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서평단 알림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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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단 도서입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소위 높으신 분들이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는 소식이 종종 나오는데, 그때 그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그런 일이 없다, 기억이 안 난다, 오해가 있었다" 등등, 그들은 주로 이딴 말들을 해대는데, 나는 그걸 볼때마다 도대체 저런 대가리, 그러니까 후안무치에 건망증에 대화불능의 대가리를 달고서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것은, 그렇게 모르쇠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래서 더 얄밉고 혐의가 짙어보이는 그들이 잠깐 세간의 관심을 끌다가는 곧, 무혐의나 집행유예로 풀려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들의 '모르쇠'에는 무슨 신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디케의 눈>에 대한 신문광고를 보고 처음 떠올렸던 것은, 바로 그 '모르쇠'의 비밀을 혹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였었다.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하여 법조계의 논란을 야기하였고, 결국 연재를 그만두고 검사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저자가 못 다한 이야기를 한다면 무언가 큰 비밀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지나친 기대만은 아닐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후안무치에 건망증에 대화불능의 대가리가 탐났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대가리를 보면서 매번 분개해하느니 차라리 이쪽에서도 그런 대가리를 한 번쯤 달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런 대가리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 모양이니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서, '수사 제대로 받는 법'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란다 경고'에 얽힌 이야기와 '경찰차 뒷좌석'에서 들은 범인 진술의 증거효력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모르쇠'의 비밀이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사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ㅡ굳이 구분하자면ㅡ'수사 제대로 하는 법'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목이기도 한 '디케의 눈'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통해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저자는 디케가 눈을 가린 이유가 단순히 공정한 법집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진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진실을 찾기란 매우 어렵고, 그래서 법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法)에 대한 인식이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가 말하는 '쉽게 깨지는 유리병' 같은 법은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뿐이어야 할 진실이 또 다른 진실과 맞붙고, 확실한 증거가 명백한 위증으로 드러나고, 재판이 오판이 되고, 창조론과 진화론이 뒤엉키는 등의 다양한 사건과 판례를 접하다 보면, 과연 유일한 '진실'과 절대적인 '법'이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지 조금씩 회의감이 들면서 저자가 말하는, 법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십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서로 대립되는 논쟁점들을 가진 각 사례에 관한 저자의 친절하고 재미있는 설명을 읽다보면, "법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처럼 구애와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법이 어렵고 생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쉽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도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이 책이 내 기대와 달랐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미국 판례를 소개하는 데 치우쳐져있다는 점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막상 현실로 눈을 돌리면 법에 대한 인식은 또 일변해버리고 만다. 멀리 갈 것 없이 최근만 보더라도, 어느 강연에서 모 회사가 제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 동영상이 버젓이 존재함에도 그 회사가 관련된 비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고, 백주대로에서 폭행을 행사하고도 '야당'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며, 수천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하고도 경제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풀려나는 사람도 있는 게 부조리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공평해 보이는 법의 이면에는 또 다른 논리가 있다고 법의 유연함과 정당성을 옹호하지만, 그 논리는 현실 속에서 언제나 약자의 희생으로 귀결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욱이, 이 책은 사람들이 법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이 책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법'과는 여전히, 상당한 괴리가 있지 않나 싶다.

들려오는 소식이 하도 어이없는 것들뿐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도 자연히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하여 이 책의 평가가 조금은 부당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자가 일종의 '고급 정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일반에 널리 알리다가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던 전력(前歷)을 고려할 때, 이 책이 '흥미로움'을 넘어 부조리한 현실에 다다르지 못한 것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디케가 눈을 감고 '삼가고, 또 삼가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나 약자에 대한 외면으로 귀결될 때, 그 눈을 가린 천을 기꺼이 벗겨서 약자의 실상을 똑바로 보게 하는 것이 또한 법조인의 의무가 아닐까.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디케의 '감은 눈'보다는 오히려 시민의 '뜬 눈'이 더 신뢰할 만하고, 그래서 디케가 부디 '감은 눈'을 뜨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너무 법을 불신하는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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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밥상
제인 구달 외 지음, 김은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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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는, 이른바 '미친 소' 때문에 들썩이고 있다. '미친 소'를 사람이 먹고 죽을 확률은 로또에 걸린 사람이 돈을 찾으려다 번개를 맞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친 소'를 걸러낼 만한 확실한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미친 소'의 전면적 수입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어느 쪽이든 '인간'의 관점에서만 비롯된 것일 뿐, 정작 미쳐버린 '소'에게는 관심이 없다. '소'가 '미쳤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소'는 대체 왜 '미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당사자인 '미친 소'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친 소'는 말이 없다. 아니, '소'는 본래부터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아니, '소'는 사실 온몸으로 말을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의 말을 들어줄 사랑과 연민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 아닐까.

