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나를 키운 8할이 축구였다면, 나머지 2할 중 1할은 필히 무협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답답하고 억압된 시간 속에서 무협지는 구원이자 해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주옥같은 가르침은 언제나 남의 나라 언어나 복잡한 공식 속이 아니라, 오직 무협지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가령 "언제나 3푼은 감추어 두어라."라거나 "안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라거나, 혹은 "칼에는 흑도 백도 없다."라는 가르침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당시에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었더라면, 아마도 내가 지금쯤 조그만 방파의 수장이 되는 일쯤은 우습지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그렇듯 당시에 무협지의 세계를 신봉했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서로 이곳저곳의 책방에서 무협지를 빌려와서 돌려 읽는, 일종의 '무협 계'를 형성한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려온 무협지를 대체로 작가의 이름으로 통칭했고, 그것으로 그날 하루의 운이 결정되곤 했다. 이를테면, 거의 빨간책을 방불케 하는 '와룡강'을 누군가 빌려오면 잠깐의 자극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식상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금강'이라면 한편 웅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형적인 하루를 보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설봉'이나 '용대운'을 누군가 빌려올 참이면 그날은 무협의 멋을 제대로 느낄 하루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실험성이 두드러진 '좌백'은 꽤나 독특한 하루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진산'이라면, 그날의 운은 사뭇 유려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협작가 '진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진산이 무협작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여성 작가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진산의 글은 무엇보다도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진산의 무협 속에는 여타의 무협에서 한결같이 되풀이되곤 했던 '협(俠)'의 이미지가 옅은 대신 '정(情)'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고, 그 무대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기보다는 오히려ㅡ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ㅡ'청산녹수(靑山綠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진산의 무협은, 칼과 검이 난무하는 호쾌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산처럼 혹은 물처럼, 그렇듯 변함없거나 혹은 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서정시인 셈이다.

아마도 유일한 무협 단편집일 거라는 이 책에서 '서정시'와 같은 진산의 스타일은 꽤나 맞춤한 듯 어울린다. 물론 단편의 태생적 숙명상, 기인이사들과 뭇 군웅들은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의 신세내력만 읊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이 필요한, 장편이 지닌 광활한 강호의 호쾌한 매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개인과 가족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 사이의 내용으로 범위를 좁히고 있는 각 단편은 소박하지만 응축된 테두리 안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이야기들의 매력을 뽐낸다. 그러면서도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복수와 무인의 자기완성 등,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십분 녹여내는 솜씨는, 조금 과장하자면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각 단편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각각의 소재를 변주하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가령,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노랫말과 이야기를 병치시킨다거나('청산녹수'), 한 단체 속 동료를 각기 주인공으로 삼는 연작을 쓴다거나('고기만두' 외 3편), 또는 2인칭 시점을 도입하는('잠자는 꽃') 등, 진산은 소재의 소소함과 형식의 다양함으로 이 단편집을 풍성한 매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진산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과 이 단편집의 의의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문장을 떠올린 후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글을 쓴다는 진산의 글은 실로 유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저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꽤나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진산'의 무협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단편무협을 모은 이 책이 적어도 당분간은 진산의 마지막 무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산은 작품해설에서 수록된 단편 '날아가는 칼'의 마지막 문장, "그 후, 어떤 칼도 날지 않는다."가 작별 인사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러한 진산의 결심은 이 책의 제목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진산 무협의 팬들은, 역시 책 속 단편 '고기만두'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내가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원인 모양이다. 그 불가능이 이렇게 기쁠 수가." 단편 '청산녹수'의 '희'처럼,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려는 '진산'이 그 불가능한 소원의 기쁨을 깨달아 언젠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강호를 추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산처럼 굳건하게 맞아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엄마와 누나가 나를 붙잡고 뭔가에 대해 하소연을 할 때, 이성과 객관을 유지한 채 자못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다분히 훈련된 깨달음으로, 무심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대꾸를 했다가 원망과 탄식이 뒤섞인 한소리를 듣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채 마냥 넋놓고만 있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여서, 가령 "뭐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대!"랄지 혹은 "그거 정말 웃기는 짬뽕이군!"과 같은, 상대의 말에 감정적으로 완벽히 동조하는 모습을 입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웅변하지 않는 한, 역시 한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한소리'란 이 책의 제목과 사뭇 유사해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긴 해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인간수컷은 필요없어!" 아, 필요 없어서 슬픈 짐승, 그 이름은 인간수컷이어라!

