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잘 지내고 있지? 난 한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아. 이제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부라는 목적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마치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때마다 떨어진 내 생명의 일부들이 땅위에 떨어져 뒹글때마다 느꼈던 아픔과 외로움처럼, 이제까지 나를 스쳐갔던 인연들 중에 좋았던 기억보다 아픈 기억들이 더 많이 느껴져. 그리고 그 인연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목적어 ‘전부’를 사랑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한 것도 그 목적어 때문이었어.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 조금만 사랑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너 기억하니? 내가 너에게 보냈던 무수한 편지들을, 그런데 넌 한 번도 답장해준 적이 없었어. 이 책 <너 없는 그 자리> 소설을 처음 본 순간, 네가 떠오른 건 편지 때문이야. 답장 한 번 받지 못하고 쓴 여자의 편지를 본 순간 네가 자연적으로 .. 당연하다는 듯이 떠올랐어. 한때 내가 사랑했지만 잊혀 진 것들, 한때 미워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애틋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너’ 때문에...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여러 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져 있는 소설들은 모두 우리의 만남에서 비롯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야. 이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생을 관통하는 불가항력적인 데스티네이션을 느끼게 된 것 같아. 이 책의 표제작 <너 없는 그 자리>는 너무도 친근한 말로 시작해 . 당신 잘 지내지? 하는 애정 듬뿍 담긴 이 편지를 읽으면서 여자의 전부는 사랑이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야. 여자는 편지에 “당신 방으로 스며드는 아프리카의 꽃향기로 변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몸을 내주고 꽃이 되고 싶어요” 썼어. 넌 누군가에게 꽃이 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봤어?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남자는 정말 행복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그런데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외국으로 떠났다는 것도 거짓말을 한 거야. 참 웃기지 않니?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몸서리치게 싫은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이상했어. 그 남자에게 여자는 한 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너도 그래서 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그때 왜 너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사랑도 때론 착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알게 된 걸까?
인생은 참 이상해요. 언제 등 뒤에 감춘 도끼를 치켜들지 아무도 모르죠.
그래 나는 너를 지금도 생각해. <한갓되이 풀잎만>에서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와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이야기야. 나는 배신을 한 번도 당해 본 적은 없어. 아니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믿는다는 말은 상대방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뜻이잖아. 신뢰한 적이 없으니까 배신도 당한 적이 없는 거야. 그렇다고 날 너무 냉정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너무 잘 믿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막을 친 것뿐이니까. M과 사내커플이었던 여자가 M의 약혼을 직장상사에게 듣게 되는 그런 심정을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은 심지어 여자를 스토커로 몰아세우기 까지 하는 남자M. 배신당한 여자의 선택은 배신당한 남자를 만나는 거였어. 여자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두 가지 밖에 선택이 없었다고 하는데 , 누가 그러더라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으로 먹고 사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남자에게 배신당했어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마 그때의 나와 너는 나란히 서 있는 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나란히 서 있다가 어쩌다 분 바람에 살랑 실이 한 번 꼬이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배배 꼬이게 되는 것처럼 꼬여버리듯이 우리의 인연은 미풍에도 이어질 수 없었던 가느다란 실이었던 게 아닐까해.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던 삶의 편린들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기분이야.
아주 사소한 꼬임, 한순간 외틀어진 마음이 한평생을 꼬아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북촌>에 나오는 커플들은 조금 이해가 안 돼. 여자의 사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그 화풀이를 세상 모든 남자에게 자신을 버리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굳이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면서 치료하려는 방식은 오히려 자신을 더 아프게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아. 나쁜 남자에게 도망치다가 우연히 북촌 한옥마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남자를 만났는데 비록 이 남자가 가진 것은 없지만 성실하고 진실 된 사람이었어. 여자의 과거 따위에는 관심은 없지만 충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착한 남자 축에 속하는 그런 남자였어. 그런데 여자는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다시 돌아오자 착한 남자를 농락하지. 맞아 농락한다고 해야 맞는 말 같아. 그런데 이 남자. 여자의 농락조차 이해한다. 참 사랑이란 아이러니해. 근데 난 이 남자한테 사랑이란 목적어가 필요 없는 관계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 같아.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면 그것으로 족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사랑인가봐.
<그리고, 축제> 참 제목이 근사하지 않니? 삶이 축제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더 놀라운 건 이 단편의 주인공은 축제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삶이야. 단지 축제와 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여자가 늘 옴 샨티 샨티 샨티 옴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겠어? 여자는 아직도 어렸을 때 꼬마시절 도시에 사는 숙모네 부푼 마음으로 놀러간 시골아이의 마음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은 채 살고 있어. 마치 그 시간이후로 마음은 멈춤이 되고 몸만 어른이 된 것처럼 말이야. 어린 시절의 설렘이 지독한 감기로 변하여 평생 옥죄는 괴로움으로 살기 때문이야. 그런데 말이야 발리에서 일어난 참사를 본 뒤에야 자신의 아픔이 여름감기에 불과한 것을 깨달아. 맞아. 때론 설렘이 계절이 바뀔 때 찾아오는 감기로 변하는 순간이 일생에는 수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그건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 옴 샨티 샨티 샨티 옴
<감히 핀 꽃> 은 사연 많은 집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이 말이 너무 많아. 꼭 내가 아는 사람과 똑같아.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왜 아줌마들은 자기 말만 하는지 모르겠어. <금빛날개>에서도 마찬가지야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집의 남자 역시도 자신이 쌓아 온 견고한 벽 때문에 타인의 말을 듣질 않아. 마치 자신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을 것처럼, 동창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도 자신만은 피해갈 것 같이 완벽한 안락과 평온함을 꿈꾸지. 그리고 그런 삶을 아들에게도 똑같이 강요하고, 그러나 뜻하지 않게 찾아 온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 남자는 비극이 언제 든 다가오는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 운명의 잔인함과 가혹함의 모습처럼. 우린 그런 운명의 잔인함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봐.
<꿈길밖에 길이 없어>의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 “선생님, 저는 왜 미쳐지지도 않는 걸까요?” 이 말 참 재밌지. 미칠 만큼 절박함 심정에 빠져 본 적이 있어? 삶의 모든 신경세포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행위가 때론 자신을 삶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던 이 남자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갔다가 병세가 호전되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선 한 말이 왜 자신은 미칠수도 없는지 의아해하는 이 질문은 정말 너무 처절하지 않아? 결국 이 남자가 일상에 돌아와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어. 죽거나 미치거나, 차라리 미쳤더라면 이 사람은 그냥 살았을까?
고개만 돌리면 환한 햇살인데,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해 그늘에 갇혀 있어야 하는 날들이 있다.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는 것이 삶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네가 그렇게 떠나고 난 뒤 나는 늘 죽음을 생각했어. 너 없는 빈자리가 내게는 그처럼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 어쩌면 그것은 운명이라는 불가항력의 힘 이었을 거야. 고개만 돌리면 환한 햇살인데 그 고개하나 돌리기가 무척 오랜 세월이 걸렸지. 너 없이도 가능한 삶을 살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사랑은 목적어가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레 이 소설을 만나서 다시 상기하게 되었어. 마치 처음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어린 시절 늘 함께 했던 너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흐트러진 파편을 주워 소설과 함께 너를 기억해보는 것은 미안하지만 너를 지워내는 작업과도 같았어. 어차피 그때 나는 너를 목적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번번이 어긋나던 관계로 나는 많이 아파해야 했어. 그래도 너로 인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아마도 이 편지가 네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오래 전 사랑했던 너를 기억한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지난 날을 보상받은 기분이야.
잘 지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