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행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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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사정을 지닌 세 청춘남녀가, 이렇게 저렇게 얽혀 팀을 이루고, 이러쿵 저러쿵 10억엔을 훔쳐낼 모의를 해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한밤중의 도쿄를 좌충우돌한다, 라는 게 바로 <한밤중에 행진>의 큰 줄거리라고 한다면, 이 책은 제법 흥미진진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25살의 동갑내기인 그 세 청춘남녀라는 사람들이, 2류 양아치에 불과하면서도 가끔은 요령 있는 모습을 보이는 요코하마 겐지와, 좀 모자라보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놀라운 집중력과 머리회전을 자랑하는 미타 소이치로와, 마지막으로 도도하고 세련된 도시 미인의 이미지이지만 알고 보면 여리고 착한 구석이 있는 구로사와 치에라고 한다면, 개성 있고 톡톡튀는 등장인물들 때문에라도 이 책이 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10억엔이라는 거금을 두고 확실히 어설픈 3인조와, 무섭고 흉폭하지만 역시 좀 어설퍼 보이는 야쿠자와, 냉철하고 과감하지만 그래도 또한 어설픈 중국인 2인조와, 전혀 어설프지 않지만 결국 어설플 수밖에 없는 사기꾼이 서로 쫓고 쫓기며 소소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게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기 어려울 지경이 될 게 틀림없으리라.

물론, 실제로ㅡ어느 정도는ㅡ그렇다. 흥미진진한 스토리,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과 반전들은 분명 이 책의 장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하는 허탈하고 심드렁한 느낌만이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야 물론 10억 엔쯤 되는 돈이 목표라면 이유 따위야 어떻든, 상대가 야쿠자든 사기꾼이든 간에 한바탕 난리를 칠 법도 하지만, 그저 '돈을 갖고 튀어라.'가 이 책이 말하는 전부란 말인지. 대관절 25살 청춘이란, 앞뒤 재지 않고 오로지 질주하는 것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란 말인지. 달리 어떤 '메시지' 혹은 '공감'을 얻지 못하니, 흥미진진한 소재와 이야기도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과도 공명하지 못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도 더 이상 긴장을 야기하지 못한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미 25살이 지난 지가 오래고, 딱히 25살 때라고 한들 "두려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 질주하는 청춘"이었다기보다는, 두렵기도 하고 아깝기도 했던 미적지근한 청춘이었으니, 쉽게 책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인지도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이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남쪽으로 튀어>의 오쿠다 히데오를 기대해서였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괜스레 실망도 커진 듯하다. 굉장히 만족스러웠던 <남쪽으로 튀어>에 비하면 이 책은 한참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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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3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빨간 머리 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4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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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나보다 더 또렷이 기억하는 누나는 예전에 우리집에 내용이 조금은 축약된 <빨간 머리 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듯하다. 하기야 어린 시절에 재밌는 놀이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빨간 머리 앤> 따위를 읽을 시간이 있었겠는가. '빨간머리 용사'랄지 혹은 '빨간머리 해적'이라고 해도 읽을까 말까일 판에, '빨간머리 앤'이라니! 당연한 귀결로 어린 시절 이후로도 나는 빨간머리를 가진 '앤'이라는 여자아이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내게 '빨간머리'란 오직 '강백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앤'이야 빨간머리든 파란머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런 나라도 빨간머리 앤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건 전적으로 EBS에서 방영해준 '명작만화' <빨간 머리 앤>을 누나 옆에서 그럭저럭 보았던 덕이다. 일단 만화영화라면 제목과 내용이 어떻든, 자연스레 눈과 귀를 TV로 가져가게 마련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만화로 인해, 나는 꽤 오랫동안 앤이라는 여자가 조금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품게 되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어떤 의미로든 빨간머리 앤은 확실히 '정상'의 범주는 벗어난다. 나는 이미 만화를 통해 앤이 자신의 이름을 꼭 'e'가 붙은 앤으로 불러달라고 말하고(단지 더 근사하다는 이유로!), 무슨 연극놀이를 한다며 배를 타고 죽은 듯이 누워가다 진짜로 죽을 뻔한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이건 한결 더하다. 앤이란 여자 아이는 한 번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은 예사고, 잠시 말이 끊기는 것도 잠깐 질문을 할 때나 혹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때일 뿐, 곧 또 다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댄다. 게다가 그 이야기란ㅡ마릴라가 항상 지적하듯이ㅡ대체로 쓰잘 데 없는 공상이 대부분으로, 숲속에 유령이 있다고 믿는다거나, 자신의 모습을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상상하거나, 혹은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따위의 내용이다. 어디 그뿐인가. 물론 실수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친구' 다이애나에게 딸기주스 대신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거나, 앨런 부인에게 대접할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는다거나 하는 등의 사건을 앤은 끊임없이 저지른다. 오죽하면 앤이 울거나 놀라며 달려올 때면 마릴라가 이렇게 말하겠는가. "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니?"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빨간머리 여자아이의 활극(?)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나는 책을 차마 손에서 놓기 아쉬울 지경이었다. 사실 처음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만 해도, 주근깨에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은 사랑스럽기는커녕 그저 이상스럽다는ㅡ심하게는 정신병이라는ㅡ심증을 굳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앤이라는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매료되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앤의 무한한 상상력에 공감되었다기보다는, 다만 매슈 아저씨의 입장에 동감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하다. 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글쎄"라는 말을 반복하며 앤의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감성에 약간의 난감함을 표했던 매슈 아저씨처럼 앤의 감성을 따라가기란 빈약한 내 감성으로는 벅찬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슈 아저씨가 여전히 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듯ㅡ심지어 엄격한 마릴라도 인정했듯ㅡ앤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의외로 상당히 흥미로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저 공상만 하던 어린 아이가 우정과 사랑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며, 무엇보다도 그러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던 '명작만화'의 옛가사 내용을 십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빨간머리 앤은, 결코 미친 게 아니었다!!

