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골동품 상점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 불 곁에서 살아온 어떤 이에게 불은 이러한 존재다. '내 인생 전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뭘했을까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 밤.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으며 연말연시를 흘려보냈다. 매일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인데 찰스 디킨스라고 별다를 게 있을 리 없다. 영화 몇 편쯤 보고 싶어 목록을 정해뒀다. 이건 늘 하는 일이고, 지금 내 상태는 독서에 최적화 되어있다. 대신 다른 걸 했다. 밀린 빨간책방을 좀 듣고 밀린 애인있어요를 좀 보고 뭐 이것저것 신경 안 써도 될 것들을 신경썼다. 계획대로라면 크리스마스에 끝냈어야 했다. 성냥팔이 소녀 다음으로 크리스마스에 가장 어울리는 소녀 넬(넬리)의 파란만장史.

"불은 내게 책과 같단다." 그가 말했다. "읽는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또 그것은 음악이기도 한단다. 나는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타오르는 불은 자신의 함성 속에 또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 불은 자신의 초상화도 지녔단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에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불은 나의 추억이기도 하단다. 불은 내 인생 전체를 보여 주거든." (442)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하층민으로 대표되는) 빈곤과 가난, 악의와 선의, 순수와 타락의 대비를 융단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읽는다. 꽤 두꺼운데 무겁기까지 해서 얼른 끝내고 싶었는데 의외로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넬의 생사를 묻는 뉴욕 부둣가 얘기가 책 뒷표지에 실려있는데, 정말 그랬다. 유일하게 해리 포터를 떠올리게 하는 겨울 주인공. 소녀는 따뜻한 이불 속 부모 품 안의 행운을 누리지 못했지만 순수와 타락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어른들에게 큰 빛을 주고 갔을 것이다. 주요배경일 줄 알았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이 아주 잠깐 등장하고, 넬과 할아버지의 떠돌이 생활 중 만나는 모든 인물은 삶의 다양한 인간군상의 소재로 변신한다. 인형극단, 밀랍 인형 전시 마차의 부인, 도시 속의 화부, 선원, 작은 시골 마을의 교장. 만남과 헤어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인연들. 영영 날이 밝아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에게 주어진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순수한 키트(의 가족들)와 넬로 대표되는 선한 사람들/ 퀼프처럼 뼛속까지 악당인 사람/ 프레드와 스위블러처럼 힘겨운 삶에 적응하려다 실패하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 디킨스다운 인간군상이라 비교적 쉽게 선악이 구별된다. 아이라서 순수한 게 아니라 무언가 지켜낼 것이 있기에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쓰는 법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간절했던 할아버지가 실수를 하는 것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키트가 끝내 쉬운 길(악의 무리)과 타협하지 않는 것도 다 거룩한 동시에 마음이 아리다.

가족 간의 사랑과 애정이 고귀한 것이라면 가난 속에서도 그러한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살펴보기로 하자. 부자와 잘난 사람들의 유대는 세상이 만들어 주지만 가난한 자와 초라한 가정의 유대는 진실의 고리와 하늘이 맺어 준다. 아마도 좋은 가문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권력의 노획품과도 같은 주택과 토지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들에 대한 그의 연계는 자부심, 부, 승리의 연계인 반면, 가난한 사람이 과거에도 누군가가 살았고 내일이면 또 다른 누군가가 살게 될 공동주택에 갖는 애착은 그저 순수한 땅이라는 것에 더 깊은 뿌리를 둔다. 그의 가재도구는 은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여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피와 살 같은 것이고, 재산은 없지만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해진 옷을 입고 고된 노역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빈약한 식사와 초라한 바닥과 벽을 감내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받은 집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로써 보잘것없는 집은 신성한 장소로 거듭나게 된다. (378-379)

 

왜 그렇게 밤 거리를 걷는 게 좋았을까. 캄캄한 방에 북라이트 불빛 하나 밝힌 이불 속에서 자세를 바꿔가며 찰스 디킨스를 읽는 일은 19세기 어둑어둑한 거리를 정처없이 무작정 걸어다니는 일과 같았다. 길을 잃은 상태에서 시간조차 어림짐작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앞도뒤도 캄캄한 그 거리를 말도 못하게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인생의 마지막에나 겨우 맛볼 수 있을 열매를 한꺼번에 먹어버리는. 넬의 짧은 인생이 그토록 풍부했던 것도 작은 숙녀가 가진 무한한 긍정 에너지와 넘칠 만큼 가졌던 순수의 샘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홀로 빛나던 찬란한 마음과 눈동자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해 마지막날이 되어서도 결코 갖지 못한. 넬과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극중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 이 아름다운 비극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에 사는 넬이 심부름 갔다 길을 잃고 도움을 청해올 때, 그는 다만 밤과 산책과 도심의 불빛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다. 돋보기를 가져다대고 보는 일과 멀리서 보는 일 중에 무엇이 더 옳고 어느 편이 더 아름다운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밤은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여름이면 나는 이른 아침에 외출해서 온종일 들판과 시골 길을 거닐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집을 떠나 있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에 머물 때를 제외하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늘에 감사할 일이지만, 나는 도심의 불빛과 거리에 쏟아지는 그 빛의 경쾌함을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

 

건강에도 좋은 뿐만 아니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성격과 직업을 마음껏 추측할 수 있어서 밤 산책은 어느새 내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대낮의 눈부심과 분주함은 나처럼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햇빛에 훤히 드러나는 얼굴보다는 가로등이나 상점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행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면 편이 내 목적에 알맞다. 그리고 솔직히 상상의 세계가 완성되려는 순간에 여지없이 그것을 무너뜨려버리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12)

