교에서 새로 야구부를 만들어 다시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고교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혈 리틀 야구>의 재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재탕이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영웅의 성장기라고 할 만한 앞의 두 이야기는 사뭇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편이다. 게다가 순간순간 발휘되는 개그 센스나 꽤 섬세한 그림체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무려 17년 간 78권을 연재한 작가의 집념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집념이 지나쳐서 작품에도 '집념'이 범람한다는 게 문제다.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차례로 마이너리거, 일본 국가대표, 메이저리거를 거치는 고로의 행보 내내 치열한 승부와 시련이 반복되다 보니 외려 읽는 내가 물릴 지경이다. 특히 언제나 혼돈 상황으로 몰아가는 경기 장면은 투지와 의외성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비슷한 승부가 반복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고로와 그런 고로에게서 힘을 얻는 동료들, 마지막 순간 반드시 나오는 상대의 실책과 우리 편의 행운의 안타, 누구도 예상 못한ㅡ하지만 <메이저>를 계속 읽다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ㅡ의외의 홈런포 등, 이쯤 되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없는 게 꼭 내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무리수'라고 할 만한 설정도 적지 않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무리수는 극한의 상황을 부러 강조하는 와중에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모든 파고를 넘은 듯하던 마지막에 또 다시 극한의 상황을 조성하는 작가의 '집념'에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다. 만약 78권이 완결인 걸 진즉 몰랐다면 아마도 78권이 완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다만 자연스럽기는커녕 지나치게 극적인 상황으로, 사뭇 작위적으로 끌어나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의외로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말의 감동을 안겨주는 저자의 능력은 차라리 감탄스럽긴 하다. 하지만 마침내 대작을 완성시킨 저자의 또 다른 '야구만화'를 기대한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라도 차마 못하는 건, 솔직히 나는 이 작가가 설령 다른 야구만화를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게 결국 <메이저-다시보기>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열혈 야구소년 대 분투기>는 그쯤하면 되었으니까.

<메이저> 다음으로 공을 세운 것은 장영훈의 무협소설인 <절대군림>이다. 언제가부터 무협소설의 권수가 늘어나는 게 흔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14권은 상당한 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절대군림>을 집어 들었던 초반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의 넉넉한 분량을 꽤나 흐뭇하게 여겼었다. 한 마디로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 '먼치킨'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임에도, 초반의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장을 서너 장씩 휙휙 넘길 만큼 재미가 확연히 떨어졌다. '상식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의 등장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의 범상치 않은 행보 덕에 그럭저럭 납득했지만,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나고 그에 맞추어 주인공의 능력도 계속 급속도로 높이다 보니 <절대군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사라져 버렸고 결국 그냥 그렇고 그런, 먹지도 못하는 '먼치킨'만 남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장영훈의 또 다른 작품인 <보표무적>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보표무적>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강한 주인공을 내세운 독특한 전개가 초반에 상당한 재미를 주었지만 뒤로 갈수록 심각하게 강한 적과 역시나 터무니없이 강한 주인공이 부딪치면서 재미가 급격히 떨어졌었다. 물론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장영훈의 무협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익살스럽고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부분들이 엄청나게 강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유독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특히 <절대군림>의 경우에는 중반쯤부터 갑자기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비틀어 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던 까닭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마지막으로 100권을 독파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심야식당>이었다. 얼핏 보면 어설퍼 보이는 듯한 그림체와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은 내 높은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야 어쨌든 이 책에는 요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엔나소시지'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 '비엔나소시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의 주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가 언제부턴가 슬며시 우리집 식탁 위에서 사라진 메뉴였는바, 나는 <심야식당>을 보고서 필연적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떠올렸고 이내 엄마에게 '비엔나소시지'를 주문했다(<심야식당>의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달라고 했다가 엄마에게 혼났다는 얘기 따위는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하자). 그리하여 오랜만에 먹은 '비엔나소시지'의 맛은 기대만큼 훌륭했으니, 나는 실로 지난 몇 년간 이보다 더 충실한 '독후활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계속해서 <심야식당>의 다음권을 보려는 유일한 이유는 '비엔나소시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확실히 '비엔나소시지'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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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꼽았지만 내 경우에는 완전히 그와 반대다. 나라면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고향을 떠나는 것"을 들 테고, 물론 이때 말하는 '고향'이란 빌 브라이슨이 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뜻한다. 어쩌다보니 나는 '대한민국'이라고 자칭하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그게 싫든 좋든, 나로서는 도저히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덧붙이자면, 내가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나머지 두 가지는, 책장에 안 읽은 책이 없게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을 단 세 가지로만 꼽는 것이다ㅡ슬프게도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살아가는(혹은 살았었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게 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외려 '고향'을 떠나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는 만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어쩐지 조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고,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책이 모두 고향을 떠난(혹은 떠났었던) 이들의 이야기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꽤나 괜찮았다.