남들은 예전에 다 읽었을 법한 책을 뒤늦게 읽고 호들갑을 떠는 꼴인데, 정말이지 <빨간 머리 앤>이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책인 줄은 몰랐다. 과연 이 책의 결말 이후에 앤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도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예전부터 '빨간머리 앤'의 충실한 신봉자였던 누나 덕택에 책장에 꽂히게 된, '초록지붕 집의 앤' 이후를 다룬 몇 권의 책들을 읽는 일은 좀 더 나중으로 미뤄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집에 있는 몇 권의 책들이 원서라서 어차피 내게는 읽을 재간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긴 해도 별로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아마도 앤이라면 "영어를 읽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좋은 점도 많아요. 상상할 여지가 더욱 커지잖아요." 따위의 말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앤이 아니니 영어라서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찾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보다는 매슈 아저씨가 한 말을 이유로 삼는 편이 좀 더 그럴 듯해 보이리라. "낭만을 완전히 버리지는 말아라, 앤. 조금쯤은 낭만적인 게 좋아. 물론 너무 지나치면 안 되겠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 둬, 앤. 조금은 말이야." 적어도 아직은, 여전히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어둠"을 품고 있는 '모퉁이'들을 상상할 수 있는, '초록지붕 집'의 낭만을 좀 더 남겨두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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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바라기 2020-11-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과 리뷰를 보고 갑니다.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군요.
 
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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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북부 키웨이틴 불모지역에는 한 가족이 살고 있다. 한 쌍의 부부와 꼬마 넷, 그리고 친척뻘 쯤 되는 아저씨 한 명이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불모지역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리 풍요로운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편 조지와 아내 앤젤린 그리고 앨버트 아저씨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그곳에서 영위해 나간다. 그들의 집에는 이따금 가까운 친척이 방문을 하기도 하고, 순록이 이동하는 때가 되면 지역 동족들이 사냥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며, 혼자인 앨버트 아저씨에게 갑작스러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하는 등, 그들의 삶은 여유롭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삶은, 그리 좋지 못한 목적으로 불모지역을 찾은 한 남자에 의해 낱낱이 관찰되기 시작한다.

자,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책 <울지 않는 늑대>는 한 스토커 같은 낯선 침입자에 의한 범죄 스릴러물 냄새를 물씬 풍길지도 모르나, 나는 위에서 고의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빠뜨렸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다. 세상에 사는 생명이 인간이 전부가 아닌 한, 단란한 가족이 실은 늑대 가족이라는 사실 정도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위에 언급한 가족의 삶에서 어떤 위화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오직 늑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의 '허구화된' 이미지 때문일 뿐이다. 이를테면, 일찍이 어떤 가수가 "진짜로 늑대들은 모두 다 자기네 여자 밖에 모른다"고 노래를 불렀음에도, 여전히 늑대를 반듯한 남자의 이미지로는 매치시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캐나다의 최고 작가로 알려진(나는 몰랐던 일이기는 하지만) 팔리 모왓은 이 책에서 그러한 늑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늑대가 지닌ㅡ차라리 애교로 봐줄 법한ㅡ음흉한 남자들의 상징이라는 이미지 외에, '잔혹한 킬러'라거나 혹은 '무자비한 약탈자'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얼마나 와전되고 과장된 것이며, 특히 늑대를 사냥의 경쟁자로 인식하는 인간에 의해 어떻게 악의적으로 조작되었는지를 여실히 밝혀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늑대에게 덧씌운 이미지란 실상 인간이 지닌 어두운 그림자를 고스란히 늑대에게 전가시킨 것일 뿐임을, 풍자와 조소를 섞어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고발한다. 그리하여 종래에 이 책은, 역자의 말대로 인간과 늑대의 위치를 완전히 뒤바꿔 버리고 만다. 

