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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자본주의란 네덜란드 시민들(Dutch burgher)의 자본주의이며, 영국 공장주들, 제국 공장주들, 양키 거물 기업가들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상업 자본주의 : 중세 말 유럽에서 번성한 원거리 교역에 뿌리를 둔 것, 18-19세기의 산업혁명이 도래할 때까지 지속됨. 아시아의 향료와 브라질의 면화와 담배, 아프리카 노예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을 팔아 부를 축적.
*산업 자본주의 : 철강 회사와 자동차 공장을 소유.

모든 부르주아는 자본가이지만, 모든 자본가가 부르주아인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라는 용어가 종종 자본가나 중산층과 동의로 사용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중산층에는 고학력 종사자, 공무원처럼 자본가가 아닌 부류도 포함된다. 독일 학자들에 따르면,

*자산 부르주아(propertied bourgeoise : 기업가나 공장주)
*교양 부르주아(educated/credentialed bourgeoise : 교수, 변호사, 의사, 장관, 공무원, 장교)

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적 유형으로서의 부르주아 자본가란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차원에서 정의된다. 부르주아란 중세와 근대 초기에 유럽의 자유 도시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중세말부터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에 이탈리아 북부와 '저지대 국가들(벨기에, 네덜란드)'의 도시 공화국들은 교황과 황제, 토착 귀족들로부터 독립을 획득했다. 이 도시 공화국의 '공민들(burghers)' 혹은 엘리트 시민들은 근대적인 입헌 공화정과 상업 자본주의의 토대를 동시에 구축했다. 자본과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자의적으로 징벌하는 전제 권력을 피해 재산과 개인을 보호하는 입헌 국가들로 모여들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이탈리아 말살 정책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입헌 정치의 중심은 17세기 네덜란드로, 18세기에는 영국과 북미대륙의 식민지로, 그리고 20세기에는 뉴욕으로 이동했다. 뉴욕을 최초로 건설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상인이며, 뉴욕의 원래 이름은 뉴 암스테르담이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초창기 미합중국은 모두 프로테스탄트 사회였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 그 자체가 부르주아 윤리의 원천은 아니다. 부르주아 윤리는 출발부터 귀족 윤리, 즉 유럽의 기사도에 대한 저항에 의해 정의되었다. 기사들은 노동을 경멸하고 부를 무절제하게 탕진하며, 이방인을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노동을 존중하고 부를 축적하며 이방인들과 거래를 원했다. 기사들은 이윤을 경멸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겼지만, 부르주아들은 명예보다는 이윤을 중시했다.

유럽의 기사도에 뿌리를 둔 텍사스는 대토지 소유와 정치, 군사적 지배에 권력 기반을 둔 전근대적 정서를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교육수준이 높고 예의바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모든 세력에 대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의 문화는 부르주아와 청교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영국계 미국 귀족들의 문화다. 인종적으로 앵글로 켈틱인 이들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인들로부터 땅을 빼앗았고, 북미 대륙에 도착한 뒤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멕시코인들로부터 토지를 강탈했다. 1836년부터 1960대까지 텍사스 역사는 "가장 큰 민족 집단인 앵글로-켈틱 남부 백인들이 테하노(Tejanos, 멕시코계 텍사스인)들의 땅을 빼앗고 인디언들을 내쫓은 다음, 독일계 정착민을 짓밟고 흑인들을 착취했다."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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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www.lacan.com

프랑스 정신병리학자. 파리 출생.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 철학, 후에 의학·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 학위 취득 후, 생트안느 병원의 학부에서 임상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52년 국제정신분석학회로부터 제명되자, 이듬해 파리정신분석학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지도자가 되었는데, 죽음을 한 해 앞두고 이 학회를 스스로 해산하여 화제를 모았다. 66년 논문집 《에크리》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지고 구조주의자(構造主義者)의 한 사람이 되었다. 53년에 시작된 세미나는 64년부터 고등사범학교, 69년 벵센파리대학으로 옮겨 계속되었고 많은 청중을 모았다.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에 언어가 망각되었음을 지적하고 프로이트로 되돌아갈 것을 제창하였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상태>보다 <경상단계(鏡像段階)>가 앞선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또 환자의 언어에 밑바탕이 되는 무의식은 <언어와 똑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이 말(파롤)이 소기(所記;시니피에)가 아니고, 능기(能記;시니피앙)의 연쇄를 나타내고 있는 데 착안하여, 연쇄방식으로 비유(比喩), 특히 은유(隱喩;메다포=抑壓)와 환유(換喩;메토니미=置換)의 구별을 중시하였다. 또 파롤을 이끄는 것은 요구가 아니고, <타자(他者)>의 욕망이라 하여 <파르스>가 그 대상이며 중심적 능기라고 하였다.