<희망의 밥상>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의 실상은 정말로 끔찍하다.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소들에게 푸른 풀밭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소들은 제 한 몸 편히 누일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채 온갖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뒤섞인 사료를 먹고 비대해질 것만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직 '무게'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소들은 몸만 거대할 뿐 제대로 서는 것조차 하지 못해서, 도축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다른 소들과 엉켜서 쉽게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예사라고 한다. 심지어 사료에는 동물의(소를 포함한) 몸 일부도 갈아져서 들어가 있기에, 초식성 동물인 소들은 본의 아니게 육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가 미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인간이 '소'만 유달리 좋아하거나 혹은 미워할 특별한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소고기만큼이나 인간은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등을 두루 좋아하고, 소의 처우에 잔인하고 무정한 것만큼이나 돼지나 닭, 그리고 새우나 연어와 같은 어류의 처우에도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쏟을 리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장식 농장에서는 임신한 돼지에게 조차도 몸을 누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허용되지 않고, 닭들은 종종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펄펄 끓는 물에 담가지기도 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였을 돼지와 닭들이 각각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고 서로의 볏을 쪼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도록 맘껏 뛰어다닐 자유가 허용되는 대신 돼지들은 꼬리가 잘리고 닭들은 부리를 잘린다고 한다.

불행하게도(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동물들의 수난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그저 '먹거리'로서만 가치를 지니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 지상명제로부터 '인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범벅된 사료를 먹고 우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들은 죽음조차 편안하게 맞지 못하여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기계적으로 '처리되고', 바로 그 '처리된' 고기가 '인간'의 먹거리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농약에 노출되는 것은 기본이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그저 크고 빠르게(혹은 수송상의 이유로 느리게) 자라도록 '처리되고', 이것이 또한 '인간'의 밥상에 올려지는 것이다. 그것의 치명적 위험성은 가리어진 채.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로 이 책은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이윤 추구'에 가장 큰 책임을 묻는다.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마저도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들의 행태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의 '재력'에 회유된 정치가들의 동의 혹은 묵인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무분별한 이윤추구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향후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올 것이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몇 가지 예로, 상품가치로서 인정받은 특정 종(種)의 작물들만이 재배되면서 종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거나,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이 오염되고 낭비되면서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침팬지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 책의 저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희망의 근거로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 맞서서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비윤리적인 생활환경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등이 있음을 소개하고, 그들이 이룬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선택의 영향력을 옹호한다. 즉, 자신의 지역에서 난 유기농 식품을 먹고, 보다 존중 받으며 길러진 동물들을 먹고(물론 저자는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혹은 육식을 가급적 적게 섭취할 것을 권한다),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진 먹거리를 먹고자 하는 등의, 사람들의 윤리적 선택이 모여져서 종래에는 다국적 기업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구의 희망은 개인의 '희망의 밥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뇌라는 기관(우리의 두개골 속에 든 끈적끈적한 세포로 이루어진 해면 조직)은 가장 놀라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신과 마음이 유리되어 버리면 그 기술은 악마적인 목적에 악용될 수가 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사랑과 연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이 똑똑할 수는 있으나 지혜로울 수는 없다. (p423)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극도의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재배되거나 길러진 식물과 동물을 사람이 먹게 되면 그들이 죽으면서 해소되지 못한 '화'의 독소가 그대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라는. 물론, 이것은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희망의 밥상'에 요구되는 것도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인류의 발전된 영농기술(농약과 비료, 유전자 변형 등)은 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는 게 현실이고, 그것은 과학적 수치로 계산되는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수치 따위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일 뿐이고, 마찬가지로 '희망의 밥상'에 필요한 것도 생명 자체와 지구의 환경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최근에 벌어지는 '미친 소'에 대한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한 번쯤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친 소'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오직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만 국한된다면 '미친 소' 사태는 언제라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미친 소' 문제가 우리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 것은 뇌 용량이 2MB에 불과한 사람이(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있어서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동물의 공포'가 실상 '인간의 횡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의 뇌 용량이 2GB를 넘어 2TB에 이르더라도 인간이 경제적, 과학적 수치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양적인 차이에만 불과하고, 따라서 거기에 사랑과 연민이 자리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들을 위해서도, 최소한 마음속에나마 조그마한 촛불 하나쯤은 켜두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연민이 없는, 그저 똑똑하기만 한 뇌의 악마적 사용이 초래한 광우병이 결국 뇌에 대한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미친 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소'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더욱 절실한 일이 아닐까.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ㅡ제러미 벤담 (p123)