물론,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책은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검증된 내용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면 쉽게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실제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사실성 여부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의 검증 따위는 그저 과학자들이나 연구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이 책은 "사실이 진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업이며, 삶을 이해하는 데 유머가 차지하는 역할이 지극히 중대하다는 내 소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며, 따라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만 진실과 유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 책에서 '사실'이란 그저 부차적인 가치일 뿐인 셈이다.

인간이 "남자는 다 똑같은 늑대" 운운하는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것과는 달리, 늑대의 세계에서는 "바람을 피우며 가족을 돌보지 않고, 그저 재미로 사냥을 하며 탐욕을 부리는 늑대는 완전히 인간과 똑같네" 어쩌고저쩌고 하는 노래를 사뭇 비장한 어조로 부른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건 내가 지금 막 멋대로 지어낸 터무니없는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순록의 대량 살상이 늑대 짓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키웨이틴을 찾은 한 남자가 발견한 것이, 그 모든 일이 실상 인간의 짓이었다는 진실일 뿐이었듯, 사라진 늑대의 노랫소리에는 자연 파괴자인 인간에 대한 조소와 증오 그리고 공포만이 가득하다는 것이 오직 진실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선연한 '진실'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울지 않는 늑대'란, '진실을 잃어버린 인간'의 슬픈 표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재미있게 쓰면서, 여기에 더해 은근한 비판과 풍자를 섞을 줄 아는 작가를 좋아하는데, 팔리 모왓은 이런 내 기호에 딱 들어맞는 작가다. 뒤늦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아마도 그의 다른 책들도 언젠가 집어들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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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소년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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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오늘 하루를 되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왕이면 한 십수 년쯤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흥미진진해지지는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상상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쓰잘 데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후회'라는 감정을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십수 년 동안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감히 단언하건대 그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후회'를 안고 '지금'을 살아가는 게 고작이니까 말이다.

아디치 미츠루의 단편 모음집인 <모험소년>은 이미 제목에 쓰인 '모험'과 '소년' 그리고 '시간'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7개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은 유독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천착하는데, '시간'의 건너편에는 바로 '소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거'가 한결같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소년' 시절, 치기만 하면 무조건 홈런이라도 될 것 마냥 기대에 부풀어하고, 영웅을 좇아 그의 흉내를 내며, 치기어린 꿈에 사심 없이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되돌아간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은,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자각하도록 만든다.

물론, '모험'으로 가득했던 '소년' 시절이 끝난 지금,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되돌아간 시간이 투영하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또한 어쩔 수 없이 씁쓸하기만 하다. 뜬금없는 홈런을 기대하기보다는 확률 높은 안타를 노리고, 영웅을 동경하는 대신 한걸음 물러난 범인의 길에 만족하며, 꿈을 한구석에 밀어 넣고 지극히 현실적인 삶과 씨름하는 모습만이 '지금'의 시간을 삭막하게 채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로'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 '소년'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봉인해둔 타임캡슐 속 '소년의 꿈'은, 시간이 흐른 뒤에 지극히 생경한 '과거'로만 현현한다. 그것은 그저 아름답고 그리운 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절된 과거처럼 보인다.

아다치 미츠루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다분히 환상적인 매개체를 작품 곳곳에 등장시킨다. 이를테면 '도라에몽의 주머니'나 '시간의 계단'처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힘에 의해 주인공은 '단절된 과거' 혹은 '멈추어진 시간'과 대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과 상상이 아니라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냉혹한 시간의 불가역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끊임없이 흐르는,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을 문득 깨닫게 한다. 수록된 마지막 단편 '스케치북'에서 멈춰진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낡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소박한 꿈이 현재와 만나는 것도 아마도 그런 시간의 연속성 덕분이 아닐까. 