먼저 집어든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프라하에서 소녀시대를 보낸 요네하라 마리와 함께 우정을 나누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러한 과거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수십 년 후 요네하라 마리가 그때 그 소녀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리차, 아냐, 야스나와 관련된 일화를 풀어내는 요네하라 마리의 기억력과 묘사력은 탁월하며, 소녀들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의 재회를 위해 홀연 동유럽으로 날아가는 요네하라 마리의 의지는 탄복할 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이른바 '소녀시대'로 대변되는 '과거'를 대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결국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의 삶으로 이어졌다거나 혹은 남들은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이국에서의 특별한 우정이 있었기에 수십 년 만에 동유럽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하는 단선적 결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배웠던 가치, 이국에서 나누었던 우정, 역사적인 교훈, 태어난 뿌리에 대한 자각 등, 행간 곳곳에는 '과거'로부터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요네하라 마리의 사고가 여실히 드러나고, 하기에 요네하라 마리가 보여주는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그의 '소녀시대'를 빛나게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듯하다. 요컨대, '과거'란 단지 지나가 버린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지금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채색될 수 있는 무엇이며, 이 책은 그점을 증명하는 빛나는 예시인 셈이다.

한편, 그에 비해 영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의 프로방스로 옮겨와 산 열두 달의 경험을 풀어낸 <나의 프로방스>에는 무엇보다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두드러진다.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문서, 휴가철이면 우르르 몰려드는 관광객들, 무지막지한 추위, 도무지 끝나지 않는 공사 등, 영국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이상해 보이고 심지어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프로방스에는 가득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긍정적이고 유쾌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리고 동시에 멋진 날씨, 맛있는 식사, 여유로운 나날 등, 프로방스에서 주어지는 축복을 마음껏 즐긴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 혹은 어느 곳에서 왔든지 상관없이, 다만 지금 살아가는 프로방스의 방식을 존중하고 기꺼이 여기며 프로방스에 동화되는 저자의 모습은 싱싱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또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의 요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느새 우리는 며칠이나 몇 주가 아니라 계절 단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프로방스가 우리 때문에 본연의 속도를 바꾸지는 않을 테니까.(p352)

그런데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새로운 '고향'에서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매우 훌륭하긴 해도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내가 유독 베베 꼬인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고향에서 맞닥뜨리는 '본연의 속도'란 건 이쪽에서 봤을 때 종종 납득하기 어렵고, 하여 그럴 때 초래되는 엇박자의 이유를 그 '제멋대로의 속도' 탓으로 돌려버리는 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 아닌가. 쉽게 말해서 새로운 고향에 대해 한바탕 불평을 쏟아내는 일은 꽤나 자연스럽고 특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얘기고,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을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빌 브라이슨이다. "당신은 그 칼럼에서 늘 불평만 늘어놓잖아요."라는 아내의 말에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대꾸한다. "불평하는 게 내 일인걸."