*출처 : 엥빠스 앙씨끌로뻬디


Psychanalyste français (Paris, 1901 — id., 1981).
La mère de Jacques Lacan appartenait à une famille de riches vinaigriers(식초제조인) d'Orléans et son père était le représentant de commerce de l'entreprise. Il fit ses études au collège Stanislas où il se distingua(두각을 나타내다) par sa précocité(조숙함). Son condisciple Louis Leprince-Ringuet a raconté ses dons d'alors pour les mathématiques. Il mena ses études de médecine de façon brillante, ce qui ne l'empêcha pas d'associer à celles-ci un goût prononcé(언급된, 표명된) pour les lettres et pour la philosophie (les présocratiques, Platon, Aristote, Descartes, Kant, Hegel, Marx) pour l'anthropologie (Mauss), l'histoire (Marc Bloch) la linguistique (Saussure), les sciences exactes. Alors qu'il effectuait ses études de psychiatrie, il se rapprocha des surréalistes. Il dira plus tard que l'apologie(옹호) de l'amour lui paraissait une impasse irréductible(환원되지 않는) du mouvement d'André Breton.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파리, 1901~1981)
자크 라캉의 어머니는 오를레앙의 부유한 식초제조인 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기업의 상무 이사였다. 스타니슬라스 중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거기서 그는 조숙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동창생 루이 르프렝스-렝게는 그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수재로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이는 문학과 철학(전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 인류학(마우스), 역사(마크 블로흐), 언어학(소쉬르), 정밀과학을 거론하기 위하여 표명된 취향과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접근한다. 후에 그는 사랑에 대한 옹호가 그에게는 앙드레 브르통 운동의 환원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었다고 말했다.


En 1932 paraît sa thèse de doctorat De la psychose(정신병) paranoïaque(편집증적인) dans ses rapports avec la personnalité. Ce travail constitue l'illustration(예증) clinique des potentialités que peut comporter un amour porté à l'extrême: Aimée, la malade, donne un coup de couteau à la vedette(인기 배우) qui, à titre d'idéal, représentait son amour le plus fort. Cette étude constitue de plus une rupture(파괴) totale avec les travaux des psychiatres(정신의학) de l'époque, tant le regard porté par Lacan sur la psychose paranoïaque apparaît novateur: loin de voir dans la paranoïa la simple aggravation(심화) de traits définissant le «caractère paranoïaque», Lacan considère que ce que le malade paranoïaque dénonce(드러내다) dans le monde constitue en réalité ce qu'il a en lui et qu'il méconnaît. Le mécanisme de la projection était ainsi analysé et étudié dans une approche aussi singulière que brillante et qui ne pouvait que contrarier le monde de la psychiatrie.

1932년에 인성과 관련하여 편집증적인 정신병에 대한 박사논문을 발표한다. 이 연구는 극단적 사랑이 포함할 수 있는 잠재성에 대한 임상적 예증으로 이어진다. 즉 사랑받는 사람, 환자는 이상적으로 가장 강렬한 자신의 사랑을 대변하는 인기 배우를 칼로 찌른다. 이 연구는 당시 정신의학의 업적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편집증적 정신병에 대한 라캉의 관점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라캉은 편집증 환자에게서 단순히 «편집증의 특징»을 정의하는 심화된 특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편집증 환자가 드러내는 것이 실제로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것과 그가 간과하는 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메카니슴은 생소할 뿐만 아니라 기발한 접근으로 연구 분석된 것이었고, 정신분석학계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C'est par l'étude du cas Aimée et par sa tentative d'une description phénoménologique de cette personnalité, que, dira-t-il, il fut conduit à la psychanalyse, qui constituait pour lui le seul moyen de déterminer les conditions subjectives de la prévalence* du double dans la constitution du moi. Vers 1933, il rencontra des psychanalystes berlinois qui partaient aux États-Unis. Il connut Loewenstein, qui devint son analyste, et avec lequel il entretenait une relation de confiance fondée sur une rigueur intellectuelle commune.

