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항로 무삭제 완역판 36 - 완결
이학인 글, 왕흔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창천항로]는 1권에서 손가락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권력자들의 손가락에 대한 설명을 통해 권력이란 것의 속성을 되짚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겠다고 미리 말해두는 이 긴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넘어선 권력, 그 자체에 대한 거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보면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히 범아시아적 텍스트인 [삼국지]의 파괴와 재생을 10여년 동안 추구할 만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소년의 얼굴을 본다. 그는 아만, 후에 조조 맹덕이라 불릴 인간이다.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을 터이지만 [창천항로]는 온전하게 조조의 것이다. 조조라는 인물, 그의 공과, 그리고 복권이라는 선을 끝까지 잡으면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영웅설화의 모양새를 구축해내고 있는 [창천항로]는 유가의 재래이자 촉과 유비의 영웅상을 체현하느라 정신없었던 [삼국지연의]의 이미지들과 싸운다. 마치 조조처럼, [창천항로]는 조조와 후한 삼국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나관중의 소설에서부터 비롯된 거의 모든 해석들을 거부하면서 독창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사건과 다른 인물들로 재창조해내는데 거침이 없다. 그리고 조조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시작된 이 36권의 대장정은 조조가 죽는 시점에서 앞뒤 보지 않고 그 엔진을 바로 멈춰버린다. 조조는 조조 이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설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 마치 조조처럼, [창천항로]는 오직 땅에서 존재했고 땅의 시대를 지배했으며 결국 땅으로 돌아간 조조를 추구했다.

[창천항로]는 파격이란 자신의 컨셉을 추구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삼국지] 팬덤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결과로도 드러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창천항로에서의 고증의 문제는 지적유희로의 활용은 가능하나 지극히 전략적이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다. [창천항로]는 나관중의 반대말에서부터 시작되지만 당연하게도 정사가 아니며 작가적 창작으로 가득한 세계다. 그 안에 적절하게 배치된 실제와 허구의 작가적 노림수는 철저하게 기존의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방향으로 튀어다닌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구축한 허구를 부숴뜨리는 무기로 실제를 갖다 쓰면서도 완벽한 고증이 불가능한 부분에선 마음껏 상상력을 부리는 작가의 솜씨는 실제와 허구의 뒤섞임이었던 기존 [삼국지]들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며 진수도, 나관중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삼국지]라는 한 역사를 다뤄내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같은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또다른 [삼국지]의 면모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조조라는 한 인물의 시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창천항로]가 놓치지 않은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향하고 있는 재미다. 보장하건데 [창천항로]가 주는 만화적 즐거움은 최고 수준의 것이다. 역사적 견해에 따라선 불쾌감마저 동원할 수 있는 [창천항로]는 파격의 방법론으로 해석의 색다름을 보장하고 무수한 인물들의 신념과 의지, 지략과 무용담을 통해 지능적으로 독자의 마초적 쾌감을 노린다. 우리는 여기서 조조만 보는 것이 아니다. [창천항로]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다. 마왕 동탁의 거침없는 학살과 홀로 용이 되고자 했던 여포의 무. 관도대전에서 보여주는 원소의 허장성세, 오로지 오를 위한 충의로 살다 죽는 주유의 죽음과 장판교의 장비. 변방에서 끝없는 전란을 꿈꾸는 한수와 오로지 조조만을 쫓아 돌진하는 마초, 책략에 책략을 쌓아 마초를 사냥하는 가후와 나라가 가져야 하는 모든 짐과 허물을 끌어안고자 했던 손권. 모사 순욱을 비롯한 위나라 군사들의 활약과 죽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떨결에 성 하나를 함락해버리는 하후돈과 대지를 진동시키는 장료의 이름. 그리고 시대의 끝에서 마침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유비. [삼국지]의 수많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매력 만큼이나 [창천항로]가 굽어보고 그 역할을 올려주는 인물들의 면면도 다양하고 방대하며 참신하다. 동시에 그 수많은 걸물들의 피고짐을 묘사함에 있어서 만화적 탁월함을 극한까지 선보인다. [창천항로]의 시작과 끝을 맺는 이는 조조이지만 조조외의 인물들을 다루는 [창천항로]는 인재에의 집착으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잊지 못했던 조조의 시선처럼 더없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없이 후한말기라는 굳혀진 역사속 시간에서의 그들의 '역할'만을 관철하는 작품의 시선은 인물들의 '역할'을 흥미롭게 훑고다녔던 조조의 눈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조조란 무엇인가. 난세의 간웅, 배덕자와 같은 별명들을 달고 다니는 조조 맹덕은 [창천항로]에 와선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자 난세라는 현실을 끊임없이 견지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죽은 후의 세계 따윈 믿지 않으며 허례허식은 배격하고 끝을 모르는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자신의 오감을 취하게 만드는 것에 쉬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진실인가? [창천항로]가 보여주는 조조에 대한 지독한 매혹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그려지는 그의 모든 행태와 의식들을 확고한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순도 100% 짜리 근거는 없다. 그러나 [창천항로]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논하는 것이 별 소용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왜곡된 조조의 복권조차도, 결국은 조조라는 하나의 프리즘을 타고 보고자 하는 권력과 현실에 대한 우회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창천항로]는 조조가 난을 난으로 없애려고 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낸 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합리성과 철두철미한 제도의 정비, 국가의 안정과 새로운 문물의 탄생을 불러온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반대말로서 천하 속에서 피어나는 유비라는 존재의 합당함을 예리하게 꿰뚫는다.