그런데 '인간수컷'이라는 생태계 내의 한 종으로서 내가 그 무용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얄밉게도 종종 그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을 인정받는 종이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바로 고양이가 그렇다. 온몸으로 주인에 대해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개와는 달리, 그 도도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고양이는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종인지. 하느님이 있다면 찾아가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신빙성 있는 가설에 따르면 고양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유쾌한 분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페리네 혹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할 목적으로 지구인들이 매료될 만한 종으로 변신한 것. 과연 인간이 고양이의 매력에 굴복한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이 대목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지구가 정복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인간과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고양이가 주연인 건,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버려진 새끼 고양이 무리와 도리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들을 만나자마자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러다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얻어맞아 피를 보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개, 겐도 역시나 주연이라 하기엔 약하다. 사랑과 질투와 반항과 우정에서부터 심지어 가출과 공주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정상태와 행동양태를 표출하며 요네하라 마리의 집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선사하는 고양이야말로 이 책의 주연으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손쉽게 집 하나를 점령한 자타공인 서열 1위 고양이 도리는 아마도 자신을 파견한 페리네 혹성에 이렇게 교신을 보냈을 게 틀림없다. "고양이 제176524839호, 임무완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추신. 멍청한 개 하나 포함"

하지만 비록 이 책에서 고양이에게 주연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었을지라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의 '행복함'은 무엇보다도 그 모습을 항시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개집에 언제나 개를 묶어두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유기견을 손쉽게 살 처분하는 일본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에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하며, 버려진 동물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또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는 등의 재기 넘치는 유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모습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도록 느껴진다. 특히 냉소와는 거리가 먼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이처럼 따뜻한 유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요네하라 마리를 두고 시인 황인숙은 "의롭고 명민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싱싱한 유머감각!"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시인의 언어가 표현하는 그 적확함을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따뜻함은 전염되는 까닭인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시선이 따뜻함만을 바라보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따뜻하다. '잡종'이라는 말에 정색하며 '비순종'이라는 말로 정정해주는 수의사가 있고(그는 밥먹듯이 동물병원의 상호를 바꾸는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사기나 의료사고와 같은 어두운 사건과 연루되어서는 아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고양이들에게서 죽은 자신의 고양이들을 떠올리고는 펑펑 우는 중년의 사내가 있고(다만, 그의 며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악독한데, 이건 비단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들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아픈 고양이들을 위해서 함께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나서주는 이웃이 있으며, 불쑥 찾아 온 개에게 기꺼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그 개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들의 따뜻함은, 미국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고양이의 잠든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여"라고 일제히 말한 것을 굳이 통역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요네하라 마리가 적고 있듯,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따뜻함'과 '행복함'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던 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요네하라 마리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려동물과의 필연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 새로운 동물을 입양하는 일은 이제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겪는 슬픔과 고달픔과 어떤 소동들의 난처함은 이 책에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도 결국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느끼는 덕분일 테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개와는 함께 살아봤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간수컷의 위치는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그 이유가 고양이 때문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에게 정복되어 모두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구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한 행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 책 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나는 고양이의 지구정복 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빠른 페리네 혹성인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이 되냐
박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새파란상상' 출판사의 관계자인 듯한 분이 댓글을 남겨 주었다. 댓글의 내용인즉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가 나왔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얘기였고,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를 계기로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참여하라는 얘기였다. 뜬금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 이유는 순전히 내가 야구 관련 서적을 읽고 리뷰를 쓴 전례가 있기 때문인데, 이렇듯 야구팬으로 보이는 잠재적 독자를 일일이 찾아가는 홍보 방식은 나름 괜찮아 보였다. 어차피 야구소설이란 건, 결국 읽을 만한 사람만 읽게 되는 장르이니까. 다만 그 분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야구 관련 서적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야구팬은 아니라는 것이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축구팬'이다. 그러니까 '축구팬' 블로그에 찾아와서 "야빠대동단결" 운운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

그런데 말이 안 되기로 따지자면, 제목조차 '말이 되냐'인 이 소설은 그보다 한술 더 뜬다. 사회인 야구팀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야구를 하며 회사를 다니던 주인공(이원식)이 회사에서 잘린 후 산속 암자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만난 무공스님과의 인연 덕택에 무공을 전수 받고 내공을 얻고 비도술을 익힌다? 잠깐, 혹시나 이 정도쯤이야 이른바 차원이동 무협소설에서 흔히 보던 패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판 야구소설의 입장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후의 상황은 점입가경이어서, 비도술의 방식으로 던지는 이원식의 공은 조금씩 신체 운용의 묘리를 깨우쳐 가면서 점점 더 빨라지고, 그는 곧 꿈에서나 밟아 보았던 프로의 마운드 위에 오른다. 게다가 그런 그의 곁에는 야구를 사랑하며 언제나 그에게 기적을 베푸는 아름다운 여인(이선희)도 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