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선전 이후 빌 브라이슨의 책들을 이른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시리즈'로 통일해버리는 출판사의 작명센스는 그리 호감이 가는 건 아니고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이라는 제목은 납득하기도 어렵지만(그런데 이런 제목이 꽤나 부러웠던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을 출간했던 또 다른 출판사는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을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으로 바꿨다), 나는 내가 이런 제목 따위는 무시하고 이 책을 읽게 된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은 일단 '미국학'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하게 되고, 혹 진심으로 '미국학' 따위를 읽을 마음이 있더라도 '발칙한'에서 턱 걸리게 될 것 같지만, 빌 브라이슨은 적어도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라는 이름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일전에 어느 책에서 빌 브라이슨이 농담처럼 언급한 바 있던, "살아가면서 결코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철회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흔히 '귀향'이라는 이미지가 품기 쉬운 애틋함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함이라는 감정 대신 불평과 불평 그리고 불평으로 채워 넣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우편 서비스, 컴퓨터 모델 넘버, 영화, 크리스마스 장식, 철자법 검사 프로그램, 관료주의, 가게 계산대, 커피 판매대 등, 그가 불평을 쏟아낼 대상은 '고향' 어디에나 넘쳐나고, 물론 실은 꼭 '고향'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은 그저 어쨌거나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확실히 그는 자신의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빌 브라이슨의 대꾸에 "불평하는 게 당신이 하는 전부죠."라고 맞받아친 아내의 말처럼 이 책이 오직 불평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로서도 오직 불평만을 쏟아내며, 이런 불평쟁이의 책을 읽는 일 따위는 진즉 관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거지 같은 불평 뒤에 자리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탁월한 유머 감각 그리고 의외의 따뜻함이 진정 그의 불평을 돋보이게 만든다. 익숙하기보다는 종종 낯설고, 그립고 애틋하기보다는 때때로 당혹스러운, 하여 도처에 불평해야 할 것이 넘쳐나는 그의 '조국' 미국이 그래도 괜찮은 나라 같고 또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만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불평 뒤에 자리한 빌 브라이슨의 그와 같은 진면목이 충분히 독자의 마음으로 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빌 브라이슨이 '불평'을 '일'로 삼는 괴짜인 건 분명하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 불평을 한껏 쏟아내는 게 그리 훌륭한 태도라고 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의 연설마저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더군다나 의외로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을 담을 줄 아는 빌 브라이슨의 불평 가득한 글이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분명할 것이며, 모르긴 몰라도 이런 불평쟁이라면 그의 고향도 그의 불평을 즐거이 반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아무쪼록 "만약 당신이 빌 브라이슨만큼 언어 구사에 능하고, 위트 있고, 역사와 통계에 관심이 많고, 웃음이 터져 나올 시점을 정확히 아는 작가를 알고 계시다면 내게도 알려주시기 바란다."라는, 책 뒤표지에 언급된 <시카고 트리뷴>의 짤막한 리뷰 내용처럼, 그런 작가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도 꼭 알려주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1. 가끔은 여러분이 살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이런 고마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어찌나 적은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엄청난 행운에 의해 이 우주의 모든 물질들 중 아주 적은 일부가 모여서 여러분이 생겨났고, 여러분이 존재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간은 영겁의 세월 중 극히 짧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러분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 놀라운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든 여러분을 태어나게 한 이 놀라운 성취에 조금이나마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잘 태어나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특별합니다.
