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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중에서

 

 

 

 

 

 

     1944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희생자는 형무소에서 악명 높은 간수 스기야마 도잔.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습니다. 사건의 실마리는 형무소 내에 있는 것이지요. 풋내기 간수 유이치에게 사건을 조사하라는 상부의 명이 내려집니다. 몇 가지 의문점을 파헤치던 유이치는 스기야마의 죽음을 둘러싼 놀라운 비밀의 터널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 너나 나나 이 더러운 곳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파고 있지. 방향은 다르지만, 길은 여러 개일수록 좋겠지. 도달하기 어려운 목적지라면 더더욱 말이야. 네 말대로 두 개의 터널 중 어느 쪽이 우릴 구원하는 길이 될지는 모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의 터널이 날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일 거야.' 나는 두 개의 터널이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를 기도했어. 누구도 말은 안 했지만 우린 그 기원으로 비밀을 영원히 봉인시켰어."(본문 중에서)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의 작가 이정명이 내놓은 이번 소설 역시 추리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참혹한 시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지요. 작가는 능숙한 솜씨로 독자를 기만하면서 터널 중심부로 이끌어 갑니다. 어둡고 음습한 터널의 분위기가 슬슬 지루해질 즈음, 잡힐 듯 말 듯,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나는 이가 있는데요.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물고 있는 스물아홉 청년. 시인 윤동주입니다.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1943년 독립운동 혐의(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1944년부터 그 이듬해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일 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탈출하고 싶었어요."
"어디로?"
"글 속으로, 수많은 잠언과 아름다운 문장들 속으로!" (본문 중에서)

 

 

 

      폭력과 증오로 얼룩진 황폐한 형무소에서 '죄수'와 '간수'의 역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전쟁의 광기와 바이러스처럼 퍼진 불안. 참혹한 시대의 폭력에 갇혔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무소의 간수 스기야마와 유이치가 그 진실을 입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악마로 불리던 스기야마의 짐승 같은 포악함이나 유이치의 냉소적 무관심 모두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본능적 방어였던 것입니다. 이들 역시 전쟁의 광기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무력한 인간, 죄수와 다름 없는 신세였습니다.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책,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인 윤동주가 있습니다. "문신처럼 미소를 입에 물"고 있는 조선인 죄수의 순수함짐승 같은 삶에 길들여진 스기야마의 마음을 뒤흔들어요. 이 소설의 숨은 매력은 여기 있습니다. 죄수와 간수, 희생자와 가해자, 일본인과 조선인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 교류. 간수이자 검열관이었던 스기야마와 시인 윤동주를 이어준 것은 악몽과도 같은 시대적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바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그들의 은밀하고 아늑한 피난처가 되어주었습니다.

 


      나는 유령처럼 투명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되어서라도 이 지옥 같은 형무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영혼을 위로할 유일한 방법은 무언가를 읽는 것뿐이었고, 검열실은 내가 도망칠 유일한 장소였다. 책과 엽서를 읽는 순간만큼은 참혹한 시대의 폭력에 멍든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본문 중에서)

 

 

 

       소설 곳곳 윤동주의 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저 먼 시대, 1944년의 춥고 황폐한 형무소로부터 날아온 엽서를 읽는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이야기의 진실에 매료되기 시작한 일본인 검열관의 감미로운 초조함이, 고향을 그리는 조선인 죄수의 그리움이 스며 있는 그 아름다운 문장들은 별처럼 깜박이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건 살아 있는 거야. 더럽고, 참혹하고, 지옥 같은 이 세상에 살아남는 거지. 천사처럼 순수하고, 영웅처럼 용감하게 죽기보다는 악마처럼 악하고 야수처럼 비열하게라도 살아남아야 해. 악마처럼 간악하게 살아남아야 천사처럼 착하게 죽을 수 있으니까. 살아남아야 더러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고, 악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위안받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본문 중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흥미, 또는 의미를 더하는 것은 윤동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진 허구적 인물이라 보다 색다른 매력을 가집니다. 히라누마 도주. 죄수 645번. 윤동주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이미지와는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는데요. 인간 윤동주의 무력(無力)과 절망, 그리고 교활함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 윤동주는 무력하지만, 시인 윤동주는 힘이 셉니다. 그의 시는 죽음과도 같은 형무소의 빛이었고 피난처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문장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인간 윤동주는 죽었지만, 시인 윤동주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결국 그것 아닐까.

 

 

                                                                              *  2006년 8월 28일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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