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 세상에서 가장 먼 만행
조연현 글.사진 / 오래된미래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한때, 나는 WWF 레슬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빌려 본 레슬링 비디오에 홀딱 반했고, 당연한 귀결로 헐크 호건을 비롯한 레슬러들의 이름을 줄줄 외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워리어를 가장 좋아했는데, 수세에 몰려 있던 워리어가 돌연 각성(?)하는 순간을 나는 정말로 사랑했다. 로프를 흔들면서 각성한 워리어는 아무리 맞아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고, 결국은 상대를 넘어뜨리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듯 열광했던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고서, 나는 더 이상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워리어가 아무리 각성을 한들, 그도 사실은 아픔을 느끼는 범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가!

뭐, 당연한 말이지만, 선(禪)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평생을 정진한, 선사들의 행적을 드러낸 이 책은 레슬링과는 몇억 광년쯤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레슬링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마치 더 이상 환호하지 않는 레슬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워리어가 계속해서 로프를 흔들며 상대선수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각성의 순간을 보여주지만, 나는 '뻥치지마! 이제 당신이 아픈 거 억지로 참는 걸 다 알거든. 아니, 사실 그리 아프게 맞은 것도 아니잖아.'라며 심드렁해 하는 기분이 되었달까. 어쨌거나 레슬링은 여전히 열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거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선사들이 레슬링을 할 리 만무하고, 뭔가를 짜고서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사들은 레슬링 기술보다 백만 배쯤 더 대단한 기술을 선보인다. 예컨대, 몸에서 불길과 같은 빛이 솟구치게 한다거나, 잠을 자지 않고 몇 개월을 지낸다거나, 혹은 호랑이 같은 짐승을 부리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외마디 고함으로 족제비를 기절시킨다거나 생리를 멈추는 일도 가능하고, 심지어는 나병환자를 낫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다. 하지만 나로서는 믿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것은 레슬링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믿기 어려운 도력(道力)과 더불어, 비슷한 일화가 각기 다른 선사들에게서 더러 드러나는 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 의존한 한계라고 짐작할 만하다. 잘 알다시피, 이름만 바뀐 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거나, 주인공의 능력이 지나치게 신비하게 포장되는 것은 대개의 구비문학이 지니는 공통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선사들의 행적에 대해 저자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선사는 청정해서 좋고, 계율에 얽매이지 않은 선사는 탈속해서 좋다는 식의 설명은, 나로서는 다소 당혹스럽기만 하다.

설령 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레슬링 경기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고, 레슬러들의 땀방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道를 추구했던, 드러나지 않은 선사들의 내밀한 이야기는 자못 감동스러운 데가 있고, 그들의 자취도 결코 거짓만은 아니다. 게다가, 그러한 선사들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들의 티끌만한 자취라도 좇으려 했던 저자의 노력은 실로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둔'의 선사들을 드러내려는 분명한 목적과 자료수집의 한계로 인해, 이 책은 지나치게 어린이 위인전 식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열광했던 레슬링을 이제 좋아하지 않듯이, 나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 위인전을 오직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워리어가 로프를 미친 듯이 흔들 때면, 그가 신비한 힘을 받아서 상대의 공격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는 믿음이 관객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이미 전제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때, '쇼하고 있네!'라며 조소하는 사람은 결코 레슬링 경기장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그다지 道를 믿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는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때로는 승가라는 안온한 울타리마저도 서슴없이 버렸던 선사들의 자취는 그 자체로 흥미와 가르침을 주지만, 道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내게는 다소 심드렁했다는 게 내 솔직한 감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당신은 道를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최소한 단번에 고개를 가로 젓지는 않을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터무니없는 결론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마도 그것이 이 책과 독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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