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부치지 못한 편지가 가슴 아픈 이유

가장 잊히지 않는 로맨스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언제나 『원데이』를 꼽는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재미로 사는 덱스터에게 유일한 친구 엠마. 덱스터와 엠마는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은 채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해 간다. 그러나, 둘은 마치 커다란 원이 잃어버린 작은 조각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덱스터의 망가진 삶 저편에 항상 엠마가 기다리고 있다. 덱스터가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 이혼을 하는 동안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채워가는 엠마는 늘 그렇듯이 공부를 하고 학위를 따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삶을 채워간다. 늘 방황만 일삼던 덱스터에게 변함없는 엠마의 사랑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던 덱스터를 변화시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오랫동안 평행선만 그리던 두 사람은 서로의 선을 구부려 사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엠마에게 예고없이 찾아온 불행은 덱스터에게 또다른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준다.

사랑했던 그 순간도
사랑하던 그 시간도

영화는 엠마와의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며 힘든 언덕을 오르는 덱스터의 회상으로 끝이 난다.
마치 구름 뒤에 숨어있는 해의 모습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처럼, 엠마의 죽음으로 철저히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던 덱스터는 엠마가 죽음으로써 그제서야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여는 것으로 남은 생을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채운다.

여기서 원더풀 커플의 아름다움이 있다. 전혀 다른 두 사람, 덱스터와 엠마의 사랑을 통해 전혀 다르지만 둘의 사랑은 하나라는 것이다. 엠마의 소극적이고 어리숙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덱스터는 엠마가 죽고 난 뒤에야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성복 시인은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가 도착하기 전의 평온함까지 질투한다.

겨울산은 위험하다. 비가 눈이 되어 얼어붙어 있는 등산로도 위험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비가 되어 떨어지는 눈의 무게는 일반적인 비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 쩍하고 떨어지거나 후두둑 떨어지는 비의 무게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비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 줄 모르는 사람이다. 비의 무게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한 시인이 사랑의 무게에 힘겨워 쓴 『잘 있지 말아요』 조차 이해하지 못할 무게이다.

한 시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애절한 편지를 쓴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편함이 가득 차도록 우체부가 오지 않자, 시인의 편지는 바람에 날려 남의 집 담벼락에 붙거나 아이들이 종이비행기로 변신하여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걸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만 애가 탄다. 그래서 또 편지를 쓴다. 잘 있지 말라고..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이성복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처럼 애상에 잠겨 있는 수많은 말들. 아무리 상대가 밉다 하여도 잘 지내라는 인사를 미덕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인은 제발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편지가 닿기 전의 애절함까지 합하여 잘 있지 말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반어법과는 다르다. 사랑의 반어법이라는 것은 마음과는 다른 표현을 말함이니 시인은 잘 있지 말아요, 대신에 제발 잘 있어 달라는 언어로 파생되어 각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알랭 바우디는 사랑을 둘의 경험이라 말한다. 둘의 경험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서로에게 주인공이 되는 경험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도처에 있다. 그러나, 내 삶에 개입되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유일하게 ‘나‘의 경험과 나만이 주인공일 수 있는 사랑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둘 만의 경험이 사랑이라 한다면, 나와 상대 외에는 절대 눈에 들어오지도 , 들어 올 수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엠마의 지칠 줄 모르던 사랑이, 이성복 시인의 닿지 못하는 편지는 그래서 가슴 아프다.

이와 비슷한 대중가요도 있다. 엠씨 더 맥스의 행복하지 말아요라는 노래인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친다. 제발 행복하지 말라고,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절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사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이기적인 반어법, 잘 있지 말아요의 또다른 표기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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