그가 자아의 구축에서 드러나는 이중적 이환율의 주된 조건들을 정의하는 그만의 방식을 세운 것은 사랑받는 여자의 사례에 대한 연구와 그 인성의 현상학적 묘사에 대한 시도를 통해서였다. 1933년경 그는 미국으로 떠난 베를린 정신분석학자들과 만난다. 그는 자신의 분석가가 된 로벤스타인을 알게되고 그와 더불어 엄격한 지식 조직에 기반한 신뢰관계를 맺는다.

*이환율(罹患率, prevalence rate) : 어떤 기간(일반적으로 1년) 내에 발생한 환자수를 그에 대응하는 인구로 나눈 비율. 질병발생률이라고도 한다. 질병별 또는 성별·나이·지역 등 인간집단별로 계산할 수도 있다. 이환율은 어떤 인간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발생률이 높고 낮은가를 논하여(記載疫學) 구하는 것이므로, 계산상 분모가 되는 인구는 그 질병에 걸릴가능성이 있는 인구이다. 예로써 자궁암에 대한 이환율에서는 여성 인구를 분모로 해 계산한다.

Le paysage psychanalytique français de l'avant-guerre était quelque peu disparate(서로 어울리지 않는): chacun semblait y avoir été délégué(대표로 파견하다) par sa «chapelle» pour contrôler la pensée de Freud, et se recommander d'elle. Freud, rappelons-le avait, après 1920, introduit la thèse selon laquelle le moi constituait une sorte d'instance régulatrice(조절하는) entre le ça (source des pulsions) le surmoi (agent des exigences morales) et la réalité.
전전(戰前)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적 이행은 조화롭지 못한 것이었다. 각각은 프로이드의 사상을 조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제단»에서 대표로 파견된 듯 했고, 스스로를 프로이트 사상의 대변인으로 자처했다. 프로이트는 1920년 이후 이드(개인의 본능적 충동, 성적 충동의 근원)와 초자아(도덕적 존재의 주체) 사이에 있는 일종의 조절적 순간인 자아에 대한 이론을 소개했다. 
  
Or Lacan fait son entrée sur la scène psychanalytique en invoquant(내세우다) une autre thèse: «le moi, écrit-il, se construit à l'image du semblable». Cette image qui est renvoyée par le miroir. L'investissement(정신력 집중, 투하) libidinal(리비도의, 성욕의) qui est provoqué chez l'enfant comme étant la sienne
sera le point d'ancrage des identifications futures ouvrant pour chaque sujet la possibilité de se reconnaître comme différent de l'autre, comme sujet autonome(자율적) de désir. C'est lors du XVe congrès international de psychanalyse qui se tint à Marienbad en 1936, que Lacan, alors âgé de 35 ans présenta une communication intitulée: Le stade du miroir, théorie d'un moment structurant et génétique de la constitution de la réalité conçu en relation avec l'expérience de la doctrine psychanalytique. Ce fut une entrée magistrale(현학적), qui bouscula(뒤죽박죽으로 만들다) les esprits. Le texte fut accueilli sans enthousiasme et resta longtemps inédit. Ce n'est que treize ans après, lors du XVIe congrès de psychanalyse à Zurich (juillet 1949) que Lacan reprit ce thème, mais sous un titre différent: Le stade du miroir comme formateur de la fonction du Je, telle qu'elle nous est révélée dans l'expérience psychanalytique (in Écrits, 1966).

