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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 무삭제 완역판 36 - 완결
이학인 글, 왕흔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창천항로]는 1권에서 손가락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권력자들의 손가락에 대한 설명을 통해 권력이란 것의 속성을 되짚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겠다고 미리 말해두는 이 긴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넘어선 권력, 그 자체에 대한 거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보면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히 범아시아적 텍스트인 [삼국지]의 파괴와 재생을 10여년 동안 추구할 만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소년의 얼굴을 본다. 그는 아만, 후에 조조 맹덕이라 불릴 인간이다.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을 터이지만 [창천항로]는 온전하게 조조의 것이다. 조조라는 인물, 그의 공과, 그리고 복권이라는 선을 끝까지 잡으면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영웅설화의 모양새를 구축해내고 있는 [창천항로]는 유가의 재래이자 촉과 유비의 영웅상을 체현하느라 정신없었던 [삼국지연의]의 이미지들과 싸운다. 마치 조조처럼, [창천항로]는 조조와 후한 삼국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나관중의 소설에서부터 비롯된 거의 모든 해석들을 거부하면서 독창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사건과 다른 인물들로 재창조해내는데 거침이 없다. 그리고 조조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시작된 이 36권의 대장정은 조조가 죽는 시점에서 앞뒤 보지 않고 그 엔진을 바로 멈춰버린다. 조조는 조조 이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설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 마치 조조처럼, [창천항로]는 오직 땅에서 존재했고 땅의 시대를 지배했으며 결국 땅으로 돌아간 조조를 추구했다.
[창천항로]는 파격이란 자신의 컨셉을 추구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삼국지] 팬덤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결과로도 드러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창천항로에서의 고증의 문제는 지적유희로의 활용은 가능하나 지극히 전략적이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다. [창천항로]는 나관중의 반대말에서부터 시작되지만 당연하게도 정사가 아니며 작가적 창작으로 가득한 세계다. 그 안에 적절하게 배치된 실제와 허구의 작가적 노림수는 철저하게 기존의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방향으로 튀어다닌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구축한 허구를 부숴뜨리는 무기로 실제를 갖다 쓰면서도 완벽한 고증이 불가능한 부분에선 마음껏 상상력을 부리는 작가의 솜씨는 실제와 허구의 뒤섞임이었던 기존 [삼국지]들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며 진수도, 나관중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삼국지]라는 한 역사를 다뤄내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같은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또다른 [삼국지]의 면모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조조라는 한 인물의 시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창천항로]가 놓치지 않은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향하고 있는 재미다. 보장하건데 [창천항로]가 주는 만화적 즐거움은 최고 수준의 것이다. 역사적 견해에 따라선 불쾌감마저 동원할 수 있는 [창천항로]는 파격의 방법론으로 해석의 색다름을 보장하고 무수한 인물들의 신념과 의지, 지략과 무용담을 통해 지능적으로 독자의 마초적 쾌감을 노린다. 우리는 여기서 조조만 보는 것이 아니다. [창천항로]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다. 마왕 동탁의 거침없는 학살과 홀로 용이 되고자 했던 여포의 무. 관도대전에서 보여주는 원소의 허장성세, 오로지 오를 위한 충의로 살다 죽는 주유의 죽음과 장판교의 장비. 변방에서 끝없는 전란을 꿈꾸는 한수와 오로지 조조만을 쫓아 돌진하는 마초, 책략에 책략을 쌓아 마초를 사냥하는 가후와 나라가 가져야 하는 모든 짐과 허물을 끌어안고자 했던 손권. 모사 순욱을 비롯한 위나라 군사들의 활약과 죽음.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떨결에 성 하나를 함락해버리는 하후돈과 대지를 진동시키는 장료의 이름. 그리고 시대의 끝에서 마침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유비. [삼국지]의 수많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매력 만큼이나 [창천항로]가 굽어보고 그 역할을 올려주는 인물들의 면면도 다양하고 방대하며 참신하다. 동시에 그 수많은 걸물들의 피고짐을 묘사함에 있어서 만화적 탁월함을 극한까지 선보인다. [창천항로]의 시작과 끝을 맺는 이는 조조이지만 조조외의 인물들을 다루는 [창천항로]는 인재에의 집착으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잊지 못했던 조조의 시선처럼 더없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없이 후한말기라는 굳혀진 역사속 시간에서의 그들의 '역할'만을 관철하는 작품의 시선은 인물들의 '역할'을 흥미롭게 훑고다녔던 조조의 눈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조조란 무엇인가. 난세의 간웅, 배덕자와 같은 별명들을 달고 다니는 조조 맹덕은 [창천항로]에 와선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자 난세라는 현실을 끊임없이 견지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죽은 후의 세계 따윈 믿지 않으며 허례허식은 배격하고 끝을 모르는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자신의 오감을 취하게 만드는 것에 쉬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진실인가? [창천항로]가 보여주는 조조에 대한 지독한 매혹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그려지는 그의 모든 행태와 의식들을 확고한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순도 100% 짜리 근거는 없다. 그러나 [창천항로]는 무엇이 진실인가를 논하는 것이 별 소용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왜곡된 조조의 복권조차도, 결국은 조조라는 하나의 프리즘을 타고 보고자 하는 권력과 현실에 대한 우회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창천항로]는 조조가 난을 난으로 없애려고 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낸 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합리성과 철두철미한 제도의 정비, 국가의 안정과 새로운 문물의 탄생을 불러온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반대말로서 천하 속에서 피어나는 유비라는 존재의 합당함을 예리하게 꿰뚫는다.
의미심장하게도 [창천항로]의 마지막인 36권은 영원을 탐색하는 이야기다. 도가의 유령 제갈량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유교의 폐습을 하나씩 부숴버리며 각기 다른 이상을 추구하던 수많은 적들을 무덤으로 보낸 조조는 마침내 무신이 된 관우와 맞닥뜨리게 된다. [창천항로]의 막바지에 이르러 조조가 관우를 생각할 때마다 평정을 잃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조는 끝까지 땅을 살았던 이였던 반면 관우는 끊임없이 하늘을, 그것도 권력의 욕망과 허세로 채워진 하늘이 아닌 의협이라는 이름의 지극히 보편적이고 소박하기까지 하며 그래서 더욱 자극적인, 민초들의 하늘을 쫓고 있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대의 민중에게 있어 정치와 권력이 그저 허망하게 피어오를 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조조로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세계였다. 그리하여 관우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불멸이 된다. 조조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근거를 뒀던 유비가 한나라라는 이름을 잇는 전설이 되고, 하늘을 품으려했던 관우는 중화의 역사 속을 관통하는 관제라는 이름의 신이 되리란 걸 직감한다. 그리고 땅을 쫓았던 자신은 백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무도 기억 못하게 되리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의 혜안을 빗나간 것, 당대의 틀을 깨뜨리고 살아있는 인간 그 자체에 충실하여 종내는 법가의 괴물이라고도 불리웠던 이 남자의 이야기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아직 땅을 밟고 사는 이상,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흡사 그가 살았던 시대에 받았던 상반된 평가들 그대로가 변하지 않고 천년을 뛰어넘어온 것처럼,
지속중인 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인간의 역사란, 시대와 사회란 그토록 변한 게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조조는 훌쩍 와서 평생을 한 세대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이라는 생물이 감각으로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추구하고선 왔을 때처럼 훌쩍 떠나버렸다. 남은 것은 이름과 전설과 논란, 곧 우리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의 몫. [창천항로]는 그 해야할 몫에 더없이 충실했다. 이 얼마나 조조다운 것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