의미심장하게도 [창천항로]의 마지막인 36권은 영원을 탐색하는 이야기다. 도가의 유령 제갈량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유교의 폐습을 하나씩 부숴버리며 각기 다른 이상을 추구하던 수많은 적들을 무덤으로 보낸 조조는 마침내 무신이 된 관우와 맞닥뜨리게 된다. [창천항로]의 막바지에 이르러 조조가 관우를 생각할 때마다 평정을 잃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조는 끝까지 땅을 살았던 이였던 반면 관우는 끊임없이 하늘을, 그것도 권력의 욕망과 허세로 채워진 하늘이 아닌 의협이라는 이름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소박하기까지 하며 그래서 더욱 자극적인, 민초들의 하늘을 쫓고 있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대의 민중에게 있어 정치와 권력이 그저 허망하게 피어오를 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조조로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세계였다. 그리하여 관우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불멸이 된다. 조조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근거를 뒀던 유비가 한나라라는 이름을 잇는 전설이 되고, 하늘을 품으려했던 관우는 중화의 역사 속을 관통하는 관제라는 이름의 신이 되리란 걸 직감한다. 그리고 땅을 쫓았던 자신은 백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무도 기억 못하게 되리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의 혜안을 빗나간 것, 당대의 틀을 깨뜨리고 살아있는 인간 그 자체에 충실하여 종내는 법가의 괴물이라고도 불리웠던 이 남자의 이야기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아직 땅을 밟고 사는 이상,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흡사 그가 살았던 시대에 받았던 상반된 평가들 그대로가 변하지 않고 천년을 뛰어넘어온 것처럼,

지속중인 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인간의 역사란, 시대와 사회란 그토록 변한 게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조조는 훌쩍 와서 평생을 한 세대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이라는 생물이 감각으로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추구하고선 왔을 때처럼 훌쩍 떠나버렸다. 남은 것은 이름과 전설과 논란, 곧 우리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의 몫. [창천항로]는 그 해야할 몫에 더없이 충실했다. 이 얼마나 조조다운 것이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구루이 1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저 기호와도 같은 제목 [시구루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제목의 [시구루이]는 무사도를 체현했다고 얘기되는 서적 [하가쿠레]의 1절,

武士道は死狂ひなり。一人の殺害を数十人して仕かぬるもの。(무사도란 죽음에 미쳐있음이라. 한사람을 죽이는데 수십명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

에서 유래한다.'

저 문장에서 [시구루이]의 제목이 된 부분이 死狂ひ. 그대로 발음하면 시구루히이지만 시구루이라 읽고, '죽음에 미친'이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에도 칸에이 6년에 스루가성에서 있었던 진검 어전시합은 후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명령에 의해 시합을 주관했던 스루가성 성주이자 바로 쇼군의 동생이었던 도쿠나가 타다나가의 목이 잘리는 파국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타다나가는 광인으로 알려졌으며 전해지는 민담이나 야사에선 그의 잔혹한 행동들이 심심찮게 언급되곤 했다. 그러나 정사에는 단 한 줄로만 짤막하게 기재된 스루가성의 어전시합과 성주에게 내려진 할복이라는 기록 속에서 작가 난조 노리오는 상상의 힘을 더해 태평성대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잔혹극을 재창조했다. 그리고 30여 페이지 남짓한 그 이야기는 또다른 작가 야마구치 다카유키에 의해 더 구체화되어 노골적인 폭력의 순간들을 구현해낸다.