그러나 라캉은 다른 이론을 내세우며 정신분석학으로 진입한다. 즉, «자아는 유사한 것의 이미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거울로 되비춰진다. 그 자신의 것이었던 어린 시절의 성욕에 대한 집중은 각각의 주제에 대해 욕망의 자율적 주체로서, 타자와 다름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미래의 동일시의 정착점이 된다. 1936년 마리엔배드에서 열린 15회 국제 정신분석학 학회에서 라캉은 당시 35세의 나이로 다음 제목의 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거울의 장, 정신분석학적 이론의 경험과 관련한 현실 구성의 구조적 기원론적 순간의 이론" 이것은 현학적 시도였으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논문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13년 후 취리히에서 열린 제 16회 정신분석학 학회(1949년 7월)에서 라캉은 이 논문을 다시 발표한다. 그러나 "'나'의 기능의 창조자로서의 거울의 장, 정신분석학적 경험에서 우리에게 밝혀진 바대로(출판,1966)."이라는 다른 제목으로였다.

Ce texte, soulignons-le, est d'une importance extrême: il s'agit d'un texte fondateur, que Lacan qualifiera plus tard lui-même de «premier pivot» de sa pensée. Il constitue, en effet, les prémisses(전제) d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théorie lacanienne.

이 논문은 매우 중요하다. 기초적 텍스트로서 라캉은 나중에 그 스스로 이것이 자기 자신의 «최초의 축»이라고 평가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라캉이론의 기초적 개념들의 전제를 구축한다.

En 1953, Lacan démissionna de la 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 dont il était le président. Avec Daniel Lagache, Juliette Favez-Boutonnier, Françoise Dolto, il fonda la Société française de psychanalyse. Le motif de la rupture fut la décision de la SPP de fonder un Institut de psychanalyse chargé de délivrer un enseignement de la psychanalyse réglé et diplômable, à l'image de celui de la faculté de Médecine, ce à quoi Lacan s'opposait. Au reste, le séminaire de Lacan, les cours de Lagache à la Sorbonne, le charisme(카리스마) de F. Dolto attiraient la majorité des étudiants, qui les suivirent.

1953년 라캉은 그 자신이 의장이었던 파리의 정신분석학학회(SPP)를 떠난다. 다니엘 라가슈, 쥴리에뜨 파베-부또니에, 프랑소와즈 돌토와 더불어 그는 정신분석학 프랑스 학회(SFP)를 설립한다. 그가 학회를 떠난 이유는 의과대학과 그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정신분석학 교육을 시키고자 정신분석학 제단을 설립하려는 SPP의 결정이었다. 게다가 라캉의 세미나와 소르본에서의 라가슈의 강의, F. 돌토의 카리스마는 그들을 따르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매혹했다.

Mais il fallait mettre un terme à(~에 종지부를 찍다) un nomadisme(유목, 방랑생활) qui dura dix ans. Il fallait, affirmaient certains, réintégrer l'Association psychanalytique internationale. Les négociations furent menées par trois élèves de Lacan: Wladimir Granoff, Serge Leclaire et François Perrier. Elles aboutirent à(~귀착되다) une sorte de troc(물물교환): l'IPA acceptait de reconnaître la SFP, en échange de quoi Lacan renonçait à former des analystes. Ce fut un refus. En 1963, Lacan fonda seul l'École freudienne de Paris. Certains le suivirent. Son travail se révéla d'une grande fécondité. En 1980, les premiers signes de la maladie le conduisirent à dissoudre(없애버리다) son école. Lacan mourut en septembre 1981.

그러나 10년 동안의 노마디즘은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IPA)를 통합해야만 했다. 협상이 라캉의 세 학생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블라디미르 그라노프, 세르쥬 르클레르 그리고 프랑소와 페리에였다. 그들은 일종의 물물교환을 행했다. 즉 IPA는 SFP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라캉은 분석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부였다. 1963년에 라캉은 홀로 파리에 프로이트 학교를 세운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의 업적은 매우 풍부하게 드러난다. 1980년 첫번째 병적 징후로 학교가 문을 닫기에 이르고 라캉은 1981년 9월 사망했다.

Le but de Lacan était d'assurer à la psychanalyse une assise scientifique. Il voulait démontrer qu'il ne s'agissait pas, avec elle, d'une théorie, mais de la recherche des conditions objectives qui déterminent la vie mentale.
라캉의 목표는 정신분석학에 과학적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삶을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들에 대한 연구를 보여주고자 했다. 