 

독서의 양보다는 질이라고 늘 말하면서 독서 계획 어딘가에 꼭 붙잡고 놓지 못하던 다독이라는 결심은 디킨스의 글 앞에서 아름다운 몽상 따위로 행해봐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다. 좋지 않은 시대에 사는 삶은 온몸으로 부딪쳐도 겨우 돌멩이 하나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2016년 첫 책은 시작이라는 거룩한 단어 앞에서만 의미가 있다. 매일 눈을 뜨며 시작이란 걸 하는 이에게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다. 무지개 스펙트럼 사이에 가시적 경계가 없듯 그날 밤 열두시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하루를 더 살고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읽은 책이 더 늘어나고 그리고. 한참 걷던 빅토리아 시대 런던과 지방 도시들,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사연들에 감사한다. 써먹을 수 있는 지혜가 하나 더 생겼겠지. 버릴 수 없는/오래된 습관 같았던 책으로 걷기는 이제 책에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주는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시간을 내어주는 데 무척 인색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게 별 거 아니듯. 다시 한번, 내가 책을 읽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얼 하고 있을까. 크리스마스에 닫아야 할 문을 이제서야 닫게 된다. 새해 첫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직 닫지 못한 문과 보내지 못한 손님. 되도록이면 모두 비우고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나는 끝내 이 애처로움과 안쓰러움, 먹먹함을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나선다.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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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01-0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넬이 할아버지와 여기저기 다닌다는 말을 보니 <집 없는 소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만화영화로 봐서 다 생각나지 않지만,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거기에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에는 괜찮아졌는지, 그건 잘 모르겠군요 예전에 한 만화영화(원작은 소설일지도 모르겠지만)에 슬픈 것도 있네요 어쩌면 비슷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여서 순수한 게 아니다, 가진 게 없고 어려도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잘 알았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키트도... 힘들게 산다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때는 더 많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요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나쁜 사람도 있었겠지만...

책으로 걷기, 어쩐지 멋진 말입니다 여기 조금 쓴 책 속 글을 보니 이 책은 천천히 걷듯이 봐야 할 듯하네요 넬과 할아버지를 따라서...


희선

아이리시스 2016-01-06 19:32   좋아요 0 | URL
희선님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때도 그랬고 이 댓글도 그렇고 정말이에요. 아마 제 글을 꼼꼼히 읽어주셨고 또 원래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일테죠, 새해 복 많이 받으셨죠? 벌써 새해도 한 주가 지나가는데 계획같은 건 더이상 세밀하게 세우지 않지만 몇 가지가 있는데 하루하루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게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데일리 다이어리에 한줄 쓰면 적을 게 없는 그런 거 말고. 아님 일기라도 써서 채우기로..( ˝) 체력이 약해서 빨리 심하게 지치는데 그래서 잠도 많이 자거든요. 잠도 좀 줄이고 책을 더 읽어도 좋고 전문분야 다큐를 좀 더 많이 보고 에세이를 써보고 또 정리 잘하고 버릴 건 미련없이 버리는 거. 새해에 비싼 향초를 샀어요. 원래 여기엔 돈을 안 썼을텐데, 꾀임에 넘어갔습니다-_-

매일 밤 켜고 은은한 불빛과 진한(!) 향을 느끼는데 독서할 정도로 밝은 빛은 못 되고요(다섯 개 정도 켜면 모를까@.@), 스탠드나 라이트를 따로 켜지만 세상이 더 고요하고 정적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거기도 춥나요? 날이 며칠 째 되게 춥네요. 이것도 느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해요 :)

cyrus 2016-01-0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라서 한때 이 책을 꼭 구하고 싶었어요. 알라딘 중고매장에 이 책이 있는 걸 알고 당장 가게로 갔는데, 다른 손님이 먼저 구입하는 바람에 허탕 친 적도 있어요. 이 책이 다시 나와서 다행이네요. 세련된 표지가 마음에 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아이리시스 2016-01-06 19:36   좋아요 0 | URL
중고매장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책이 생각외로 빨리 팔리는 싸이클을 가진 것 같아요. 저는 몇 년 째 보지 않은 책이라 몇 주 전에 팔러 갔는데 제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대부분의 책이 팔린 것 같더라고요. 초신간은 아니지만 몇 년 내에 나온 책이었으니 당연한 거였을까요? 중고매장에 오래된 책들도 많으니까요. 저는 오프 매장에서 책을 사보지는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책을 잘 안 사는 요즘 온라인 중고도 마찬가지네요. 어제 <히틀러1> 문자오던데 그걸 사고 싶어서 등록할 때와 지금의 마음이 참 다른 거 같아요. cyrus님도 곧 읽으시면 될테고, 저도 인사 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지금처럼 자주 좋은 글 올려주시고, 건강하세요. 올해도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요~^^

kgn0122 2016-01-09 14:04   좋아요 1 | URL
오해가 있으실 것 같아 답글 남깁니다. cyrus님께서 보신 책은 아마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골동품 가게 이야기>일 겁니다. 그 책은 100페이지 남짓한 이 책(오래된 골동품 상점)의 다이제스트판을 번역해 놓은 책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 다른 책이죠. 내용도 맞지 않고.

cyrus 2016-01-09 16:29   좋아요 0 | URL
To. kgn0122 // 그렇군요. 제가 말한 절판본은 완역이 아니었군요. 실물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책을 샀으면 낭패였군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16-01-07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7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