이야기의 시작은 스루가성의 어전시합장. 한 광인이 열어제낀 광기서린 축제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열린 평화 속에서 그들이 숨겨왔던 야수성과 그에 충실히 따르는 거침없는 폭력을 통해 악마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시합에 참여하는 무사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목도가 아닌 진검. 그리고 그 첫시합에서 우리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발달된 등근육을 가진 외팔이 검객과 귀기 어린 맹인 검객의 대치를 보게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길게, 그 둘의 과거를 향해 되돌아간다. 그것은 시대가 서있던 자리 아래에 무엇이 깔려있는지를 되묻는 것과도 같다. 기이한 운명과 곡해, 그리고 광인들로 이뤄진 그 무사들의 길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영광된 무사도의 길이란 없다. 수십명을 감당해내는 무사도의 정신을 통해 봉건주의적 환상을 뒷받침하는 저 [하가쿠레]의 1절에서 [시구루이]가 충실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미쳐있음'이다. 봉건주의의 기반을 받치는 무사란 아주 간단하게 정의된다. '소수의 사디스트 아래에 선 마조히스트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찢기고 부서지며 서로를 죽인다. 상하관계에 의한 명령에 의해서, 억압된 욕망이 피어나고 증오가 샘솟게된다. 그 견고한 틀을 헝클어뜨리려는 이는 철저하게 망가지고 배제된다. 그리고 또다른 곳에 욕망과 증오가 독버섯처럼 자리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군신간의 충절이라는 허울을 지탱시켜주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과 폭력의 쾌감이다. 애초에 어전시합 자체가 주군의 광기에 의해 치러지는 것이며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를 향한 집착에서 비롯된 묵은 복수심의 교차뿐. 그렇기 때문에 더없이 지독한 [시구루이]의 표현과 오락성에의 충실함은 결과적으로는 무사도의 환상에 대한 비웃음과 고어적 쾌감에 대한 작가적 집착이라는 두가지 포지션을 가지게 된다.

독자는 1권의 컬러페이지 첫 장을 본 순간, 여기서는 무엇이든 다 보여질 수 있다는 걸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특징을 잔혹에서 찾는다는 원작자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시구루이]는 말그대로 지독하게 마초적이며 지독하게 잔혹하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운 속에서 칼이 허공에 휘둘러지고 공포, 긴장, 불안에 휩싸인 인물들의 표정과 먼저 베기 위해서든 피하기 위해서든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의 클로즈업은 사지절단의 결과를 기다리기 직전에 미리 겪어야 하는 스펙터클들이다.

[시구루이]가 그 모든 잔혹들에 대한 노골적인 매혹임을 부정하긴 힘들다. 작가의 집요한 연출 속에 배치된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 휘둘러지는 칼과 베이는 순간, 그리고 뒤이어 튀어나오는 피와 뼈, 장기의 세례를 비추는 과정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다. 그러면서도 [시구루이]는 복수극이라는 원초적인 플롯의 힘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핏물 고인 이야기는 그 선정성과 거침없음으로 인해 이 장르의 독자들을 완벽하게 흥분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구루이]가 오락물로서 최고의 쾌감을 전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비위 약한 독자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모쪼록 주의하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철학입문
에띠엔느 질송 지음 / 서광사 / 1989년 11월
평점 :
품절


대학서적으로 태어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워드 프로그램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디자인 외엔 어떠한 디자인적 기교도 부리지 않은 세 가지 서체가 흑백의 두가지 글씨색만으로 책제목과 저자와 역자의 이름, 그리고 출판사를 파란색 바탕 위에 무뚝뚝하게 그려놓은 표지를 가진 책이라면 그 책 제목이 '입문'이라고 하는, 지극히 건설적인 미래의 학생들을 위한 것처럼 유혹하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해도 경계해야 마땅할 터이다. 우연이 아니게도 [중세철학입문]이 바로 그런 모든 외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책이다.

