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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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나에게 있어 양서(良書)란 무엇일까? 많은 책을 읽은 것도, 문장에 능통한 것도, 혹은 저자를 비판할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조심스레 생각해보건대 나는 어떤 책이 ‘양서’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직감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책 읽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양서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 물론 몇 가지 대원칙은 있다. 건강하며, 균형 잡혀 있고, 사실에 충실하며, 또한 문장을 잘 다룬 책이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양서의 기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홍세화氏가 그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프랑스의 토론문화에 빗대어 비꼰 양비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일단 저울의 두 손에 동등한 무게의 의견을 올려 독자가 비교하게끔 하는 것이다. 어느 쪽에 자신의 타당한 의견을 보태어 저울이 기울어지게 할 것인지는 순전히 자기 훈련을 거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양비론이라고 해서 모두 건강한 글은 아니다. 홍세화氏가 비판한 ‘양비론’도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악취 나는 글’이다. 독자가 (회의론을 가져) 저울의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한 쪽에 의견을 싣는데 그것이 감정에 치우친 오만, 오해, 혹은 기만에 기초한 것이라면 저자는 실패한 것이 되고, 그 자신은 나쁜 저자가 된다. 여러 의견들을 비교해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수준의 지성들은 건강한 양비론을 먼저 접하는 것이 좋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원제를 풀이해보면 “신앙은 망상이다.” 정도가 된다.)>은 종교와 과학의 양쪽 입장을 모두 이해한 사람에게만 양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무조건 멀리하고, 자신의 자유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지상주의자들이 많이 양산되는 요즘 대중들은 ‘도발적인 의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킨스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도킨스 자신은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읽어 자신의 뜻을 헤아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종교를 바라보는 눈’이지만 세이건의 주장처럼 종교의 순기능을 대체할 개념은 인류가 여태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 고유의 기능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지상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과학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미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다. 과학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이들은 그들이 “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대립한다.”고 비난하는 종교의 태도를 바로 자신들이 취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맹목적 비난은 상대방을 거의 모를 때에 일어난다. 그리고 사실 도킨스도 과학의 모든 것을 대변하진 못한다. 일부 종교가 과학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처럼 일부 과학 역시 종교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이 책을 접하기 전, 나는 BBC 다큐멘터리로 도킨스의 의견을 미리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만들어진 신>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대학교에서 여름 계절학기를 들은 후였다. 그 학기동안 종교와 평화,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유익한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개신교도이지만 뮌헨에서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한 뒤 종교학자가 된 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해줬다. 그것은 칸트의 절대선과 연결되어 있다. 교수의 주장은 원래 종교들은 모두 궁극의 도덕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매개를 거쳐 왜곡되면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종교의 폐쇄성을 낳았고, 대체적으로 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우리가 믿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맹목적 논리와 수많은 정치, 외교, 역사적 변수들이 융합된 편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교수는 가령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맹렬한 역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가장 흔하고, 뚜렷한 흔적일 것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낮은 수준의 공방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근거로 <꾸란>이 폭력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 중 <꾸란>을 소위 ‘각 잡고’ 읽어본 이는 거의 없다. “알라는 유일한 신이다.”라는 구절을 그들이 읽는 순간 얼마나 큰 종교적 모욕감을 느낄지는 뻔하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지하드(Jihad)가 존재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독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마치 극우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남을 죽이지 말라. 하지만 그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면 죽여라.”라는 <꾸란>의 대목을 인용해 “미국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라고 비난하며, 미국과 기독교, 그리고 서구 전체를 동일시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오해는 대부분 남아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수는 나에게 모든 종교적 충돌의 역사는 ‘무지(無知)’로 쓰였다고 가르쳤다. 하물며 종교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종교 경전들이 뜻하는 바를 자기 식대로 판단하기에 바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고귀한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웃’을 고르는데 열중인 종교인들로 변질되었다. 간디나 마더 데레사,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처럼 예수의 뜻을 제대로 판단하여 직접 행동에 옮긴 사람은 드물다. 예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잘못한 것일 뿐이다. 

  나는 집안의 내력에 따라 가톨릭 신자이지만 내가 알게 되어 많은 깨달음을 얻은 종교는 불교이며, 나를 굽혀 신을 믿기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지닌 겸손한 진리추구의 자세로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끊어짐이나 비약 없이 연결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강요된 ‘진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번복과 수정이 가능하다. 거의 매번 바뀌는 믿음의 요동 앞에서도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 위안을 얻기도 한다. 자기 판단은 끊임없는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물론 세이건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한 말처럼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은 대단히 편향적인, 상대적인, 그리고 비전문적인 존재가 된다. 특히 유일신이 그러하다. 나는 선민사상을 매우 저급한 태도라 본다. 그것은 사상적 우생학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근거 역시 내겐 없다. 진화론을 배웠고,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우주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도킨스의 말마따나 설계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신이 없다면 어떻게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생겨났겠느냐는 이론 말이다. <Book of Life>, 소위 ‘생명의 서(書)’라 불리는 아미노산 조합방식(유전정보) 중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단 20개의 아미노산 조합방식만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많은 형태의 생명체들이 다양한 지구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나머지 44개를 다 사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궁금해 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를 설계한 지적 존재의 초월적 ‘현존’을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래의 가설임에도 ‘낡은 가설’의 새로운 도전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낡은 가설’이란 최근 들어 재조명된 바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2009년은 <종의 기원>이 15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설계논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근거로써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도킨스가 인용한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말처럼 “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오랜 관념들은 “신이 왜 그랬을까?”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다윈의 편을 끝까지 들어준다. 