 
*Yahoo! Encyclopédie


카트린 클레망《악마의 창녀》, p.113

4 우리의 이야기는 세미나로부터 시작한다 中에서

라캉은 50년대에 마샬 플랜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를 공격했다. 다시 말해 1947년 미국이 유럽의 재건을 돕기 위해 승인한 막대한 투자가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타락한 사회복지 사업이 되었고, 방법상 프로이트의 사상은 결여되어 있었다. 마샬 플랜과 함께 미국인들은 코카콜라, 담배, 추잉 검과 더불어 영화와 정신분석에 대한 자신들의 전망을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라캉이 부상했다. 라캉의 프로이트에로의 복귀는 아주 프랑스적인 반항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인종주의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70년대부터 인종주의의 부활을 예견했다. 1969년 그는 좌파들이 무시무시한 권력욕으로 고무될 것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캉은 우리에게 자신을 지배할 주인을 찾고 있던 히스테리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여성 정관사를 지워 버렸다. 남성 세계의 합의 속에 있지 않다면 여성 정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정관사는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주어진 호칭이다. 단수의 여성 정관사는 존재하지 안지만 여성 복수 정관사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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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4-07-2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千)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카트린 클레망, <악마의 창녀> p.24~25 미네르바의 탄생


제우스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자 그의 두개골이 열리고 그 틈새로 어린아이의 머리가 나타난다. '그 아이는 머리에 반짝이는 투구를 쓰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다.' 제우스는 '자신이 생명을 준 유일한 자신을 딸'을 응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야, 너는 아테네로 불릴 것이다. 너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수호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성마른 궤변론자들이며 고집불통이므로 다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지혜의 여신이므로 협상과 계략의 임무를 부여받을 것이고, 중재 기술도 갖게 될 것이다. 너는 평화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된단다. 또한 이따금 나는 너에게 전쟁을 일으키도록 지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너무 행복하면 더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그들 희생자들의 연기가 없다면 우리는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정열에 굴복해선 안 된다. 정열에 굴복하면 비천한 처지로 떨어지게 된단다. 사랑하려고 생각해선 안된다!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나는 금한다. 무엇보다 너를 감시하기 위해 나는 가장 아름다운 밤의 새를 선택했다. 그 새는 부드러운 깃털과 경계의 눈을 가진 올빼미란다. [...] 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조약이나 재판 같은 것들을 찾아내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을 말하게 해라. 앞으로 영원히 너는 이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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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화의 비평 / 조르쥬 풀레

- 남(작가)의 의식과 자기 의식을 합치시키려는 의지

1) 티보데(Thibaudet, Albert 1874-1936) : 즉각적, 전폭적인 동화.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는 작품과 작품 외적인 요소 사이의 비교 분석에 주력. 이를테면 통시적으로 유사/상이한 작품들과 비교, 역사적 관점으로 분석. 비평의 관점이 작품 자체를 벗어나는 단점. 외향적.

2) 리비에르(Riviere, Jacques 1886-1925) : 작품과의 정신적 교감, 촉각적, 작품에 대해 전적으로 순종적. 정숙주의(quietisme). 작품의 사상이 비평가를 변화시키지는 않음. 작품의 사상이 비평가에게 그대로 스며듦. 비판없는 수용?

3) 샤를르 뒤 보스(Charles du Bos) :  유연성, 액체 상태. 비평자는 정신, 사고의 통과점, 집적장, 교차역의 역할. 리비에르와의 차이점은 유입된 남의 사상이 그를 통과, 자기 것이 되어 흘러나간다는 점. 좀더 능동적인 동화.

4) 라몽 페르낭데스(Fernandez, Ramon 1894-1944) : 비평적 관점(vision)이 확실히 정해짐. 문학 작품 속의 혼돈을 비평가의 관점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리. 구조주의의 전조. 비평은 작품의 모호성을 작품에 앞서 이해하고 작품을 하나의 통일체로 만드는 것.

