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선택으로 시작하여 선택으로 끝난다.(여기서 선택은 개인의 자유(wiil)와 같다.) 이런 선택의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은 아무래도 ‘정의(선)’가 아닐까 한다. 사전적인 의미의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이라 하지만, 선택을 할 때 이미 우리의 행동은 ‘자유(will)’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의는 우리 내면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도덕성’에 근거하는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이들은 선택에서도 ‘바르고 곧은 것’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이 사이코패스로 열연한 <악마를 보았다>에는 정의로운 한 남자(이병헌)이 등장한다. 남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이코패스(최민식)에게 납치되어 성폭행 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남자는 사이코패스(최민식)을 찾아 따라다니며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수한 이 남자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감정이나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를 모른 척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공리주의 측면에서는 어쩌면 이 남자(이병헌)은 ‘정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사이코패스(최민식)의 자유권을 침해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국가가 개입하여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는 것처럼, 설령 사이코패스라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렇게 사회는 점점 도덕이나 정의가 복합화 되어 가고, 사회의 구조 역시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의’는 추구하기 힘든 , 도달하기 힘든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극단적인 예는 영화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널려있다. 오늘의 메인 뉴스에는 ‘엄마에게 뺨을 맞은 9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 가 대서특필 되었다. 기본 테제로서는 엄마이자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를 혼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여지지만 안티테제로는 아이의 사생활 침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으로 볼 때 사건의 심각성은 현재의 정의가 봉착한 딜레마가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뉴스라는 점이다. 위에 말했듯이 정의란 선을 지향하는 내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법이란 불법적 행위를 금하는 외적 명령이다. 바로 이 내적 명령과 외적 명령의 선택영역에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의 미덕을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법은 미덕에 관한 서로 다른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다. 누군가에게는 옳은 것이 누군가에는 그른 것이 될 수 있는 사회의 ‘정의’라는 것, 마이클 샌델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면 고대의 정치철학사와 근대의 정치철학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미덕에서 출발하는 고대의 정의론과 달리 자유로 출발하는 근현대의 정의론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론은 현대의 자유주의의 사상적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공리주의의 벤담과 밀의 사상적 차이와 칸트, 롤스의 정의론까지 체계적이며 실질적인 예들로 정의를 짚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에 흔들리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 삶에 선택을 하는 것처럼, 인류의 생존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나쁘고 악한 것이라고 규정해왔던 것들이 언제고 '정의(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시장사회에 접어들면서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분리되어 불평등이 심화되어가는 것처럼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내적 명령인 양심 '바르고 곧은 것'의 의미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갈 것이다.  정의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바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추구해야 할 '공동선'이자 정의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간만에 가슴 떨리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이 한참 베스트셀러였을 때, 나의 독서수준은 초등학교 수준이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사두고는 선뜻 읽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정의의 한계>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나니 조금 용기를 얻어 펼쳐보게 되었고 다 읽고나서도 아쉬움이 남아  EBS 강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책으로 읽는 것보다 더한 감동이 느껴졌다.  강의실 가득 메운 학생들과 대담하는 마이클 샌델의 자신감이 넘쳐나는 말투에서 왠지 정의라는 것은 스스로 확신하고 확언할 때 더욱 견고하게 굳어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thinking)에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미덕과 최선의 삶에 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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