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빨간 머리 앤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4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08년 10월
평점 :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나보다 더 또렷이 기억하는 누나는 예전에 우리집에 내용이 조금은 축약된 <빨간 머리 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듯하다. 하기야 어린 시절에 재밌는 놀이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빨간 머리 앤> 따위를 읽을 시간이 있었겠는가. '빨간머리 용사'랄지 혹은 '빨간머리 해적'이라고 해도 읽을까 말까일 판에, '빨간머리 앤'이라니! 당연한 귀결로 어린 시절 이후로도 나는 빨간머리를 가진 '앤'이라는 여자아이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내게 '빨간머리'란 오직 '강백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앤'이야 빨간머리든 파란머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런 나라도 빨간머리 앤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건 전적으로 EBS에서 방영해준 '명작만화' <빨간 머리 앤>을 누나 옆에서 그럭저럭 보았던 덕이다. 일단 만화영화라면 제목과 내용이 어떻든, 자연스레 눈과 귀를 TV로 가져가게 마련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만화로 인해, 나는 꽤 오랫동안 앤이라는 여자가 조금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품게 되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어떤 의미로든 빨간머리 앤은 확실히 '정상'의 범주는 벗어난다. 나는 이미 만화를 통해 앤이 자신의 이름을 꼭 'e'가 붙은 앤으로 불러달라고 말하고(단지 더 근사하다는 이유로!), 무슨 연극놀이를 한다며 배를 타고 죽은 듯이 누워가다 진짜로 죽을 뻔한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이건 한결 더하다. 앤이란 여자 아이는 한 번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은 예사고, 잠시 말이 끊기는 것도 잠깐 질문을 할 때나 혹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때일 뿐, 곧 또 다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댄다. 게다가 그 이야기란ㅡ마릴라가 항상 지적하듯이ㅡ대체로 쓰잘 데 없는 공상이 대부분으로, 숲속에 유령이 있다고 믿는다거나, 자신의 모습을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상상하거나, 혹은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따위의 내용이다. 어디 그뿐인가. 물론 실수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의 친구' 다이애나에게 딸기주스 대신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거나, 앨런 부인에게 대접할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진통제를 넣는다거나 하는 등의 사건을 앤은 끊임없이 저지른다. 오죽하면 앤이 울거나 놀라며 달려올 때면 마릴라가 이렇게 말하겠는가. "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니?"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빨간머리 여자아이의 활극(?)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나는 책을 차마 손에서 놓기 아쉬울 지경이었다. 사실 처음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만 해도, 주근깨에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은 사랑스럽기는커녕 그저 이상스럽다는ㅡ심하게는 정신병이라는ㅡ심증을 굳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앤이라는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매료되어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앤의 무한한 상상력에 공감되었다기보다는, 다만 매슈 아저씨의 입장에 동감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하다. 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글쎄"라는 말을 반복하며 앤의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감성에 약간의 난감함을 표했던 매슈 아저씨처럼 앤의 감성을 따라가기란 빈약한 내 감성으로는 벅찬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슈 아저씨가 여전히 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듯ㅡ심지어 엄격한 마릴라도 인정했듯ㅡ앤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의외로 상당히 흥미로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저 공상만 하던 어린 아이가 우정과 사랑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며, 무엇보다도 그러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던 '명작만화'의 옛가사 내용을 십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빨간머리 앤은, 결코 미친 게 아니었다!!
남들은 예전에 다 읽었을 법한 책을 뒤늦게 읽고 호들갑을 떠는 꼴인데, 정말이지 <빨간 머리 앤>이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책인 줄은 몰랐다. 과연 이 책의 결말 이후에 앤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도 무척 궁금해진다. 하지만 예전부터 '빨간머리 앤'의 충실한 신봉자였던 누나 덕택에 책장에 꽂히게 된, '초록지붕 집의 앤' 이후를 다룬 몇 권의 책들을 읽는 일은 좀 더 나중으로 미뤄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집에 있는 몇 권의 책들이 원서라서 어차피 내게는 읽을 재간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긴 해도 별로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아마도 앤이라면 "영어를 읽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좋은 점도 많아요. 상상할 여지가 더욱 커지잖아요." 따위의 말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앤이 아니니 영어라서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찾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보다는 매슈 아저씨가 한 말을 이유로 삼는 편이 좀 더 그럴 듯해 보이리라. "낭만을 완전히 버리지는 말아라, 앤. 조금쯤은 낭만적인 게 좋아. 물론 너무 지나치면 안 되겠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 둬, 앤. 조금은 말이야." 적어도 아직은, 여전히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어둠"을 품고 있는 '모퉁이'들을 상상할 수 있는, '초록지붕 집'의 낭만을 좀 더 남겨두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p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