5) 마르셀 프루스트(Proust, Marcel) : 소설가이면서 비평가. 자신의 비평적 기도를 소설에 구현. 창조 행위 이전의 것들에 대한 고찰. 비평은 창조의 선행단계. 독서에서 비평으로. 한 존재양식(작가의 존재양식)에 합치하는 것. 능동적 독서. 모방(작가의 관점)을 통한 재 창조.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얻어지는 하나의 본질적이고 통일성을 지닌 사실을 얻어냄. 작가들은 작품활동을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총체성을 보여주려고 하나(예를 들어 발자크의 <인간희극>), 대부분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므로, 추 후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는 통체적 독서행위를 통해서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평. 주제비평의 시초.


  • 지드와 발레리 - 신비평의 선구자 / G.W. 아일랜드

작품을 외적 요소 즉, 역사, 시대적 관점에서 비평하는 방법론을 지양. 오히려 '무엇에 의해 한 작가작품이 자기 시대를 초월하는가'에 관심. 문학작품은 말(mots)의 총체. 그 속에 사상이 스며들어 동화될 때 가장 풍요로운 상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소우주. 한 작품은 오직 그에만 해당되는 유일한 열쇠로 열 수 있는데, 가장 완벽한 열쇠는 '작가'. 작가의 내면의 조작에 관심. 하나의 작품은 오로지 하나의 질서에만 호소할 수 있다.

1) 작가에서 출발하여 작품을 연역해 냄

- 그러나 발레리는 작가가 작품 속에 현존해 있되, 그 해석의 장은 작가의 전기적 요소가 아니라 오로지 작품 내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은 한 인간의 창작이 아니고, 작자와 언어행위의 합작물이다'. 언어라는 '형태'가 작품에 깃드는 감동의 창조자. 작품의 내밀한 구조가 정신의 내밀한 구조와 부합됨. 작품이 곧 작자이며, 비평가는 작품의 인간을 알아보아야 함. 작품의 개인성도 인간에게서처럼 온갖 변모를 일관하여 보존됨.

"포우의 체제 안에서 일관성(consistance)은 동시에 발견의 수단이자 발견 자체이다. 그것이야말로 희한한 의도다-본보기와 자기소유화의 상호 연관성의 작품화. 그 심오한 균형이 이를테면 우리 정신의 내밀한 구조 속에 현존하는 한 도면에 의거하여 세계를 구축한다. 시적 본능이 맹목인 채로 우리를 진실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수학자들에게서 꽤 흔히 이와 비슷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발견을 배합능력의 창조로 보지 않고, 차라리 그들의 주의가 이미 존재하는 자연스런 형태의 보물을 포착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 보물은 오직 엄밀함과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욕구의 무척 희귀한 만남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이해 안되는 부분)"

발레리는 포우를 통해 '작품의 인간'에 대해 설명. 작품의 개인성이 변모를 일으키면서도 일관되게 보존되는 것을 포착해야 하는데, 포우에게서 이러한 일관성(consistance)가 관찰됨. 그 일관성의 발견은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자연스런 형태의 보물을 포착하는 것이다. 포우가 모색하는 진실은 직관에 의해 포착되며 직관은 고찰하는 한 체계의 각 부분과 특질의 상호 의존을 드러내준다. 직관에 의한 가담이란 작품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생명에의 참여를 말한다. 이는 곧 삶의 한 체험이며 이를 통해 비평가는 창조적 몽상이 가능하다. 즉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그가 명상하는 작품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 작품의 실재적 형태들 / 장 루세

*비평이란 주관적 성격을 지니며, 비평가의 구체적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파악하는 주체와 그 대상을 분리하기 힘든 활동이며, 그 둘 사이의 공모를 피할 수 없다.

1) 형태적 지표 - 시에서 호흡의 변화, 연극에서 무대의 채움과 비움, 소설 서술에서 독백의 삽입, 인칭의 선택 등과 같은 형태적 지표는 작품 해석에 있어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형태적 경험으로 시작하는 해석이 작품의 여러 감가적인 요소들 밑에 언어행위의 자원을 통하여 그 작품을 살아고 느끼도록 함.

