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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인문/과학/사회 신간 추천














제 1책 :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김민아 지음 / 뜨인돌



    염운옥의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에 이은 독서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다가, 마침 신간추천을 해야 하는 과제와 맞물린 책 한 권을 찾았다.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이다. 염운옥은 20세기 초반 영국 우생학 운동의 한 축을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도맡게 된 아이러니한 경위를 설명한다. 페미니즘과 우생학의 제휴는, 사실 맥락 없이 듣게 되면 우리에게 대단히 이상한 조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배경이 바로 장애에 대한 차별 의식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여성의 권리'가 전면에 배치됐고, 우생학에서 이미 가장 퇴화된 '인종'으로 취급된 장애우들에 대한 권리 주장은 당시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어 질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장애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는가? 마음 약한 내게는 장애우를 돕는 사람들의 용감한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하는 도덕적 비겁함이 있다. (이건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비겁함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앞날은 뻔하다.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쓸 권리가 없는, 하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근래 약자, 혐오, 차별 등을 주제로 한, 인문의 의무를 다하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김민아의 책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지난 달, 나는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를 했는데, 신간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도 오지 않았다. 적잖이 실망했음을 밝히고 싶었지만, 나는 성실한 독자이고 싶기에 보내준 두 권의 책에 대한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끝냈다. 보내주시는 분의 사정도 있을 테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자, 혐오, 차별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담은 책을 한 권씩 보내줬으면 한다. 구색이 신간'평가'단이지, 나는 우리가 신간'광고'단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독자다. 책을 읽고 그 주제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하는 위치에서 무슨 '평가'를... (나는 '서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책에 대한 나의 모든 글에는 '복기'라는 부제가 붙는다.) 그러니 이왕 10개가 넘는 리뷰들을 붙여 '광고'해줄 의도라면, 적어도 인문을 다루는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시대적 주제들과 도덕을 '광고'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런 책들을 보내 인문의 취지를 도드라지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제 2책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가와타 후미코 지음 / 안해룡, 김해경 옮김 / 바다출판사



    이 책을 '추천'한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할까 싶다. 저미는 마음으로 들여다봐야만 할 책인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그 책을 읽으면서 잊지 않게 된다. 저자 가와타 후미코는 21세의 어린 나이에 배봉기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고, 책을 냈다. 일본 여성이 바라본 위안부 문제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근래의 화두에 가장 닿아 있는 책이다. 언론에서 양심적 일본 지식인들을 여럿 보도해오고 있는 까닭에 가와타 같은 이들의 행보가 놀랍진 않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용기'라는 미덕에 있어서. 일본 사회는 지금 갈필을 잡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정부를 향한 불신에 장작더미들이 날아들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심적 판단이 화두가 됐다. 그럼에도 일본 주류는 여전히 보수이고, 그녀/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그릇된 역사를 강제적으로 주입받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正)을 수호하려면, 그 반대편에서 희생된 세대를 알아야 한다. 국가는 양심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철저하게 정치적 기업이다. 따라서 국민은 그에 저항하며, 기억해야 한다. "몇 번을 지더라도" 녹슬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기에, 인간 정신의 매듭은 풀리지 않는다. 놓지 말자고 다짐하자. 우리의 '정신줄'을. 사정이 있어 이 책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꼭 사서 읽어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벌써 저미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스베틀라나 읽기도 도무지 진전이 없다.)



















제 3책 :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이은희 / 한겨레출판



    위에서 무겁고 뜨거운 이야기만 했으니, 마지막에는 분위기를 밝게 바꿔본다. 잠깐 미술 이야기를 해보자.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서양의 전통에 따르자면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최종 후보는 좁히고 좁혀 세 명으로 압축시켜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전통에 따르자면, 그 셋 중 한 명이 거의 몰표를 받는다.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버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이 이름이 낯선 이들을 위해, 우리는 그를 또 다른 명사로도 부른다. 원근법. 원래 판화를 배웠지만 건축가로 전향한 필리포는 피렌체 세례당 거리에서 자신이 발견한 선원근법 측정을 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들 중에는 (다소 이탈리아적 과장이 섞여 전하는 바대로) 동시대의 화가 마사초가 원근법 구도로 그린 <성삼위일체>라는 벽화를 보다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진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원근법은 서양회화를 획기적으로 바꿨고, 당대 화가들 중 영민한 이들은 반드시 그 개념을 익혀야 한다고 직감했다. '파올로 우첼로'라는 화가는 얼마나 그걸 뼈저리게 느꼈는지, 식음을 전폐한 채 원근법 공부와 드로잉 실습을 하는 바람에 아내의 걱정을 샀다고 전해진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은 서양회화의 '위대한 눈'처럼 풍경을 보지 않는다. 예상 외로 우리는 원근을 거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정확히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각도도 매우 제한되어 있어 초점을 무수히 조정한다. 또한 욕망하는 것만 집요하게 쳐다보는 변태적(?) 습성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본다'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전회는, 우리처럼 생각하고 읽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전환인 것이다. 그래 봤자 어차피 일상으로 돌아가므로, 전회의 횟수와 강도가 중요하다.


    필명이 '하리하라'인 이은희의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우리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안경을 쓴다. 안경이 없으면 세상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보는 것'이란 무엇일까? 또한 미술을 공부한 나에게 '본다'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식으로 저마다의 의미를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과학 정보들 역시 있을 것이니, 여럿이 함께 모여 '볼 만한' 책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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