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베르너 풀트 지음, 김지선 옮김 / 시공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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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투오소의 연주는 매혹적이고 압도적이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인간의 것으로 여기질 않았다. 그가 가진 재능과 지긋하다 싶은 연습의 결합은 세상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오해됐다.

사람들은 그를 악마와 함께 걷는 이로 알고 있었다. 그의 개인사적 편력이 그런 오해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오해였다. 아니, 그것은 대중의 열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너무 탁월하고 뛰어난,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에게 지워지는 열광과 오독. 그것이 센세이션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최초의 대중적인 슈퍼 스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신에게는 그 열기를 이해할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책은 동시대인들의 기록들을 토대로 파가니니에 얽힌 소문과 진상을 가려내려 한다. 그는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영웅이자 악마였고 궁극적으론 희생자였다. 그저 한 사람의 탁월한 연주자였으면 그것으로 됐을 것을. 그의 능력에 관한 대중의 호기심, 질시, 경외감은 그를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매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왜곡과 그에 끝없이 덧붙여지는 (마치 유령 같은) 소문의 악순환을 보게 된다. 그것이 제도의 이기심과 결탁되었을 때, 그는 죽은 채로 36년을 떠돌아야 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매체의 가능성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진 오늘날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네트의 구석 게시판에서 쓰여진 자극적인 텍스트가 세상을 한 바퀴 돌아 한 사람, 한 영혼, 한 공동체, 집단을 오독하게 만드는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파가니니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한 저자의 시선은 차분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대중이 가하는 폭력의 잔인함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확장되고 있는 인간의 못 된 버릇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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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가] 탐욕의 실체 - 내부자가 폭로하는 엔론 파산의 진실
브라이언 크루버 지음, 정병헌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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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괴물의 뱃 속에 들어갔던 한 사람이 괴물의 뱃 속에 대해 쓴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요나가 아니었고 그보다는 다니엘과 함께 사자굴에 들어간 사람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어야했다. 그런데다 이 이야기에는 다니엘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 15년만에 이뤄진 경이적인 성장, 대내외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회사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믿음. 그것을 뒷밤침하는 거대한 사업의 규모와 수익. 그저 겉으로 봤을 때 엔론은 자본주의의 이상이 집약적으로 구현된 완벽에 가까운 모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안은 탐욕이 일으킨 공포의 시스템으로 이뤄진 '현실적으론 존재해선 안 될' 괴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괴물은 명백히 그 자리에 있었고 짧은 영화의 끝은 모두에게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그 괴물의 뱃속엔 자본주의의 이상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것도 같이 담겨있었다.

제목 그대로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탐욕이라고 하는, 마치 오랜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인간의 나쁜 욕망에 대한 우화였다. 하지만 포브스 선정 세계 7위의 기업이 삽시간에 곤두박질 친 것이 현실인 것처럼 그 오래된 우화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비에 가까운 윤리에 대한 의식 결여는 원죄처럼 공포의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지 않던 종말, 종말을 피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은 도리어 그들을 종말로 이끌었다. 단순히 사내 행정 시스템뿐이 아니다. 저자는 타인의 입을 빌어 엔론이라는 괴물이 전세계에서 벌인 악덕도 고발한다. 그 일련의 사건과 실상들은 이 괴물이 가진 신경 중추의 망가진 정도를 단번에 확장시킨다.

