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무한 허공의 세상맨 몸으로 눕고맨 몸으로 일어서라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과거를 기억하지 말고미래를 갈망하지 말고오직 현재에 머물라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그리고는 침묵하라다만 무언의 언어로노래부르라언제나 들풀처럼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외눈박이 물고기처럼사랑하고 싶다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외눈박이 물고기처럼그렇게 살고 싶다혼자 있으면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한 잎의 여자 1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야자.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섬 묘지 -이생진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 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