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대신 그날 받아온 '영수증'을 모아둔다. 영수증은, 물건을 산 기록일 뿐이지만 그걸 들여다 보고 있으면 내가 하루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들을 것, 그리고 기타 등등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가계부도 쓰다 말다 하지만은, 이 영수증 모으기는 한번도 그만 둔 적이 없다. 2003년의 영수증을 월별로 정리해 놓고 보니 나는 참 많은 것을 샀고, 그 중 어떤 것은 샀는지 어떤지도 기억 못하지만 어쨌든 그 물건들과 더불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건들의 기록, 영수증을 볼 때마다 소름끼친다. 내가 기록하지 않아도 나의 일상은 여기 저기에 기록된다. 카드회사에서 매달 보내주는 카드 사용명세서에, 주거래 통장에, 맥스무비와 CGV 상암에 내 기록은 있다.

물건이 혼자서 나돌아다닐 수 없듯, 나는 새로 산 물건이나 문화상품을 들고서 서울의 수많은 길거리를 나돌아다녔다. 공연표와 갤러리 입장권은 영수증 외의 정신나간 증표. 월별, 날짜별로 정리된 사진 폴더, 싸이월드의 미니룸, 까페... 기타등등, 기타등등.

흩뿌려진 수많은 기록 앞에서 그만 아연해진다. 도대체 뭘 이렇게 많이 한거야? 도대체 물건을 왜 이렇게 많이 샀지? 아,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을 나는 뭐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다. 거의 대부분 집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에 번쩍, 동에 번쩍 하면서 1년을 산 것만 같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괴력의 소녀인 것만 같은. 그러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다시금 자기반성에 젖어드는... 지금은 기록된 이 모든 것들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내년에는 지금보다 기록이 더 적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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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바람 2004-01-1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글을 읽고 반가웠습니다. 코멘트를 달까 말까 하다가 하루 지나서 다시 왔습니다^^
저도 연말에 서랍 한 켠에 차곡차곡^^ 모아둔 카드전표, 공연.영화표 들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나 많이 소비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에 잠시 까마득했었거든요. 매일 무언가를 돈주고 사고 또 사고 어느새 지갑에 영수증이 수북해지고. 돈 주고 사지 않으면 즐겁지도 못하고 뭔가를 누리지도 못하나 싶었습니다. 돈으로 사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하나씩 더 만들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얘기드리면, 재작년에 이삿짐을 꾸리다가 한켠에 수북히 쌓여있는 비닐봉지들을 한장한장 펴다가 정말 경악을 했습니다. 수퍼에서 음료수 몇 개를 살 때도 비닐에 담아들고 오고 했는데 그렇게 자잘하게 물건들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1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비닐을 쓰고 살았더라구요. 그날 밤 비닐봉지들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 날 이후로 되도록이면 그냥 들고오거나 가방에 넣어오거나 꼭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4-01-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따라 용돈기입장이나 가계부의 필요성을 새삼 느꼈는데, 전에 본 이글이 생각나드라구요...저는 '아, 영수증이라도 모을껄 그랬나'라는 기분이지만. ^^ 제 서재로 퍼갈께요~~

요다 2004-01-1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물음표 님, 앤티크 님. ^^
얼마전 나온 <정신과 영수증> 이 책에도 관심 있으실 것 같아요.
정말 '영수증'으로 쓴 책인데, 페이지가 헐렁헐렁해서 서가에 서서 읽어보심 딱입니다.

비로그인 2004-01-1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담에 한번 봐봐야겠네요...추천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