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다. 정말 오랜만에.. 하지만 이 영화, 볼 때마다 왠지 껄끄럽다. 그리고 섬뜩해진다. 19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미리 가 본 시대는 2029년이다. 지금이 2009년. 딱 20년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왠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아침 로봇에 지배되는 세상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게 된다. 나도 모르게 끄덕거려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라는 기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그 안에서 살아있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이 그리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 영화가 미리 가 본 시대에서는 만연되어지는 일이 아닐까?  환타스틱이라는 장르 자체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호러라는 장르 자체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황당할 것만 같은 냄새를 지독하게 풍겨대는 이 애니메이션에 시선을 고정시켜버린 까닭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고.  너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바람처럼 속살거린다. 사이보그가 살아숨쉬는 세상이 되기도 전인 지금 우리가 늘 외쳐대고 있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지금 우리가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아니 잊어가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이미 과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2029년의 이 영화가 되묻고 있는것만 같다. 그러니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러니 잊으면 안된다고 충고해주는 것만 같다.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잊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

네트워크라는 거대 정보의 정체성앞에서 우리는 왜 아나로그적인 정체성을 들먹여야 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전자두뇌는 2029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우리 곁에도 전자두뇌는 살아있다. 아주 작은 모습으로 내 손안에 가볍게 들어올 수 있을만큼의 무게와 크기로 나를 이미 점령해버린지 오래다. 아니라고 거부한다면 당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섬뜩하다.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해버린 상태이니 이미 내 안의 많은 것들이 하나 둘씩 나를 떠나고 있었을 것이다. 느끼지 못하는 아니 느끼기 싫어하는 그것도 아니라면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미세한 감정들이 이미 오래전에 나를 옭아매었을 것이다.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태되기 싫은 인간의 오만과 욕심. 동료의식을 느끼지 못하면 왠지 바보스러운... 어쩌면 바코드가 내 몸 어딘가에 찍혀져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참 많다. 기계인간이 되기 위하여 은하철도 999호를 타야했던 철이의 모습이 생각나고 너무나도 앞서버렸던 진화와 진보속에서 스스로가 묻혀버려야만 했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 풀썩풀썩 썩어버린 것들의 잔재들만이 날아다니던 오염된 세상속에서 다시 희망을 보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나우시카의 그 마음 하나뿐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도대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생명을 요구하게 되는 전자 프로그램 인형사의 그 욕심에 허를 찔린다. 사이보그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멈춰버리게 할지도 모를 바닷속을 잠수하는 쿠사나기의 그 공허감에 그만 허탈해진다. 전자프로그램이었던 인형사가 운운했던 자기 의지는 또 무엇일까? 다시 생명이고 다시 사람일바에는 우리 지금부터라도 나우시카의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다.  아이덴티티 identity .. 나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우습게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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