ps. 그러고 보니 뇌 용량이 2MB인 사람은(그러니까, 행여나 그런 사람이 있을까마는) 사랑과 연민이 있어서 지혜로울 것은 고사하고 어차피 똑똑하지도 못한데, 이건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설상가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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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from [로처의 사랑방] 2008-05-28 20:32 
    희망의 밥상-제인구달 불과 얼마 전부터 ‘웰빙’ 이나 ‘참살이’라는 말이 유행 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진 듯 하구요. 환경이나 먹거리에 유기농 바람도 불고 있습니다. 최근의 경향에 따라, ‘슈퍼사이즈 미’라는 영화도 있었구요, ‘슬로우 푸드(Slow food)’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방송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다큐에서도 먹거리에 대해서 다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유기농과 자연을 얘기..
 
 
로처 2008-05-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코리아에서 보고 방문했습니다.
제가 불과 반 년전에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미친소는 남의 나라 얘기였는데,
변화는 참 빠르게 찾아옵니다.

중간에 쓰신 어떤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 맞지요?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이 책 맞는 듯 합니다.
정답이라면 저는 경품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

제 글 오래전 글이지만 먼댓글 걸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요, 건강하세요

Fenomeno 2008-05-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님이 쓰신 글도 잘 읽어보았습니다.
도표로 대단히 알기 쉽게 정리해 놓으셨네요.
게다가 한국 내의 관련 사이트들까지 정리해 두셨구요. ^^

중간에 언급한 책은 틱 낫한 스님의 <화>가 맞네요.
경품은..미처 준비를 못해서..^^;

님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독서하세요.
 
지식 e - 시즌 2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2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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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나는 살아가면서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한자(漢字)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떠올린 건 和자와 樂자, 단 두자였다. 그 중 和자에 대해서라면, 나름대로는 내 주장만이 옳다고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며, 상대적인 관점에서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자고 하는, 진부하지만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樂자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이왕 나온 한 세상을 가급적 즐기면서 즐겁게 살자는, 진부하면서도 상당히 속물적인 의도가 가득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디 세상에 즐거운 일뿐이겠는가. 누구나 즐겁게 살고 싶은 마음은 매 한 가지겠지만, 의외로 樂이라는 것은 마치 희귀한 재화라도 되는 것인 양,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너무 없어서 도무지 세상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 있는 반면, 너무 많이 가져서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의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없이 살더라도 즐거운 마음을 잊지 말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내가 위에서 말한 樂도 그런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물질적 생활을 전제로 한다는 게 명백한 현실이 아닐까.

이 책 <지식e-시즌2>에서 보여주는 40가지의 에피소드들은 바로 그러한 현실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에 비하면 가슴을 울리는 에피소드들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대신에 보다 현실적이면서 현재 우리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들이 좀 더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40개의 에피소드들은 크게 喜,怒,哀,樂의 4개 챕터로 구분되어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喜,怒,哀,樂편의 각 에피소드들이 전적으로 그 글자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쌀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오직 기쁜 일일 리 만무하고, 치매와 관련된 에피소드에 그저 분노의 감정만 생기지는 않으며, 사람을 사랑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은 최민식의 일화가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며, 영국밴드 첨바왐바의 기행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喜,怒,哀,樂은ㅡ마치 사람들 간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ㅡ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나의 기쁨이 누군가의 슬픔이 되고,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의 분노를 사고, 나의 슬픔이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며, 또 나의 분노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모두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古권정생 선생님의 일화가 당당히(?) 樂편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선생님이 한 해 수천만 원씩 들어오는 인세 수입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난함을 떨치지 못하신 건, 당신 혼자의 樂이 결코 진정한 樂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선생님의 樂이야말로 다른 이의 喜,怒,哀를 보듬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 옷 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 지내다보니 정이 들어 /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고 기다렸다. /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 살다 죽는 게 아닌가." (p369)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궁극적으로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불편한 진실에 슬퍼하고 분개해하면서도 끝내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지향하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식e-시즌2>는 자신이 가진 樂의 소중함을 되새겨주고, 다른 사람의 樂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고 즐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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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빠 2008-06-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은둔 - 세상에서 가장 먼 만행
조연현 글.사진 / 오래된미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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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때, 나는 WWF 레슬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빌려 본 레슬링 비디오에 홀딱 반했고, 당연한 귀결로 헐크 호건을 비롯한 레슬러들의 이름을 줄줄 외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워리어를 가장 좋아했는데, 수세에 몰려 있던 워리어가 돌연 각성(?)하는 순간을 나는 정말로 사랑했다. 로프를 흔들면서 각성한 워리어는 아무리 맞아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고, 결국은 상대를 넘어뜨리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듯 열광했던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고서, 나는 더 이상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워리어가 아무리 각성을 한들, 그도 사실은 아픔을 느끼는 범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가!