 

 

대개 입문이라고 불리는 서적은 그 두께가 사전만 하지 않은 다음에야 [중세철학입문]처럼 포켓북이 연상될 정도의 두께를 자랑한다면 그 안의 내용은 장난이 아닌 압축률을 자랑한다고 예상해봐야 마땅할 터이다. 1983년에 펴낸 판본을 2004년에도 그대로 쓰고 있는 이 책은 분명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로서나 번역된 모양으로서나 중세철학을 생판 처음 접하는 초보자용이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질송이 쓴 원저의 제목이 [중세의 이성과 계시]인 만큼 [중세철학입문]이라는 만만한 제목을 보고 달려든 독자를 좌절케 만들 가능성이 농후한 이 저작의 본체는 중세철학시대를 신앙의 우위, 이성의 우위, 이성과 계시의 조화라는 세부분으로 시원간결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도 짐작가능한 것처럼 안에서 보여주는 정보의 압축률이 예상대로 상당한 편이라, 되려 중세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이에게 자신의 지식의 척도를 검증해보는 수단으로서 보다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입문'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 이유라면, 소개되는 각 개념마다 빠지지 않고 친절하게 달려있는 장문의 주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염두해둬야 할 사실은 책의 반절 가까이를 차지하는 부록의 양이나 본문에 실린 자잘하면서도 방만한 양의 역주를 보아 알겠지만, 실상 이 책은 에띠엔느 질송의 원저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질송의 원저에 더해 역자인 강영계가 그와 비슷한 정도의 작가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꼼꼼한 역주들에도 불구하고 1983년도 책이라는 시대를 증명하듯 주석이 따로 떼어져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설명해야 할 개념이나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 뒤를 이어서 개념에 대한 해설이 줄줄 이어지기 때문에 흐름이 자주 끊겨 읽기에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의 독법이 어땠는지 몰라도 21세기에 이르러 이런 산만한 구성은 가독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대학서적의 독서라는 것이 눈안에 모래알을 굴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겐 마조히즘적 축복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중세철학입문]을 기어코 읽어내야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이에겐 다음과 같은 독법을 추천해드린다. 우선 부록에 실린 '1. 에띠엔느 질송의 생애'는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고 '2. 중세철학 개관'을 눈에 힘을 줘서 읽는다. 그런 다음 에띠엔느 질송의 본문으로 뛰어들어서, 중세철학의 초보독자라면 각 페이지에 가득 실려있는 개념과 인물들에 대한 역주들만을 한 번 쭈욱 읽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느 정도 중세철학을 공부한 이라면 반대로 주석들을 썩 신경쓰지 않으면서 에띠엔느 질송이 만든 본체를 즐기는 편이 이 복잡다단한 구성의 글덩어리를 더 쉬이 이해하는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3부 이성과 계시의 조화'까지 해결이 됐다면, 마지막으로 부록에 있는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도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될 것이다. 저자로서의 강영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에띠엔느 질송, 더 나아가 중세철학의 구분법에 대한 메타테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의도했을 것 같진 않지만, 이 복잡한 구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밟고 온 자리들을 부릅뜨고 돌아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이 책은 얇지만 작고 단단한 미궁이다. 이것을 온전히 상찬이라고만 할 수 있을진 모를 일이지만 어떤가. 나는 충분히 즐겼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한 여자가 말한다. 여자는 그녀에게 긴 시간 동안 가해진 제도적 폭력과 불합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모든 고통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지독한 상흔과 후회를 안고 있었다. 고통이 습관이 되버린 여자는 앞으로 나오기 보다는 움츠러드는 것에 더 익숙해지고 잔인할 정도로 명징한 육체의 병까지 얻은 상태에서 바깥세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방황, 그리고 방황. 여자는 크고 넓은 원을 그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그것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구원을 향하게 된다. 자신이 7년 동안 버린 시간 속 제도의 요구로, 나중에는 그녀 스스로의 갈망으로 끊임없이 추구했던 그 지독한 구원을.

이 이야기는 수녀원에서 7년을 보내야 했던 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정적이든 교육적으로든 어떤 이유로서든 조금 보수적이고,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세상에 낯설어하며 말보다는 글에 익숙한 모든 이들을 자극할 이야기다. 이것은 실화이며 에세이들의 촘촘한 총합이 짜낸 어느 비교종교학자가 겪어야 했던 내면의 고백이지만 동시에 모든 억압된 종류의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을 향해 보내는 담담한 자아쟁취기기도 하다.