그러나 평범하고 찌질한 인생을 살던 한 야구팬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거나 하는 따위의 문제는 기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본래 판타지와 로망의 영역이라는 것이고, 알다시피 판타지와 로망이라는 건 현실과는 억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도리어 위안과 만족을 주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야구를 인생의 한가운데에 둘 수 있는 기쁨과 시속 160km대의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환희,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우정과 유대,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이와의 사랑도 외려 현실과는 다르기에 바라마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셈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야구소설'이랍시고 완전히 '현실'적이라면, 아마도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다가 회사에서도 잘리고도 정신 못 차린 채 '프로야구'를 꿈꾸는 이원식은 야구공을 손에 쥔 채 '야, 구..' 한 마디를 남기고는 처참하게 죽게 될 테고(물론 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끝내 남기고 싶었던 말은 '야, 구해줘, 제발'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찌질한 인생은 야구조차도 꿈꿀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되냐!

유쾌하고 코믹하지만 과장되고 엉뚱한 듯하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점점 더 궁극의 판타지에 다가갈수록 어떤 현실성 없는 욕망의 대리만족도 더욱 충족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환상이 본래 그렇듯,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시련과 고난이 닥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부조리와 약은 술수로 무장한 악당이 등장할 때, 가령 소설 속에서 "비열한 악한이 권력자가 되기도 하는 사회"에서 당연하다는 듯 음험한 쥐새끼 같은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그래 이명복이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를 상대하게 될 때, 이 판타지란 것도 결국 현실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새삼 깨닫고, 그렇다면 아무리 빠른 직구라도 별무소용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곤 하는 것이다. 하긴, 아닌 게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에서 그저 빠른 공만 장땡이라면, 그게 말이 되냐!

최고의 강속구. 최고의 멋진공. 부조리라곤 없는 정직한 직구. (p43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스포츠인 야구에서 정직한 직구의 매력이란, '작가후기'에서 작가가 언급하듯 "극복에의 의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빠르다고 무조건 얻어맞지 않는 것도, 느리다고 무조건 얻어맞는 것도 아니지만, 있는 힘껏 던지는 최고의 강속구에는 정정당당하게 맞부딪치는 순수한 의지가 가득 담겨 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종종 어떤 '희망'을 은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당한 야구를 도외시하는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이명복. 물론, 중요한 건 아니지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정의'랄지, 혹은 나아가 "대통령은 밥 먹고 국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운동선수는 밥 먹고 열심히 운동만 하는", 그런 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기대' 같은. 물론, 현실은 그와는 달리 여전히 쥐똥 같을지도 모르지만, '극복의 의지'가 있는 한, 그리하여 "우리에게 좋은 날이 올 수 있도록 극복하는 힘이 되어 줄 해피엔딩의 마력"을 믿는 한, '희망'을 은유하는 정직한 직구의 가치는 여전히 작지 않다. 그러한 '희망'조차도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테니까. 

