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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매춘부라 하였다. 당시의 파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비의 심장부이자 중심지였기에 가능한 표현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도 소비가 중심인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 표현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끊임없이 무엇이든 생산해 내고 팔아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형성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심장부가 파리라 한다면 대한민국은 단연코 서울이다. 서울의 모든 삶이 소비라는 수레바퀴로 굴러가고 있고 현대 사회에서 소비는 생존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경제학자인 류동민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가 아닌 '정치경제학'의 서울을 재조명한다. 주류 경제학에서 서울은 자본과 노동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정치경제학의 서울은 소비라는 패턴으로 얽혀져 있는 생활의 터전이라는 공간의 총체적 재현이다. 이러한 공간의 개념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같은 맥락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울은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가 지닌 아케이드'이다. 저자는 서울에 침투한 자본의 욕망을 읽고 대형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놀이공원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상에 물신의 지배를 읽어내며 삶이 어떻게 소진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자본의 힘이 삶을 착취하는 한편으로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이중성을 가지듯이, 공간에 대한 낭만적인 재현도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요구인 동시에 지배 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는다. 공간의 총체적 재현,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그 목표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것이다. -p27

 

 한국의 주거문화를 선두하고 있는 아파트, 언제부터인가 민주적공간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타벅스,상품 물신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이나 코엑스물, 자본에 장악된 놀이공원, 대학 캠퍼스, 대형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을 정치경제학이라는 색다른 지평으로 읽어내는 가운데 저자는 이러한 공공장소가 지닌 의미가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생성되고 있음을 간파해 낸다. '공간' 이 지닌 의미는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그 공간이 또다시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만들어나가는 경제구조를 창출한다. 모든 것이 소비라는 시스템에 기인하듯, 고갈되지 않는 소비에 대한 욕망은 공간의 의미를 재편집한다. 스타벅스가 현재의 민주적인 공간을 대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의 변화에 따라 스타벅스가 상징하는 의미는 변화되고 또 다른 상징이 그 공간을 대체하는 것처럼 하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는 소비의 패턴이고 그 소비의 중심에는 자본이 있다. 서울은 이렇게 수많은 욕망과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유동의 공간이다. 

 

애초에 인간이 만들었으나, 어느덧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 정확하게 물신의 정의이기도 하다.

 

자본이 국가의 자리를 대신하는 듯한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국가가 능력주의의 후원자일 거라는 환상 때문에 방해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국가는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여 할 때조차 자본의 은유를 빌리곤 한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주로 억압적 국가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제는 자본의 지배, 국가의 틀을 빌린 자본의 통제 혹은 자본의 언어로 말하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시간 구조를 뼈대로 삼아 형성된 서울의 공간적 구조를 구별 짓기와 추격의 과정,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과 실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로 귀착된다.p199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시초 축적'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저자는 보들레르가 지적한 것처럼 '매춘'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면 현재의 서울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지기 까지 사람들의 욕망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쉬운 예로 '시초 축척' 이라는 신화적 의미를 대입하고 있는데 쉽게 말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판타지가 통용되지 않는 이유를 '자본'에서 찾고 있다. 대학가에서나, 백화점에서나, 교회에서나 자본이 전공과목의 유용성을 평가하게 된 것처럼 자본이 능력이고 자본이 곧 종교가 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는 자본만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자 능력이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자본이 물신이 된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 하듯이 서울은 인간의 욕망을 팔아 도시를 완성한다. 비약적인 발전으로 서울은 현재에 근대를 품고 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 불리기도 하였지만 서울이라는 도시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는 '배제의 원리'에 있다, 자본이 삶을 착취하지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도 자본이다. 이러한 자본의 이중성은 발터 벤야민이 말하였듯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와 같은 아케이드 서울이다. 

 

읽으면서 작년에 읽었던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다르지만 본질은 같았다.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프레임에서의 공간이라면 이 책은 실천적 공간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이라는 프레임이다. 류신의 서울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기억되는 공간 재현이었다면 경제학자 류동민의 서울은 삶을 이루고 바꾸며 살아가고 있는 공간 실천의 서울이다. 같지만 다른 느낌의 서울,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시간 축과 공간 축이 서로 얽히면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하였듯이 정치경제학으로 살펴보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속에서 재현되는 삶의 또다른 모습이다.(재현공간)     

 

나의 기억을 자기중심적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을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폭력적 재현, 내가 믿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 대안적 재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다. 공간을 마음속에서 재현하는 것, 공간에 얽힌 시간을 기억하는 것, 그에 기초하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이 모여 우리가 사는 공간을 바꿔나간다.-p284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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