  여기에 온건한 칼 세이건도 한 몫을 보탠다. 그는 과학은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하면서 사실 복잡한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도킨스도 같은 말을 한다. “무엇인가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고 그냥 선언하지는 말라. 세세한 사항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거나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양자적 입장을 또한 밝힌다. 과학의 입장에서 교조적으로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일까? 과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고, 혹시 또 모를 ‘환원 불가능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정적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건강한 태도이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해박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만약 진정 그렇다면 여전히 “나는 모른다.”라며 무지로써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 그것을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 증거로 만들어버린다. 

  종교인들 중 일부는 매우 개방적이며, 여러 가능성의 뜻과 다양성의 공존을 이해하기 때문에 내가 종교에 대해 마땅히 거부감을 느낄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 사고와 면밀한 관찰을 지향하는 나에게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매우 봉건적 사고, 혹은 전근대적 사고로도 충분히 비춰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론자들의 논리가 진화론자들의 근거 앞에서 몇몇 무너진 사례들을 보고 즐거워하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양비론은 특히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순기능을 추려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창조론자들은 ‘신’에 집착하지만 그들의 종교에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집착은 지금껏 인류가 저지른 (잠시 푸코를 빌리자면) ‘광기의 역사’를 다시금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맹신주의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과학은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명백한 근거로써만 가설을 세우고, 사유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되, 지나치게 자연에게 자신을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 사유에 있어 일모의 오만이라면 범하게 된다면 공존관계는 다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연과 공존하자.”라는 말은 서양의 과학계보다 동양의 종교계가 수 천 년은 앞서 주장한 바이다. 

  종교인들은 읽기 거북스럽겠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라는 챕터는 종교인들이 알아야 할 종교의 이면이 여과 없는 표현으로 실린 대목이라 이 책의 가장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교의 역사 중 (나는 몇몇 사람들의 주장처럼 ‘거의 모든 역사’라 부르진 않겠는데) 일부가 비도덕적 행위로 쓰였다는 것은 어린이 역사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전쟁, 코소보 내전, 9.11테러, 체첸 내전. 그 중 나는 개인적으로 체첸 내전에 대해 평소보다 심도 있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어 종교전쟁의 형태들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종교 근본주의가 지닌 엄청난 파괴력을 알게 되었다. 급진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에서 ‘도덕’을 쏙 빼놓고 얼마든지 ‘근본이 아닌’ 사상으로써 사람들을 매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듯하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유전적 ‘도덕문법’조차 매도한다. (흔히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난 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진화론자들은 “도덕도 유전된다.”는 주장으로 설명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이어 ‘이타적 유전자’로써 말이다.) 그리고 종교인들의 도덕과 진화론자들의 유전적 ‘도덕문법’에는 차이가 없다. 즉, 도덕은 하나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오독과 극단적 행동은 그들이 종교를 들먹거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교는 도덕과 같다. 하지만 일부 오해된 도덕을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문제이다. 만약 도덕이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된다면, 쉽게 말해 “신을 믿습니까?”라는 투의 “믿으라.”라는 강요로써 주입된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표현대로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궁지에 처하게 된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선할 수 있다.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킨스의 논리이다. 

  종교에서 도덕을 제거한 형태의 처사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차라리 종교를 버리고 도덕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세이건처럼 아직 종교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아직까지 내가 보기에 종교와 과학, 이 두 거인은 서로 비교되어 인간에게 최상의 도덕을 상기시키기 좋은 짝꿍이기 때문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원작자 댄 브라운은  한 추기경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현대적 진리 하나를 알려준다. “과학과 종교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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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

종교가 없어도 도덕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저도 동의해요. 저 또한 그러니까. 신이 무서워 나쁜 일을 안한다거나 좋은 일을 더한다거나 이런 게 일련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드물기도 하구요.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 이게 대다수라고 생각해요. 타종교도 마찬가지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만 조금 읽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종교나 과학은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어쩐지 이론이 뒤섞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껴둔 건데..( '')

오늘 하루 굿 데이^-^

탕기 2011-11-22 17:09   좋아요 0 | URL
종교와 과학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일단 세이건의 책을 읽고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논리적이면서도 온건한 태도로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거든요. 도킨스는 강한 문장을 자주 쓰기 때문에, 신심이 굳은 사람들에게는 비판이 아닌 공격처럼 비춰지기도 하죠. 아이리님도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2011-11-23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