7년간의 수녀원에서의 삶을 통해 그녀가 얻게된 증오는 상당해서 처음 그녀가 그 감옥을 나와 벌이는 사고는 그녀가 천성적으로 가지는 소심함 속에서도 가끔씩 돌출적이고 공격적인 모양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적어도 글에 있어서 그녀는 더없이 당당하다. 그래서 이제는 흔해진 종교에 대한 일반론, 혹은 중세철학 시대의 교부들이 설파했던 신의 불가지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뒤로 미뤄진다.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경험주의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면서 자신을 속박했던 것을 차갑게 냉소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책-인생 내내 그 떨쳐버리고 싶었던 가톨릭의 굴레 밖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저 폭력적이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가톨릭은 어떤 형태로든 그녀의 인생에서 존재한다. 어떤 때 그것은 그녀의 예전 신앙에 대한 비웃음의 대상으로, 어떤 때는 그녀가 맡아야 할 생활의 역할 중 하나로, 어떤 때는 가망 없는 도피처로. 그녀가 가장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리고 그녀는 실수하고 잘못 판단한다. 첩첩이 이어지는 우회로. 그녀는 종종 지친다. 아니, 어쩌면 내내 지쳐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시간과 경험이 쌓여 보다 더 침착해진 다음 그녀는 되묻는다. 바로 뛰어나오지 못하고 7년이나 보낸 것,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갈구하던 것에 대한 물음의 난해함, 혹은 적대적 냉소에서 잠시 비켜 서서, 어째서 자신이 그 지옥에 매혹되었던가를, 그 원초적인 시작점의 근원을 묻는다. 선택은 온전히 그녀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고향, 마음의 안식, 구원의 표상을 점지한다. 이제야 그녀는 뒤돌아서서 자신이 그린 원을 볼 자신이 생긴다. 그 원의 크기를, 궤적을 비로소 파악하게 된다. 자, 그리고 이것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째서 미련은 형태를 달리 해서 당신의 주위를 멤도는가. 당신은 그것을 뿌리끝까지 증오한다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해왔던 일들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되묻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발걸음, 아주 길게, 오랫동안 우회해서 올라가야 하는 나선계단과도 같다. 그 궤적의 크기는 방황의 수치를 나타내지만 긴 여정은 마침내 그녀에게 역할을 부여해준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저 비교종교학자라는 역할을, 그녀가 원했고 세상이 원했고, 아마도 신이 있다면 점지해뒀을 터인 그 자리를.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종교들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심원한 비의의 한자락을 들춰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말을 건다. 당신도 같지? 라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11-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았는데, 아직 못 보고 있어요.
옷 좀 단정히 입고 봐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님의 취향을 종잡기 힘든걸요.

hallonin 2006-11-07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평소에 제가 어떻게 보였길래-_-
 
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야샤르 야샤마즈. 야샤르 야샤마즈. 야샤르 야샤마즈. 솔직하게 얘기해볼게. 노골적으로 고백하건데 저 이름, 불편해. 간장공장콩장장으로 시작되는 우리네 발음훈련을 떠오르게 만드는 저 이슬람 소스가 가득 배어나는 불편한 이름은 척 봤을 때 거부감마저 줘. 어쩔 수가 없지. 익숙치가 않거든. 더군다나 저 야샤르 야샤마즈의 고향은 터키. 혈맹의 나라니 동로마 문화의 중심지니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에게 터키라는 나라는 월드컵 이벤트로나 가끔씩 볼 수 있는 나라잖아? 아무리 케밥이 이마트 지하 식품매장 곳곳에 깔려 있다 해도, 전통적인 터키인력 수입국이자 햄버거 대신 케밥을 먹는다는 지경에까지 이른 독일 정도가 아닌 한에야 터키는 예전부터나 지금까지나 우리에겐 어디 붙어있는지도 지도에서 제대로 찾아내기 힘든 낯선 타자의 나라일 수밖에 없지. 그런 나라에서 온 야샤르 야샤마즈의 이야기에 우리가 얼마나 공명할 수 있을까?

야샤르 야샤마즈 만큼이나 발음 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쉠넴 이쉬규젤이라는 이름의 글쟁이 양반의 친절한 소개글이 끝나면, 우리는 교도소의 한 모퉁이에서부터 한바탕 무대를 여는 야샤르의 행각을 진득한 묘사를 통해 목도할 수 있어. 이슬람교의 전통에 대한 설명과 어느 고명한 성직자의 세상에 대한 회의와 신을 향한 처신, 그리고 그를 공손히 따르는 야샤르의 독실한 무슬림적 태도에 대한 묘사. 우리는 시작된지 얼마 안 지났는데도 꾸란의 숭고한 신비와 그를 체현하는 두 남자의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종교적 승화를 접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하게 되. 그러나 전혀 부담 갖지 말지어다. 단 3페이지 내로 작가는 자신이 독자를 웃겨줄 채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줄테니.