2) 형태의 도취 - 필자의 저서 <문학적 바로크>을 이 소논문이 출발점으로 삼음을 밝힘. 바로크는 형태의 도취이다. 다양함 속에 선택이 필요하다.

3) 회화(나 건축)에 빗댐 - 문학작품 속의 의미와 형태의 관계를 회화의 그것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회화는 형태가 강하고 즉각적이므로 그 자체가 작품이며(즉 형태가 이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기 내면의 법칙에 의해서 규제되는 자기 생명의 상징이다.

4) 음악에 빗댐 - 음향의 연속을 통일체로 파악할 때 음악을 이해하 듯, 상호간에 서로 침투되는 관계들의 복합적 체계를 다룸. 전체와 부분과의 상호작용, 유기적인 관계.

5)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예로 듦 - "이중 렌즈": 요소들의 대립과 반복, 서로 얽히고 배합됨. 결국 이러한 것들(구조적 모티브들)이 하나의 구조를 형성함. 총괄적 독서의 효과를 제시하고자 함. 이러한 분석 방식은 작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구성된 한 체계를 보여준다. 이는 언어학에서의 <구조>의 의미와 부합한다.

6) 이러한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방식을 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언어학에서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지만, 비평에서는 그 임의성을 배제하는 문체가 존재한다.

-언어학에서는 언어(langue)를,  비평에서는 언화(parole)를 연구대상으로 하므로 언어학의 연구 방법론을 언화에 적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문학 작품의 형태는 작가를 발견하게 해 주며 비평가(독자)는 그 안에서 한 작품을 만나게 된다. 형태는 각 작품에 하나의 혹은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발레리는 "형태는 작품들 이전에 태어난다"고 말했으며, 들라크르와와 발자크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곧 작품의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형태는 예술가의 가장 내밀한 경험이자 동시에 인식과 행위의 도구이다.


  • 비평적 상황 / 레몽 쟝

-비평가에 대면한 작가의 상황.

1) 비평은 고친다(redresser) : 미학적 준거에 의거 혹은 이데올로기에 비춰 작품에 개입한다.

2) 비평은 모르고 있다(ignorer) : 작품의 심부에서 작품에 적중하여 분석하는 길을 모른다.

3) 비평은 덮어 씌운다(recouvrir) : 참다운 비평의 역할은 작품을 드러내보이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의미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

ㄱ. 문제점 : 작품 자체를 대신하려 들때, 작품 고유의 영역에서 작품과 경쟁하고, 작품을 넘어뛰려 들때 작품을 압박하게 되지 않을까?

 ㄴ.해결책 : 작가가 암암리에 사용한 정신분석, 사회학, 언어학, 문체학, 마르크스 주의 등을 거꾸로 밟아나가면서 작품과  일치하고 거리를 두지 않는다.

4) 비평가의 의식 = 구조하는 의식(스타로벵스키) : 비평이 극도에 이르면 비평의 대상이 된 작품을 능가하고 더욱 풍부한 내용을 드러낸다. 문학작품을 한 시작점으로 보고 작품을 재구조함. 문학과 비평의 공생.

5) 문학의 형태화, 기호화 - 비평이 그 형태와 기호를 해석하도록 함. 작품의 진실을 밝혀 작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비평적 해설과 분리될 수 없음. 비평이 진보함에 따라 문학은 퇴보한다고도 볼 수 있으나 '창조문학과 비평문학 사이에 구분이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 낙관적.

6) 비평가와 작가의 관계 속에서 비평가에게 무게중심이 주어지는 '비평을 위한 문학'이 양산될 가능성도 있으나, 비평가들이 끌어들인 혁신과 풍요성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모험은 감행할 만 함.


  • 생트-뵈브와 비평적 경험 / 쟝-피에르 리샤르

*'사랑의 몽상들'의 시각에서 접근 - 액체의 메타포, 유동체의 상상, 사랑이 존재의 액체화로 몽상되고 있음. ㅡ> 호수의 테마

*호수 : 반대감정의 양립 - 육체적 융합의 표상/정신적 현실정의 직관 ㅡ> 욕망의 대상인 타인의 심혼

-루앙 부인 ㄱ. 호수의 표면 : 관능의 덩어리 ㄴ. 호수의 깊이의 모호성 : 유동성이 깊이 침잠되어 있음. 호수의 표면은 현기증 나는 동시에 나를 비추지 않는 닫혀진 거울.