2. 그러나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지구상에는 50억 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여러분만큼이나 중요하고 여러분만큼이나 신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배려를 고마워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피자를 배달하고, 여러분이 구입한 식료품을 봉투에 담아주고, 여러분이 어지럽힌 모텔 방을 청소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습관을 들이십시오. (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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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독자에게 간접경험을 선사한다."라는 명제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자면, 2011년 초를 나는 꽤나 근사하게 보낸 셈이 된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잉글랜드로 날아가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20개 팀이 있는 지역을 차례로 둘러보았고(<곡괭이 싸커홀릭>), 다음으로 일본으로 날아가서는 일본의 아름다운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누비고 다녔으며(<일본의 걷고 싶은 길>), 그걸로도 모자라 종래에는 제주도에서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제주올레를 맛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확실히 이 정도라면 누구한테도 꿀리지 않을 만한 환상적인 새해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슬픈 사실을 말하자면, 직접경험이 언제나 좋지는 않은 것처럼 간접경험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며 이건 그 이름만으로도 근사해 보이는, 이를테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축구여행'이랄지 혹은 '일본걷기여행'이랄지 또는 '제주올레' 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좋은 간접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경험을 솜씨 있게 전해주는 저자를 만나야 하고, 아울러 독자의 경험치나 성향도 간과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기에, 독자로서 '간접경험'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교차를 가장 크게 느끼기 쉬운 분야가 '여행서'가 아닐까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새해 들어 처음으로 집어든 <곡괭이 싸거홀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기본적으로 2009~2010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 참가중인 20개팀을 모조리 방문할 꿈을 가지고서 마침내 이를 실현한 한 축구팬의 여행기인 <곡괭이 싸커홀릭>에는 기대가 컸었다. 흔히 보던 축구 '전문' 기자의 식상한 형식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축구팬이 영국으로 날아가 좌충우돌하며 건져낼 자유롭고 생생한 프리미어리그 이야기를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나 싶었다. 시작은 괜찮았다. 첫 번째 방문지는 런던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풀럼. 비록 풀럼의 경기를 보았다거나 풀럼의 경기장 내부를 둘러본 것은 아니지만 풀럼 구장 주변의 사진들은 흥미로웠고, 특히 풀럼 공식 상점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을 찍은 사진은 디자이너인 저자의 관심과 색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서 즐거웠다. 두 번째로 풀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첼시를 방문할 때도 괜찮았다. 첼시의 홈구장과 그 주변의 모습에 대한 짤막한 단상과 사진들. 그리고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닮아 푸르기 그지없는 다채로운 첼시의 상품들과 그것을 느낌 있게 담아낸 사진들. 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레퍼토리가 계속, 그러니까 정확히 20번이 반복되면 별로 괜찮지가 않다.

<곡괭이 싸커홀릭>은 이미 말했듯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을 모조리 둘러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 단 20일 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의 절대적인 시간이 여행기의 질을 절대적으로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일은 20개 팀을 모두 둘러본다고 말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이 책에서 계속해서 주연 역할을 하는 건 '축구'나 '여행'이 아닌, 각 구단들의 다양한 엠블럼과 유니폼 색상만큼이나 다채롭고 화려한, 각 구단의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품'이 빠지지 않고 나오고, 그런 와중에 처음에는 흥미롭고 색다르게 느껴지던 장점들이 동일한 패턴 속에서 단점으로 탈바꿈하는 듯하다.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팀을 둘러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꿈이었으니 만큼 그것을 현실화시킨 것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지만, '20'이라는 숫자에 방점을 찍어 '모든 팀'을 비슷한 비중으로 소개하다 보니 여행의 특별함과 생생함은 상당 부분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한정된 시간 안에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여행에는, 필연적으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헤어지는, '사람'과의 접점이 드물 수밖에 없다는 게 가장 아쉽다.

