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 사월의책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컨버저노믹스>의 저자 이상문박사는 우리가 현재 제 4의 물결, 즉 융합이라는 거대한 흐름속에 있다고 하였다. 해아래 새 것이 없다 하듯이, 유사 이래, 인류의 진보는 기존의 성과를 새롭게 결합하여 얻어낸 산물이었다. 혹은 기존의 것을 제거하고 파괴함으로써 창조를 이룬다는 슘페터의 원리도 이러한 관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제 융합이라는 거대한 흐름은 경제만이 아니다. 이제 융합은 사회,경제,문학,심지어 과학에서조차 융합으로 승부해야 하는 시대이다. 이제는 한 분야로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설명할 수 없어졌다. 나비의 잔 날개 짓이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고 잔잔한 물결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해일로 변하여 재앙이 되는 우리를 둘어싼 세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융합은 필수가 된 듯하다.

 

이런 융합의 새로운 학문으로  과학인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브뤼노 라투르의과학인문학 편지는 총 6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독일 여학생이 강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여섯 통의 편지로 자신의 강의를 요약하여 과학과 인문을 친절하게 강의해주고 있다. 

 첫 번째 편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를 시작으로 과학인문학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는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면서 부수적으로 엮이게 된 인물들의 심리와 정치를 유추한 뒤 과학과 역사의 확실한 경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설명하며 역사 속에서 과학을 분할해내지 못함을 역설하고 있다. 인문학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한다면 역사속에서 과학이 항상 존재해왔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역사에 과학이 항상 존재해왔음에도 역사만이 기록되어지는 오류가 빈번히 발생해 왔음을 여러가지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과학이 없는 인문학은 이전에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 할 수 없다고 한다.

 

 저자는 또한 철학, 상식, 교수들이 '과학인문학'을 논할 때 수사학과 과학 가운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관해서도 과거 르네상스시대 적도를 넘어가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철학자들의 예를 들면서 오히려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논쟁적인 정의들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과학인문학'은 이성의 길들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모순은 과학을 한꺼번에 의존성과 자율성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게 했습니다.

두 번째 모순은 동일한 역사를 거대한 해방의 이야기와 점점 더 긴밀해지는 밀착의 다각화로 파악하게끔 만들었고요. 마지막으로는 세 번째 모순은 우리로 하여금 증명과 수사학이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인 양 믿게 했지만 사실 그 구분에는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었지요. -p122-

 

저자는 이렇듯 기존의 과학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며 과학혁명의 역사를 새로 써야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가 주는 사상적 명제는 인간의 관념이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상만이 존재한다는 근대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세계관에서 더 나아가 코기카무스’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한다고 한다. 이 코기카무스의 사고는 우리를 이성으로, 사물로, 물질로, 실재론으로 이끌어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줄 것임을 확언시킨다.

 

  사실의 영역과 소란스런 담론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가르는 구획으로는 이 문제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에서는 아무것도 연역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요. 하지만 코기타무스’(우리는 생각한다)에서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계량하고, 계산할 세계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지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고로 우리는 구성해야 할 세계로 함께 들어갑니다. 나는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들이 정말로 다시금 흥미로워졌다고요!”-p199

 

 

이 책의 원제는 ‘Cogitamus’(우리는 생각한다)이다. ‘Cogito’(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세계관이 지배하였던 사고가 낳은 모순을 폭로하며 과학기술적 산물의 무한증식을 낳아서 결국 오늘날의 생태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위기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하이브리드의 무한 증식이 아닌 온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과 행위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며 라투르는 이를 비근대주의라고 부른다. 기존의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를 생각한다는 결국 인문학적 사고의 귀결이다. ‘라는 일인칭에서 우리라는 대명사의 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 사유로 느껴진다.  과학과 인문이라는 하이브리드 사상은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개인이 아닌 공통의 삶을 영유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를 제안하고 있다. 브뤼노 라투스의 과학인문학편지는 마치 먼 나라에서 누군가 보아주길 바라며 유리병에 넣은 비밀의 편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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