뭐, 당연한 말이지만, 선(禪)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평생을 정진한, 선사들의 행적을 드러낸 이 책은 레슬링과는 몇억 광년쯤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레슬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마치 더 이상 환호하지 않는 레슬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워리어가 계속해서 로프를 흔들며 상대선수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각성의 순간을 보여주지만, 나는 '뻥치지마! 이제 당신이 아픈 거 억지로 참는 걸 다 알거든. 아니, 사실 그리 아프게 맞은 것도 아니잖아.'라며 심드렁해 하는 기분이 되었달까. 어쨌거나 레슬링은 여전히 열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거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선사들이 레슬링을 할 리 만무하고, 뭔가를 짜고서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사들은 레슬링 기술보다 백만 배쯤 더 대단한 기술을 선보인다. 예컨대, 몸에서 불길과 같은 빛이 솟구치게 한다거나, 잠을 자지 않고 몇 개월을 지낸다거나, 혹은 호랑이 같은 짐승을 부리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외마디 고함으로 족제비를 기절시킨다거나 생리를 멈추는 일도 가능하고, 심지어는 나병환자를 낫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다. 하지만 나로서는 믿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것은 레슬링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믿기 어려운 도력(道力)과 더불어, 비슷한 일화가 각기 다른 선사들에게서 더러 드러나는 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 의존한 한계라고 짐작할 만하다. 잘 알다시피, 이름만 바뀐 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거나, 주인공의 능력이 지나치게 신비하게 포장되는 것은 대개의 구비문학이 지니는 공통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선사들의 행적에 대해 저자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선사는 청정해서 좋고, 계율에 얽매이지 않은 선사는 탈속해서 좋다는 식의 설명은, 나로서는 다소 당혹스럽기만 하다.

설령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레슬링 경기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고, 레슬러들의 땀방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道를 추구했던, 드러나지 않은 선사들의 내밀한 이야기는 자못 감동스러운 데가 있고, 그들의 자취도 결코 거짓만은 아니다. 게다가, 그러한 선사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들의 티끌만한 자취라도 좇으려 했던 저자의 노력은 실로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둔'의 선사들을 드러내려는 분명한 목적과 자료수집의 한계로 인해, 이 책은 지나치게 어린이 위인전 식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열광했던 레슬링을 이제 좋아하지 않듯이, 나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 위인전을 오직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워리어가 로프를 미친 듯이 흔들 때면, 그가 신비한 힘을 받아서 상대의 공격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는 믿음이 관객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이미 전제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때, '쇼하고 있네!'라며 조소하는 사람은 결코 레슬링 경기장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그다지 道를 믿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는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때로는 승가라는 안온한 울타리마저도 서슴없이 버렸던 선사들의 자취는 그 자체로 흥미와 가르침을 주지만, 道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내게는 다소 심드렁했다는 게 내 솔직한 감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당신은 道를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최소한 단번에 고개를 가로 젓지는 않을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터무니없는 결론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마도 그것이 이 책과 독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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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
고혜정 지음 / 소명출판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라디오의 뉴스: 미군도 수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베트콩측도 115명이 전사했습니다.

여자: "무명(無名)이란 참 무섭지요." / 남자: "뭐라고?" / 여자: "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상태지. 아내나 아이들이 있었는지? 연극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115명 전사라는 것 말고는ㅡ."  