저자는 자신이 엔론에서 1년간 있으면서 겪은 재난의 과정과 감정의 변화를 (1년만에 해고 당한 사람치곤 무척) 차분하면서도 재치있는 어조로 그려낸다. 긴박감 넘치는 상황들과 위트 있는 저자의 서술은 엔론이라는 회사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에겐 이 괴물이 빚어낸 사태에 무척 쉽고 재밌게, 그리고 빠르게 문제의 핵심으로 달려가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하나의 기록이자 동시에 경고로 존재할 이 책이 발휘하는 멋진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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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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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료를 가지고 도출해내는 객관적 결론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그 미덕을 충분히 지키고 있다. 저자는 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있었던 독-소 간 전쟁의 전후를 엄청난 양의 사료와 평가 논문들, 문학, 증언들을 동원해서 20세기에서 가장 압축된 지옥 같은 시간이었던 그 일련의 사태들이 어떻게 벌어지고 어떻게 은폐되고 어떻게 오해되었는가를 추적한다. 살짝 잘못 바라보면 손쉽게 틀어져버릴 수많은 민감한 사안들과 자료를 통한 조심스러운 추정 속에서 저자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커다란 두 개의 축은 '민중과 전쟁', 그리고 '스탈린과 전쟁'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거대한 전쟁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독자들이 납득해야 할 두 가지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러시아 민중과 이해하기 힘든 스탈린이라는 두 아이콘이다. 전쟁의 경과 자체가 당시 기준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 한 것이었기에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내린 일반적인 의견들(날씨, 전선의 이동, 보급로의 확장, 히틀러의 변덕 등등)을 무시하고 대부분의 역사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은(혹은 못한) 저 이해 불가능한 두 아이콘이 전쟁에서 한 역할에 대해 고찰한다. 그럼으로써 내려지는 결론은 몇 마디 말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상황들의 총체이자 기후나 독재자의 변덕 같은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의 거대한 의지이다.(그런 의미에서 조선 일보의 서평이 내리는 강조점은 그 근거가 무척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자국민에 대한 스탈린의 무자비한 테러로 시작된 전쟁 전 시기에서부터 시작된 서술이 지옥이 내려온 것 같았던 전쟁이 끝나고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의 탈신화화 작업에까지 이르러도 그리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는 그 이후 반세기 넘게 일어난 일들을 잘 알고 있거니와 그 연속되는 일련의 어둠 같은 세계에서 쉬지 않고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 발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스탈린은 스스로 공포에 사로잡혀 민중에게 죽음과 공포를 선사했고 나치 독일은 자신들만의 제국을 이룩한답시고 도륙에 미쳐 날뛰었다. 전쟁의 시기가 끝난 다음 흐루시초프에 의한 탈 스탈린화가 권력 이동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띄지 않는다고 보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으며 그 과정에서 은폐된 전쟁 전, 중의 소련에 대한 진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많은 시간과 사고들을 겪으면서도 정작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폭력과 오해의 역사 속에서 그나마 분명한 답을 대라면 흔히 쉽게 말하는 것처럼 잡초처럼 살아남는 민중이라고 해도 그 흘린 피가 너무 엄청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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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들의 밤
오시이 마모루 지음, 황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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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블러드 프로젝트의 가장 처음 작품인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은 48분짜리 중편의 형태로 완성된 (당시로선 획기적인)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블러드라는 세계에 대해서 얘기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미디어 믹스를 통한 장르의 다양화와 그 유기적 관계로 오시이 마모루로선 꽤나 야멸찬 프로젝트였다 싶은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의 소설판인 이 물건은 블러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시이 마모루가 만들어내는 인간 환멸의 완성판이라 불러도 좋을 이 세계의 러프 스케치쯤 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소설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1969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정점이었던 시간을 배경으로 서구 철학사에서 유전 이론까지 아우르면서 음모론의 색채를 더하는 그의 서술은 인간이라는 이름의 짐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 목적을 위해 심심한 이야기 구조와 소설적인 표현으론 어색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들을 무릎써 가면서 만들어낸 두 축으로 이뤄진 장문의 토론식 대화는 애니메이션에서 설명해주지 않았던 블러드 세계의 총체이자 오시이 자신이 가지는 인간론의 바탕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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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1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창해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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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라는 인물에 대한 끝간데 없는 매혹을 보여줬던 토마스 해리스의 서술은 이 '한니발'에 와서는 제목 그대로 거의 경배에 가깝다. 여기서 나타나는 한니발 렉터는 시리즈 중 어느 작품에서보다- 죽음을 관장하는 것의 외적인 측면에서 - 더 자세하게, 매혹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인간을 벗어난 존재가 보통 인간에게 자신의 찬란함을 조금씩 비추이는 행위와도 같이 느껴질 정도다. 괴물. 그렇다. 집시 여인의 공포처럼, 이탈리아 갱의 문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으로 원초적 감정의 발현으로 표현되던 외경심처럼 그는 여기서 타인의 입을 빌려 악마, 혹은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은 실패하고 죽어버리며 한 경관의 인생이 걸린 문제가 그에겐 저녁에 무슨 곡을 연주할까 하는 고민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치다. 그를 통제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에게 고통을 주려했던 메이슨은 계획을 제대로 실현해 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끝나버린다. 더군다나 그렇게도 서로에게 매혹되어 있었음에도 이뤄질 수 없었던 클라리스와는 결혼까지 이른다. 모든 법칙은 그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작품 속에서 한니발 렉터는 모든 것을 무력화 시키는 절대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어째서 제목이 한니발이겠는가.

전작 '양들의 침묵'에선 클라리스의 의식 멀리서 끊임 없이 들려오던 양들의 울음소리를 잠재우는 과정으로서 렉터와 클라리스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니발'에 와서 그녀는 렉터와 자신의 의식을 완벽하게 일치시켜버리고 그의 세계에 자신을 넣어버린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옛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양들은 울음을 그쳤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과거와 아버지에게 시달려야 한 것이 여기서 마침내 치료된다. 또한 그것은 렉터와의 교감을 통한 것으로 역시 과거와 자신의 여동생에게 매달려있던 그를 끝없는 의식의 공간에서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끝 부분에서의 반전 - 반전이라고 말해두자 - 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전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렉터와 클라리스의 관계의 급격한 진전을 설명한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면 클라리스의 주변에 아버지의 대체들은 모두 세상에서 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에겐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렉터의 의식의 궁전 안에서,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의식의 궁전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었고 그리고 끊임없이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에게 더이상 세계는 옛시절의 기억만으로 지탱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건네진 렉터의 초대는 그렇게 유혹적이고도 마땅한 필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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