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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
고혜정 지음 / 소명출판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라디오의 뉴스: 미군도 수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베트콩측도 115명이 전사했습니다.
여자: "무명(無名)이란 참 무섭지요." / 남자: "뭐라고?" / 여자: "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상태지. 아내나 아이들이 있었는지? 연극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115명 전사라는 것 말고는ㅡ."
장 뤽 고달,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中)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군에 의해 종군위안부로서의 삶을 강요당한 여인들의 수는 2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이 엄청난 숫자가 주는 무서움 이상으로, 그 수많은 여인들은 무명(無名)으로 인한 무서움에 더욱 절망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문제제기로 인해 쟁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시 종군위안부로서의 비극적 삶을 감내한,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서, 이러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절망적이기만 하다. 거기에는 다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냉혹한 이데올로기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날아라 금빛날개를 타고>는 망각을 강요당한, 종군위안부들의 이름을 전면에 드러내기 위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과거 청산이라거나 국민국가의 담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틀 속에서 단지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그 무명성(無名性)을 깨뜨리기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인 셈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이루어진 종군위안부의 그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오마당순이라는 한 어린 소녀를 통해 드러내 주고, 이는 막연한 숫자가 주는 비극 이상의 놀랍고 슬픈,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섬'은 남태평양의 어느 곳에 있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동시에, 우리 인식의 시간 속에 부유하는 섬이다. 열대우림의 이 아름다운 섬은,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공간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마당순을 비롯한 여인들의 고통과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익히 알려진 일본군의 기만과 성적 유린은 어린 소녀의 경험을 통해 좀 더 잔혹하고 참혹한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ㅡ일본군을 포함한ㅡ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기막힌 현실이다. 요컨대, 제국주의라는 초월적 존재의 주관 아래 生은 그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일 뿐이며, 따라서 그 속에는 단지 역할의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후, '섬'은 미군에게 점령되어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제 섬은 더 이상 고통과 비극의 장소가 아니라 망각의 장소로 변한 것이다. 여인들이 '공중변소'로 전락하여 얻은 대가는 '불쏘시개'로 사그라지고, 제국주의에 전도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직 희생양만이 넘쳐날 뿐이다. 미군에 의해 구출된 여인들은 고향으로의 귀환 소식에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이전과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에 이내, 또 한 번 절망한다. 전쟁은 여인들에게 차마 말하기 힘든 고통을 강요했고, 종전은 또 다시 여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생존자들이 귀향선을 타고 그 섬을 떠나면서, 섬은 점점 멀어지며 수장된다. 그리고 그 곳에 남겨진 사람과 희생자들과 그들의 고통,진실 등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점차 망각되고 만다.
이 책의 의의는 그 망각된 '섬'에 대한 인식의 노력, 즉 '과거의 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20만이라는 숫자에 묻혀서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진실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미군에게 죽는 순간까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달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섬에 남겨지는 쪽을 택한 막달과 영숙, 끝내 귀향선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 영분, 그리고 전쟁의 잔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은 수많은 여인들. 그들이 그러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것은 오직 전쟁의 광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추악했던 범죄와 마찬가지로, 조국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그들의 삶은 또 한 번 음지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러한 종군위안부가 주는 의미는 오로지 희생과 고통과 비극이다. 하지만, 대체 그들은 언제까지 그러한 절망 속에서 숨어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 일본에 의해, 그리고 조국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했던 여인들은 지금도 우리가 요구하는 망각의 강요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은 그들이 지닌 트라우마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20만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그 다양함 속에서도, 여인들은 오직 '일본에 대한 분노와 희생' 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가혹한 현실이 아닐까.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 나만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그랬다. / 나만 흥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게 아니었다. / 그들도 어깨춤을 추며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p333)
제국주의의 시대적 비극과 여성으로서의 숙명적 희생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렸던 여인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갈망했던 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행복이 아니었을까. 미군에 의해, 직업란에 prostitute(매춘부)로 기록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 오마당순처럼, 모든 기억과 진실이 사라진 채 오직 희생자로서, 무명으로서 기억되는 현실에 그들은 더욱 절망하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만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오마당순이 나무인형을 깎아 죽은 여인들을 하나 하나 기억하며 그네들을 하늘로 올려 보냈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에 관한 것이고, 절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마당순이들이 그들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커다란 금빛 날개를 달아주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뛰어난 소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문장과 넘치는 재미, 혹은 터질 듯한 감동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어쩌면 이 책은 좋은 소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0만 혹은 그 이상의 마당순이들에게 바치는,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작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이제, / 고통이 아니라 힘을 나누고 싶다. / 괴로움이 아니라 충만한 생기를 함께 느끼고 싶다. / 삶의 춤을 추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다.
그대에게 (p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