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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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끝없는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욕망을 마주해보면 ‘자아’의 욕망이 아닌 타인에게 길들여진 욕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 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 무수한 유혹과 욕망이라는 그물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끊임없이 욕망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이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빚 대어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도시를 매춘부로 묘사하였으며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시대로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함이다. 점점 물질이 종교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종교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은 행복을 잃고 배회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대체 이 미친 인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아나 보자는 열망 때문이다.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행복의 경고』에서 이런 현대인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사고로 행복에 대한 본질을 탐구 한다. 최근의 세계적인 석학들의 모임인 엣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데미안 허스트의 미술작품까지 무척 폭넓은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1장 <육체의 갈망>에서 욕망이 원하는 모든 종착점은 행복으로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며 욕망=만족=기쁨=행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여 왔지만, 저자는 이  논리의 연결 마디마디가 명백히 거짓이다라는 것으로 행복의 경고는 시작된다. 

 그 거짓인 것에 대해서 저자는 여러 가지의 연결 마디를 찾아보는 과정을 무척 흥미롭게 풀어가고 있는데 아름다움과 진리가 동일시되던 고대와는 달리 현대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아름다움이 곧 진리로써 연결되었지만,현대는 아름다움이 중심 가치나 일상의 목표로 만드는데 실패하여 모든 것 -거리, 종교,음악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다다이즘을 제창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다다이스트 트리스탕 차라는 ‘아름다움을 별처럼 빛나는 미친 욕망’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미적 기준에 따른 광범위한 합의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거부하며 흘러 온 현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요즘처럼 진리에 대해 모호한 적이 없듯이, 가끔 접하는 대중 매체에서도 진리에 대한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가 복잡하고 발달함에 따라 가치관의 다양성을 수용하게 된 사회는 확실한 개념이 불명확하다. 더군다나 인터넷의 확산은 현대인들을 현실의 삶보다 허구라는 가상의 세계를 선사하게 됨으로 그나마 있던 개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들이 현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사람들은 모두 말라깽이가 되어가고 있고 성형중독과 쇼핑중독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만족을 모르는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의 모습을 띠며 욕망이라는 거대한 불빛에 몰려드는 불나방이 되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모습들은 가끔씩 보여주는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접하곤 했는데 이제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피폐케 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한 지인이 자살을 하였다. 동네에 새로 길을 내고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멋진 다리를 만든 후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자살을 하였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하고 멋진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삶과 죽음의 무상함이야 이제는 알 나이도 되었지만, 서서히 주변에서 죽음을 어떠한 형태로든 맞이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당혹스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물질적인 부에 대한 강박관념의 증가와 소위 말하는 정보 혁명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지난 40년간 쇼핑 센터는 12배 증가하였다. 쇼핑 센터가 증가한 만큼 자살율도 높아졌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삶 속에서 욕망이라는 그물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는 행위를 한다. 이런 사는 행위는 보여지기 위한, 타자의 욕망을 위한 것이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하였다.

 

 

 

내가 자랄 때에는 연필 한 자루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었을 때 더 오래 쓰기 위해서 볼펜에 몽당연필을 끼워 아껴쓰던 시절로 나는 지금도 연필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연필이 풍족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연필의 귀함을 모른다. 식탁이나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볼 때마다 풍족함 속에서의 사물의 하찮아짐을 느끼곤 한다. 비단 이것은 연필이라는 사물만이 아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넘쳐나는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모든 것이 풍족한 이 시대에 자살하는 사람도 없어야 할 것이다.  생활의 편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생활이 편리한 도시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이 행복으로,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욕망=만족=기쁨=행복)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행복과 생활의 편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겨 민낯을 마주할 줄 알아야 우리가 진정 이 사회에서  무엇을 잃고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 내가 원하는 행복은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나의 욕망은 누구를 위한 욕망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저자는 과학,철학,영화,문학등 다양한 분야와  폭넓은 식견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행복의 경고》를 다 읽고 난 후, 내가 바라는 욕망 또한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고, 내년에는 차를 바꾸고 싶고, 평수를 더 늘려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 누구나 욕망하고 있는 소유에 대한 욕망은 내게도 있다. 그러나,이런 욕망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은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인지된, 습득된 욕망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을 위한 욕망이 아닌 , '나'의 욕망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행복의 경고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시대를 읽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넘치는 물질의 풍요 속에 점점 빈곤해지는 영혼의 시대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있지 않고 얻은 것에 만족하는 데 있다." p273


*오타 p136 두번째줄 이렇기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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