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정호승 시인은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어쩌면 여행이라는 말보다 ‘순례’의 정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생의 간절함을 뒤늦게 발견하고 후회와 회한을 달고 사는 나이가 되면 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더 그리워지는 법이다. 마치 바쁜 일상에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마음의 허기를 발견하는 일과도 같이 순례란,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마음의 여행인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해럴드 프라이는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은퇴한 뒤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해럴드에게 날아온 옛 동료 퀴니의 편지 한 통으로 홀린 듯 길을 나서게 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된 그의 여행길.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실제로는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기도 한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소녀와 첫 만남을 시작으로 하여 해럴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해럴드는 살면서 포기해버린 모든 것을 생각했다. 작은 미소, 맥주 한잔하자는 권유, 양조 회사 주차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그가 고개 한번 들어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 지나쳐 버린 사람들. 이사 간 곳의 주소를 챙겨 둔 적이 없는 이웃들. (중략)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가 뭔가 하려는 순간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인가? 삶의 모든 조각들을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자신이 무력하다는 깨달음에 짓눌리는 바람에 그는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집을 나섰다. 단순히 옛 직장 동료 퀴니를 만나기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 내면으로의 진정한 여행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용기를 낸 해럴드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걸어야 하는 길은 영국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000킬로미터나 되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 위에는 그동안 잊고 지나쳤던 해럴드의 아픈 기억과 상처들이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 사랑해주지 못했던 아들과 어긋나기만 하였던 모린과의 일상들이 때로는  해럴드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며 자신의 상처를 짐짝처럼 등에 둘처매고 걸어야 했다. 걷는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 고독과도 같다. 그의 여정에는 온갖 슬픔과 고통이 들러붙어 해럴드를 울게 하였다. 그렇게 괴로운 순례길에서 만난 이웃들은 해럴드의 짓무른 발을 치료해주고 깨끗한 침대에 재워주기도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우연히 사진에 찍혀 유명인사가 되면서 순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해럴드는 퀴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되새기며 포기하지 않는다. 해럴드의 첫 시작은 엉성한 노숙자의 모습이었으나, 걸으면 걸을수록 해럴드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찾아 가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가게 된다.

 

그의 발바닥은 땅을 딛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상처를 딛는다. 때로는 상처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그렇게 움직이는 마음의 역정이 실제로 땅을 걷는 길고 힘든 역정에 조응한다.

 

삶의 다채로운 모습이 해럴드의 순례길에 아롱진다. 삶은 희로애락의 무늬가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짜여져 가며 하나의 무늬를 완성해간다.  해럴드의 순례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삶의 조각을 가지고 해럴드의 삶의 무늬를 짜주고 있음을 볼 때 , 그리고  해럴드가 마주한 진실의 한 조각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였다. 게다가 아들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삶의 틈새를 메꾸어준 유일한 동료 퀴니의 마지막을 지켜주기 위한 해럴드의 순례길은 어쩌면  성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 숭고함이 배여 있는 듯 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다른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럴드의 순례길은 자신의 마음을 떠난 여정이기도 하지만, 삶에서 다른 눈을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순례의 여정에 동참하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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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1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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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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