일단 한 차례 웃었으면, 이제부터 야샤르가 겪었던 고달픈 삶에 대한 주구장창 설레발에 빠져들 무장해제는 다 된 셈이야. 자신이 [아라비안 나이트]가 일찍이 알려줬던 이야기꾼의 운명에 대한 오래된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 아지즈 네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민등록증을 가지지 못할 팔자였던 터키 촌구석의 평범한 청년 야샤르 야샤마즈의 입을 빌려 살면서 보고 겪고 느껴야 했던 부조리하면서도 흔한 풍경이기에 슬프고도 웃기는 양상들을 통해 터키 사회, 더 나아가 관료적이고 조직화된 사회에서 드러나는 지독한 인간소외를 이죽거리며 드러내보이기 시작해.

그런데 여기가 터키야? 무슨 이름들만 얄리꼴리하지 터키 같지가 않잖아....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잖아!

 

얼씨구.

 

그들이 야샤르의 이야기에 이렇게나 열광하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샤르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그들 대부분에게 야샤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공동의 삶이었던 것이다. 야샤르는 마치 모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한 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206P

 

조나단 스위프트가 아일랜드의 위정자들을 향해 감자 대신 애들을 잡아먹자고 제의한 거나, 움베르토 에코가 냉동된 연어 한 마리 때문에 최신식 시스템의 호텔에서 겪아야 했던 온갖 수난을 그 초현실주의적인 인상들에도 불구하고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 야샤르의 이야기 또한 깊숙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니, 아니다 그딴 거 몰라도 상관없어. 그곳이 아일랜드든 캄보디아든 북부 이탈리아의 특급 호텔이든 간에 상관 없이, 우리는 야샤르의 빙글빙글 끌어들이는 입담에서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왜냐, 야샤르, 그리고 야샤르들이 날카롭게 간파한 것처럼 세상은 한없이 엿같기 때문이야. 조직은 개인을 우습게 만들면서 그 피를 빨아 스스로를 비대하게 만드는 선천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의 야샤르들은 뭔일을 당할까 쪼금 무서워서, 쌍욕을 (아마 아무도 없을지도 모를) 하늘에다가 대고밖에 못해. 근데 아무에게도 안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향하는 그들의 욕질은 그 대상인 하늘의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엉뚱하게 정확한 셈이야. 여기까지 오면 이스탄불 한 번 안 가 본 사람이라도 터키와 우리가 고리짝적부터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형제적 속성을 진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라구. 그래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를 줄줄 읊는 아지즈 네신은 내란음모, 좌익활동 등과 연루되는 250번의 재판과 5년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통해 당당한 개인주의의 가치를 웅변했던 건지도 몰라. 뭐 그렇게 신나게 깜빵을 드나들었으니 이런 깜빵이야기도 쓸 수 있었던 거겠고. 그렇게해서 이 소설이 탄 상과 상업적 성과를 가늠해보면, 자신에 대한 투자가치대 산출비용을 확실하게 받아냈다는 점에선 이 작가, 은근히 지독하게 CEO스러운 양반일지도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실용적 면모. 처음 기획이 라디오드라마의 극본이었던 것 만큼, 소설은 내내 연극적 색채로 가득 차 있어. 교도소라는 제한된 공간의 살가움과 야샤르의 이빨과 혀가 만들어내는 활극에 가까운 인생담, 줄줄이 펼쳐지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모든 광경들. 그리고 공감, 씁쓸한 뒷맛의 마무리까지. 이 수다쟁이의 이야기는 그 본래의 기획이 가진 장점들을 전혀 배신하지 않는 극본으로서의 가치도 실로 훌륭. 우리 주위를 둘러친 뻔뻔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조직의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 몸부림치는 야샤르의 억울한 표정과 내일을 꿈꾸는 몸짓은 그 살아있음이 보장됨으로써 설명 가능한 조건이기에 팔팔 꿈틀대는 인간을 통해서만이 제대로 체현가능한 것이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11-0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랩 가사처럼 리듬감을 살려서 읽어야 할 것 같은. 재미있어요.

hallonin 2006-11-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