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 6월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셈해보니 가뿐하게 100권이 넘는다. 100권은 실로 대단한 수치가 아닐 수 없어서 일일이 셈하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 같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공은 거의 대부분 만화책 <메이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완결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마냥 의심스러웠는데, 드디어 <메이저>가 78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내가 대략 50여 권을 읽다가 말았고, 그 이후에도 30여 권쯤 더 나왔으니 내 기억력으로 대관절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한 바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는 이 희대의 대작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이야기는 실로 방대했고 꽤나 역동적이었으며 때로 감동적이었는데, 한편 진부했다. 왠지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작품 스스로를 '진부함'으로 구겨넣는 듯했다.

일명 '천재 열혈 야구소년'인 고로가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작 초등학생 꼬마에 불과할지 몰라도 고로가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리틀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러한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투수로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된 고로는 이제 왼손 투수로서 고교야구에서의 2막을 열어젖힌다. 야구부조차 없는 학교에서 새로 야구부를 만들어 다시 동료를 얻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동료들이 거듭된 훈련과 실전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리하여 최강의 상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속에는 우정과 경쟁과 열정이 넘쳐난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엄연하기에 투지와 의외성이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고, 하여 매 승부는 치열하기 짝이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열혈 고교 야구>라는 제목의 만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혈 리틀 야구>의 재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재탕이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영웅의 성장기라고 할 만한 앞의 두 이야기는 사뭇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편이다. 게다가 순간순간 발휘되는 개그 센스나 꽤 섬세한 그림체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무려 17년 간 78권을 연재한 작가의 집념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집념이 지나쳐서 작품에도 '집념'이 범람한다는 게 문제다.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차례로 마이너리거, 일본 국가대표, 메이저리거를 거치는 고로의 행보 내내 치열한 승부와 시련이 반복되다 보니 외려 읽는 내가 물릴 지경이다. 특히 언제나 혼돈 상황으로 몰아가는 경기 장면은 투지와 의외성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비슷한 승부가 반복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고로와 그런 고로에게서 힘을 얻는 동료들, 마지막 순간 반드시 나오는 상대의 실책과 우리 편의 행운의 안타, 누구도 예상 못한ㅡ하지만 <메이저>를 계속 읽다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ㅡ의외의 홈런포 등, 이쯤 되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없는 게 꼭 내 기억력 탓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무리수'라고 할 만한 설정도 적지 않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무리수는 극한의 상황을 부러 강조하는 와중에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모든 파고를 넘은 듯하던 마지막에 또 다시 극한의 상황을 조성하는 작가의 '집념'에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다. 만약 78권이 완결인 걸 진즉 몰랐다면 아마도 78권이 완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다만 자연스럽기는커녕 지나치게 극적인 상황으로, 사뭇 작위적으로 끌어나가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의외로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말의 감동을 안겨주는 저자의 능력은 차라리 감탄스럽긴 하다. 하지만 마침내 대작을 완성시킨 저자의 또 다른 '야구만화'를 기대한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라도 차마 못하는 건, 솔직히 나는 이 작가가 설령 다른 야구만화를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게 결국 <메이저-다시보기>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제 <열혈 야구소년 대 분투기>는 그쯤하면 되었으니까.

<메이저> 다음으로 공을 세운 것은 장영훈의 무협소설인 <절대군림>이다. 언제가부터 무협소설의 권수가 늘어나는 게 흔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14권은 상당한 분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절대군림>을 집어 들었던 초반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의 넉넉한 분량을 꽤나 흐뭇하게 여겼었다. 한 마디로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 '먼치킨'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임에도, 초반의 재미가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장을 서너 장씩 휙휙 넘길 만큼 재미가 확연히 떨어졌다. '상식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의 등장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의 범상치 않은 행보 덕에 그럭저럭 납득했지만, 더욱 강한 적이 나타나고 그에 맞추어 주인공의 능력도 계속 급속도로 높이다 보니 <절대군림>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사라져 버렸고 결국 그냥 그렇고 그런, 먹지도 못하는 '먼치킨'만 남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장영훈의 또 다른 작품인 <보표무적>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보표무적>의 경우에도 엄청나게 강한 주인공을 내세운 독특한 전개가 초반에 상당한 재미를 주었지만 뒤로 갈수록 심각하게 강한 적과 역시나 터무니없이 강한 주인공이 부딪치면서 재미가 급격히 떨어졌었다. 물론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장영훈의 무협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익살스럽고 소소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부분들이 엄청나게 강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유독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특히 <절대군림>의 경우에는 중반쯤부터 갑자기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비틀어 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던 까닭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마지막으로 100권을 독파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심야식당>이었다. 얼핏 보면 어설퍼 보이는 듯한 그림체와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은 내 높은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야 어쨌든 이 책에는 요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비엔나소시지'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 '비엔나소시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의 주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가 언제부턴가 슬며시 우리집 식탁 위에서 사라진 메뉴였는바, 나는 <심야식당>을 보고서 필연적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떠올렸고 이내 엄마에게 '비엔나소시지'를 주문했다(<심야식당>의 '비엔나소시지'처럼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달라고 했다가 엄마에게 혼났다는 얘기 따위는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하자). 그리하여 오랜만에 먹은 '비엔나소시지'의 맛은 기대만큼 훌륭했으니, 나는 실로 지난 몇 년간 이보다 더 충실한 '독후활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계속해서 <심야식당>의 다음권을 보려는 유일한 이유는 '비엔나소시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확실히 '비엔나소시지'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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