어쨌거나, 적어도 현실에서라면 어떤 환상과 상상을 동원하든 간에 결국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멈추어진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필요한 일이다. 그저 언제나 '지금'을 사는 게 고작이면서, 굳이 '소년의 모험'을 '과거'로만 치부하며 꽁꽁 싸매어 두기만 하는 것은 꽤나 애석한 일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모험'이란, 반드시 '소년'의 전유물만은 아닐 테니까. '쓸데없는 것' 사이에 묻혀버린 '소년의 모험'은, 그래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다. 그리고 그럴 때ㅡ과거와 지금의 시간이 이어질 때, 비로소 '지금'을 사는 일도 조금은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린 커져버린 몸과 함께, 쓸데없는 것까지 키워버린 모양이군."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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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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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선더볼트 키드였다. 비록 엘렉트로 별의 볼튼 왕이 남긴 유산인,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를 집에서 발견할 수 없었고, 특히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궁극의 비기인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도 도무지 알 수 없긴 했지만, 다음의 여러 행적들ㅡ높은 곳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물질을 떨어뜨렸다거나, 신나게 밖에서 놀다가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철철 흘렸다거나, 냄새도 별로고 몸에도 별로일 소독가스를 좇아 보건소 차량의 뒤를 미친듯이 뛰었다거나, 오로지 성(性)의 학문적 탐구심을 충족시켜 줄 자료를 찾기 위해 집 안, 특히 부모님의 방을 탐색해 보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은, 내가 선터볼트 키드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일화들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실은 거의 모든 소년들이 선더볼트 키드였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선더볼트 키드였다고 밝히는 빌 브라이슨의 커밍아웃에 새삼스레 놀랄 이유는 전혀 없겠지만, 그가 이 책(원제: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kid)에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에 대한 추억을 펼쳐내며 과시하는 비상한 기억력은 확실히 놀라움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1950년대 미국 디모인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이야기는 가끔 시,공간적 격차로 인해 낯설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유머로 인해 대체로 과장에서 시작해 종종 황당으로 끝나더라도 재미있게 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더볼트 키드'라는 강한 유대감은 그의 이야기들을 어느새 내 이야기로 치환하는 것을 그리 무리없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나 나나,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살았던 것이다.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던, 유쾌하고 재미있고 또 조금은 따뜻했던 그러한 세계를. 

그러나 불행히도, 빌 브라이슨이 묘사하는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가 좀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는 '과거'가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더볼트 키드였던 빌 브라이슨이 마음껏 만화책을 볼 수 있었던 키디 코랄과, 그가 사탕을 실컷 훔쳐 먹어도 들키지 않았던 조그만 잡화점 그룬드와, 당시 매혹의 대상이었던 백화점 융커는 당연한 귀결로 이제 사라지고 말았고, 그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예외만은 아니었다. 빌 브라이슨은 흥분되고 아름답던 많은 것들을 과장해서 말하던 것과는 달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하지만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약간의 자조를 담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옛날의 디모인은 그렇게 멋진 세상이었다. 이제 그런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돌이켜 보면, 선더볼트 키드라면 누구나 "사람을 향해 쏘지 마시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긴 비비탄 총을 서슴없이 사람을 향해 쏘아댔고, 놀이터에 대인용 함정을 파기 위해 미친 듯이 땅을 파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더볼트 비전의 사용법을 알았다면 당연히 빌 브라이슨처럼 맘에 들지 않는 여럿을 태워버렸겠지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선더볼트 키드는 감옥에 가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형법 9조 "14세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에 힘입은 바가 아니라, 간혹 선더볼트 키드이기를 포기한 녀석만 아니라면 선더볼트 키드는 결코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는 법은 없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행동하는 것과는 별개일지라도, 우리는 약한 자는 돕고 악한 자는 처벌해야한다는 '바른생활'을 한결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더볼트 키드도 대부분은 끝내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요컨대 가장 변한 것은, 실은 '선더볼트 키드'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재미있고 유쾌한 추억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공감과 아련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그 세계의 아이들은 몸집도 작고 때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어른들에 비해서는 문명화된 존재들"이었다는 빌 브라이슨의 명확한 지적이 시사하는 바처럼, 선더볼트 키드를 선더볼트 키드이게 했던 것은 단지 선더볼트 무늬의 스웨터나 선더비전 그리고 수많은 놀이만이 아니라, 사실은 조금은 순수하고 따뜻했던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던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그러한 따뜻했던 마음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즐거웠던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변화'의 중심에 선 사람들에게, 유쾌하며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행복하지만 날카롭게 상기시켜준다. 기실, 더 이상 선더볼트 키드가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선더볼트 키드의 세계'란, 결국 '문명'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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