장 뤽 고달,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군에 의해 종군위안부로서의 삶을 강요당한 여인들의 수는 2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이 엄청난 숫자가 주는 무서움 이상으로, 그 수많은 여인들은 무명(無名)으로 인한 무서움에 더욱 절망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문제제기로 인해 쟁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시 종군위안부로서의 비극적 삶을 감내한,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서, 이러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기만 하다. 거기에는 다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냉혹한 이데올로기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날아라 금빛날개를 타고>는 망각을 강요당한, 종군위안부들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내기 위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과거 청산이라거나 국민국가의 담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틀 속에서 단지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그 무명성(無名性)을 깨뜨리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인 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이루어진 종군위안부의 그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오마당순이라는 한 어린 소녀를 통해 드러내 주고, 이는 막연한 숫자가 주는 비극 이상의 놀랍고 슬픈,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섬'은 남태평양의 어느 곳에 있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동시에, 우리 인식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섬이다. 열대우림의 이 아름다운 섬은,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공간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마당순을 비롯한 여인들의 고통과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익히 알려진 일본군의 기만과 성적 유린은 어린 소녀의 경험을 통해 좀 더 잔혹하고 참혹한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ㅡ일본군을 포함한ㅡ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기막힌 현실이다. 요컨대, 제국주의라는 초월적 존재의 주관 아래 生은 그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일 뿐이며, 따라서 그 속에는 단지 역할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후, '섬'은 미군에게 점령되어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제 섬은 더 이상 고통과 비극의 장소가 아니라 망각의 장소로 변한 것이다. 여인들이 '공중변소'로 전락하여 얻은 대가는 '불쏘시개'로 사그라지고, 제국주의에 전도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직 희생양만이 넘쳐날 뿐이다. 미군에 의해 구출된 여인들은 고향으로의 귀환 소식에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전과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에 이내, 또 한 번 절망한다. 전쟁은 여인들에게 차마 말하기 힘든 고통을 강요했고, 종전은 또 다시 여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생존자들이 귀향선을 타고 그 섬을 떠나면서, 섬은 점점 멀어지며 수장된다. 그리고 그 곳에 남겨진 사람과 희생자들과 그들의 고통,진실 등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점차 망각되고 만다.

이 책의 의의는 그 망각된 '섬'에 대한 인식의 노력, 즉 '과거의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20만이라는 숫자에 묻혀서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진실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군에게 죽는 순간까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달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섬에 남겨지는 쪽을 택한 막달과 영숙, 끝내 귀향선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 영분, 그리고 전쟁의 잔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은 수많은 여인들. 그들이 그러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것은 오직 전쟁의 광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추악했던 범죄와 마찬가지로, 조국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그들의 삶은 또 한 번 음지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러한 종군위안부가 주는 의미는 오로지 희생과 고통과 비극이다. 하지만, 대체 그들은 언제까지 그러한 절망 속에서 숨어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 일본에 의해, 그리고 조국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여인들은 지금도 우리가 요구하는 망각의 강요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은 그들이 지닌 트라우마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20만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그 다양함 속에서도, 여인들은 오직 '일본에 대한 분노와 희생' 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가혹한 현실이 아닐까.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 나만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그랬다. / 나만 흥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어깨춤을 추며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p333)

제국주의의 시대적 비극과 여성으로서의 숙명적 희생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던 여인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갈망했던 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행복이 아니었을까. 미군에 의해, 직업란에 prostitute(매춘부)로 기록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 오마당순처럼, 모든 기억과 진실이 사라진 채 오직 희생자로서, 무명으로서 기억되는 현실에 그들은 더욱 절망하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만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오마당순이 나무인형을 깎아 죽은 여인들을 하나 하나 기억하며 그네들을 하늘로 올려 보냈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에 관한 것이고, 절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마당순이들이 그들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커다란 금빛 날개를 달아주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뛰어난 소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문장과 넘치는 재미, 혹은 터질 듯한 감동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어쩌면 이 책은 좋은 소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0만 혹은 그 이상의 마당순이들에게 바치는,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작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이제, / 고통이 아니라 힘을 나누고 싶다. / 괴로움이 아니라 충만한 생기를 함께 느끼고 싶다. / 삶의 춤을 추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다.

그대에게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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