-소설가/비평가로서의 생트-뵈브는 소설속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가와 동화하려들지 않고, 표면에서 몽상한다.

*사물과의 관계 - 빈곤, 궁핍, 결여, 불충만, 무기력함. 욕망에 대하여 스스로를 열어주거나 자신을 내주려하지 않는다. 세계와의 접촉은 근본적으로 보람없다는 결론. 사물들의 침울함과 침묵에조차 열정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사물들의 부재성을 통하여 그 존재 중의 어떤 것이 마침내 우리에게 드러나는가를 기대함. 사물과의 접촉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포위하고, 스치고, 스며드는 것이다.

*색채 - 노랑 : 쇠퇴하고 병적인 노랑, 좌절의 형태, 약점과 좌절의 역설

*사물들(작품들)의 비밀을 고의적으로제한된 아주 피상적 파악에서 출발하여 밝힘.

*감각적 현실을 무기력과 폐쇄의 양태로 느끼듯, 예술의 양태는 천재라고 부르는 창조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확산하는 힘의 작용에 의해 느껴진다. 천재의 작품은 약동력과 분출과 특수한 천부적 힘을 지닌다.

*비평적 이해는 포위 탐사하고, 밖으로부터 적시며 대상과 평행적이다.

*생트-뵈브 비평활동의 기법 - 인간과 작품 사이에 어떤 실질적인 분리도 정립될 수 없다. 인간이란 작품 속에서 이야기되는 자, 극도에 이르면 언어행위 자체, 그 작품의 개인적인 언어행위이다. 작품이란 빠롤(parole), 어떤 사람의 언어적 再?이다.

*포위(=비평)의 세 수준 : 표정, 글, 전기

*수법 : 문장의 특유한 진행. 문장이란 언어행위. 생트-뵈브는 '수법'에 중점. 따라서 문체를 두루 살펴보고 모사해야함.

*생트-뵈브가 만족해하는 문학형태란 그 속에 존재의 필연성의 현위와 그 토대를 느끼게끔 해주어야하며, 적재물이 실려있어야 한다. 반대로 불만족스런 문학형태는 딱딱하고, 과장되며, 불균질한 것이다. 형태는 흐르는 듯 하여야할 뿐만 아니라 충만해야만 한다. 생트-뵈브는 스스로 창조하는 동시에 비평한다.

*비평가와 대상 작가는 친자관계에 있다. 비평의 진술은 작품의 진술을 연장하며, 육체적으로 연대를 맺고 있어야 한다. 비평적 언어행위는 작품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의거하되(인용), 적용되기도 한다. 비평은 다른 감수성(비평가의 감수성)의 요구 앞에 의미를 불러내어 다른 구조속에서 되풀이하는 일이며, 그 의미를 "다른 한 형태 밑에" 존재하게끔 도발하게 하는 것이다.


  • 비평과 생존 / 세르즈 두브로브스키

문학이란 실존으로서는 언어행위(langage)이며, 말들로써 자기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표현하려고 모색하는 인간의 진실이다. 오늘의 비평은 전폭적으로 작품의 절대적 우위성을 전제로 삼고, 글에 대한 독자적 이해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작품 안에서 말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면 그 목소리는 대체 어떤 것인가?

*작자라는 독특한 존재자는 문학에서 자취를 감춘다. 뤼시앙 골드만은 창조의 주체가 결코 한 개인이 아니고 한 집단임을 예고했다. 롤랑 바르트는 일체의 서명이 지워질 때 작품이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책의 출현은 작자의 소멸이다.

*비평가 역시 작가라면 비평에는 비평가의 소멸이 따른다. 롤랑 바르트는 "비평가는 작품의 기호를 해독되고 변형된 기호로 또 한번 재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제라르 쥬네트는 "진정한 관계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지 않고 글과 글읽기 사이에 있다. '글의 위상'과 '글읽기의 위상'은 시간의 순환적 작용의 움직임에 의해 서로 통하는 양면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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