덧. 어쩌다 보니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당첨된 모양인지, 어느 날 야구 티켓 두 장이 집으로 날아왔다. 물론 일단은 고맙긴 한데, 다만 문제라면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달려 온 티켓이 가리키는 일시와 장소가 바로 다음날의 서울 목동야구장이라는 것. 그러니까 지방에 사는 사람한테 당장 내일 열리는 서울 경기 티켓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라는 건 얼마 전까지의 일이고, 며칠 전에 이번에는 다소간의 여유를 둔 티켓이 또 날아왔다. 이것은...그러니까 '축구팬'을 '야구팬'으로 회유하기 위한 대대적인 음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팔리 모왓 지음, 곽영미 옮김, 임연기 그림 / 북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소년에게 개가 없다는 것은 드넓은 대초원을 반밖에 즐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사뭇 감동적인 데가 있는 이 한 문장에 크게 공감을 한 이후에는, 왠지 꽤나 무덤덤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대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곳을 배경으로 하는 팔리 모왓의 가족 이야기는, 조금 별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머트의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인해 독특하고 흥미로웠지만, 뭐랄까, 자전적인 이야기와 동화의 경계 속에 위치한 탓에 나와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듯했다. 논픽션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약간의 상상력과 다소의 과장이 뒤섞이는 글에 공감하기에는, 내 감성이 그리 풍요롭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읽었던 팔리 모왓의 다른 책 <울지 않는 늑대>에서도 글쓰기 방식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와 유사했었다. 그러나 전자가 익숙지 않은, 그래서 인간의 일방적인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늑대'를 다분히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서 그러한 방식이 '효과적'이었다면, 후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개'를 대상으로 하면서 그러한 방식이 외려 조금은 '낯선 거부감'을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의별 개들이 다 있고, 내가 실제로 길러본 바 개가 종종 자신이 개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알지만, 아무래도 이 책의 주인공 머트의 행동까지 수긍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트는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였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개가 아닌 개'가 더 어울릴 정도였고, 그래서 심지어는 이 책이 주는 감동마저도 종종 작가에 의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직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력과 과장이 글의 재미를 위한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전하는 팔리 모왓의 따뜻한 메시지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팔리 모왓의 책을 읽는 이유로는 충분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원했던 내게, 이 책은 아쉬웠던 부분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퍼컷 - 신성 불가침의 한국 스포츠에 날리는 한 방
정희준 지음 / 미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나다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나온 경기를 나는 생방송으로 지켜 보았었다.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그러니까 나는 순전히 김연아 덕택에 약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유심히 지켜 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금메달을 땄을 때에는 확실히 조금 감동적이었다. 김연아가 경쟁자들에 비해 기술적으로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는 충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은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그냥 '금메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녀가 앞으로 혹 '메달권'과 거리가 먼 선수가 되더라도 그렇게 유심히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볼 일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섣불리 긍정적인 답변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물론 '한국' 국적을 지닌 탁월한 재능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낸다는 스토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금메달을 따낸 선수를 향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팬들의 열광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금메달'과 대비되는 까닭에 더욱 불편한 장면들도 이내 눈에 띈다. 이를테면, 환한 표정으로 환대를 받으며 돌아오는 '금메달' 선수들과, 그중에서도 유독 찬란히 빛나는 '세계 기록 보유자' 김연아 선수,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과 김연아의 미래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 그러나, 함께 올림픽에 참가했던,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외려 미래가 더욱 만만치 않을 그 많던 선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설마하니 그들은 캐나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나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스포츠가 소비되는 방식은 대단히 '反스포츠적'이다. '스포츠맨 정신'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한국에서는 승부와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 과정의 정당성과 가치는 간과되기 일쑤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과 권위주의는 성적지상주의에 대한 압력 하에서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고,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의 퇴로는 완전히 막혀 있다. 더욱이 당연한 수순처럼 스포츠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면, 이제 스포츠는 스포츠를 넘어 종종 '국가' 그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스포츠는 더 이상 즐거움이나 여가를 위한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놀이'가 아닌, 단지 '국가'를 위한 강압적이고 도구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포츠에 남는 건, 종래에는 그저 '금메달'이라는 이름의 '강박'일 뿐이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그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어려움이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대~한민국'으로 치환해버리는 데 대해 불편해 하는 저자는 이러한 '반스포츠적'인 현실에 대해 날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스포츠계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경기 단체, 팀, 지도자, 그리고 일부 기자들이 공고하게 얽혀있는 스포츠계를 '카르텔'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일종의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한국 스포츠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국가주의', '집단 몰입', 그리고 '폭력'을 들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그래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반스포츠적'인 장면들에 여지없이 '어퍼컷'을 날린다.

스포츠라면 종목을 막론하고, 아울러 非스포츠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저자의 글은 '어퍼컷'이라는 책 제목이 부끄럽지 않게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서 읽노라면 절로 통쾌한 마음이 들 정도인데, 이건 책의 소제목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언론의 박지성 장사, 그 불편한 진실>, <촛불 정국, 보이지 않는 스포츠 스타들>, <MLB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한국>, <올림픽은 개고생이다>, <한국 스포츠 최고의 명곡, "금메달 타령">,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등등, 소제목들이 시사하는 바는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고, 실제로 내용 역시 실명 비판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사뭇 공격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와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 그리고 다채로운 사례의 제시를 통해 저자의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한 자치단체장들의 노력에 대해 그 부당성을 논박하는 대목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모든 논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몇몇 대목들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또한 저자의 "들여다보기"가 지나치게 '반스포츠적'인 불편한 장면들에 집중되는 탓에, 도리어 그것이 그저 '스포츠'를 순수하게 '스포츠'로서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의 "들여다보기"는 '금메달'에 환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금메달' 뒤에 가리어진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캐나다 동계 올림픽에서 금빛 역주를 펼쳤던 쇼트트랙 선수들에 대한 환호 뒤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선수선발과정이 있었던 사례에서도 보듯, 스포츠계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저자는 다만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자고 역설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외려 스포츠를 순수한 스포츠로 남겨 두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