이미 여러 권의 여행기를 펴낸 김남희의 <일본의 걷고 싶은 길>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꽤나 실망할 뻔했다. 마치 국어 교과서에 예문으로 실리겠다는 듯,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를 기행문에 어울리는 간결한 현재진행형 시제로 써내려간 문장들은, 역시나 국어 교과서를 읽을 때면 대개 그러했듯 조금 따분했다. 약간 과장하면 저자가 일본여행에 대해 보고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는데, 나는 여행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보고도 물론 아니었다. 외려 나는 2권에서 다룰 '규슈와 시코쿠'에 대해서는 단호히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책을 읽으며 이 보고에 익숙해질수록, 그리고 특히 '사람'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수록 책을 읽는 일이 좀 더 흥미로워졌다. 저자는 일본에 사는 지인들을 여행 속에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그러한 만남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따뜻함과 우의 그리고 한일 관계에 얽힌 그들의 생각 등을 접하게 되는 일은 꽤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 저자가 너무 빈번히 지인들과의 만남을 가지는 덕분에 이 여행기는 종종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서 '일본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둔갑하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가 저자의 인맥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알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또 일본에 지인이 없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일본을 여행하란 말인가, 하는 심술궂은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제나 다정한 오사카의 일본인 부모님, 평생토록 가까이 모시고 싶은 스승 신이치 선생님 가족, 나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요코 언니 부부, 내 오랜 친구 마미코와 켄, 새벽의 계단 콘서트를 열어준 가케이 군, 열흘이나 나를 먹이고 재워준 테리와 마유미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여행은 무척 쓸쓸했으리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나로서도 이들의 등장이 반갑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고, 더욱이 딱히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도 아니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이 여행기는 무척 무미건조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물론 덧붙이자면, 이건 이 책에 대한 찬사의 의미만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이번에 읽은 세 권의 여행기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제주올레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명숙의 두 번째 책,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었다(이 책을 단순히 여행서로 분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명숙의 첫 번째 책 <제주걷기여행>에 비하면 이번 책은 좀 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읽는 내내 자그마한 감동들이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되풀이하여 밀려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초심을 지켜 '제주올레'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곁을 찾아들어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각자의 재능을 발휘해 '길'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 그리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독자의 마음을 살며시 흔들었고,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가끔씩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울컥해 하기도 하면서 내가 생각만큼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공연히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물론 만약 여전히 내가 내 생각만큼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면 그건 그냥 책이 메마른 이의 감정마저 적실 정도로 좋았다는 뜻이니, 나로서는 어느 쪽이 맞든 별로 불만은 없겠다. 어쨌거나 책을 읽는 동안 행복함과 그리움에 감싸여 머지않아 직접 다시 제주도를 찾을 꿈을 꾼다는 게 적잖이 위안이 되었고, 생각해 보면 결국 아마도 이런 이유로 잦은 실패를 맛보면서도 끝내 여행 관련 서적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끝으로 여행기와는 무관한 한상운의 무협소설 <무림사계>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이 작가, 정말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무림사계>가 대단한 핵심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무협소설이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를 끝내 감탄하게 한다면 이거야말로 정말 대단한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내가 싫어하는 설정이란 무협소설에 강시나 기괴한 술사들이 지나치게 활보하면서 강호를 도산검림이 '무색한' 세계로 만드는 것인데, <무림사계>의 경우에는 배경을 서양인들이 중국에 출몰하던 19세기 무렵(아마도?)으로 설정하면서 무림인과 '총'과의 조우를 초래한다. 물론 총에 맞으면 무림인이라도 당연히 죽고, 이건 강시만큼이나 도산검림의 강호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요소다. 게다가 <무림사계>의 결말 방식도 내가 별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무림사계>는 자칫 한순간에 무너지기 쉬운 세계를 정말로 매끄럽게 끌고 나간다.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스토리는 기발하며 구성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장감 속에서도 깨알 같이 터지는 유머까지. 그간 보아오던 무협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하기에 단순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정말 최고의 무협소설이라고 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1권에서 잠깐 등장할 때만 해도 그리 예쁘지는 않은 여자로 묘사된 앵앵이, 이후 6권에서 주인공과 재회했을 때에는 상당한 미색의 여인이라고 나와서 약간 의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인 건 무협소설 속이라고 해서 딱히 예외는 아닐 테니까. 물론, 설령 그게 아니라 작가가 잠깐 딴 데 정신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다. 지금 심정만 같아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라면 앵앵이 나중에 남자로 둔갑하다고 해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남자의 '변심' 또한 무죄라는 단서 하에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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