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팬픽을 즐기는 여성들은 왜? (2) ― 남성 권위를 쾌락으로 무화하기

   

팬픽은 기본적으로 연애 서사이다. 전술한 팬픽의 온갖 장르를 통어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서사는 그 지고의 가치를 체현하는데 바쳐진다. 이때 동성애는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수난이 된다. 이제까지 여성의 동성 서사 생산과 소비는, 억압적 이성애 연애 각본에 끌려들어가지 않을 객관적 거리의 확보, 그리고 남성을 매개로 한 여성 사이의 연맹 구축 때문이라고 간략히 논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분석 지점이 남아 있다. 그것은 왜 이 사랑이 굳이 육체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팬픽의 성애적 측면은 기존 여성 독자 연구의 중심이 되어왔던 로맨스 서사와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대체로 ‘안타까운 지켜주기’ 등 아름다운 묘사로 지탱되어왔던 사랑 이야기와 달리, 팬픽은 강도 높은 성 관계가 이야기에 핵심에 놓여 있다. 특히 에로틱한 장면을 별도로 지칭하는 ‘씬(scene)’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특질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씬의 유무는 팬픽 선정 시의 중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팬픽을 쓰거나 읽을 때 기준이 되는 구도는 공(攻)과 수(守)로 이루어져있다. 명백히 이성애적 남녀 역할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이 명명은, 종종 공수의 자질을 확정짓는 코드가 된다. 보통 공은 남성적이고 수는 여성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젠더의 구분이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이 명확한 듯 보이는 공수의 차이는 종종 서사의 진행 과정에서 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변이된다. 공수 앞에 붙는 다음의 각종 수식어는 그러한 측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공은 절대강공, 완(벽)공, 잔혹공, 냉정공, 집착공, 강공, 능글공, 야비공, 약(한)공, 꽃공, 바보공, 귀염공, 다정공, 비굴공, 은근공 등으로, 수는 꽃수, 완(벽)수, 비굴수, 천상수, 능동수, 강수, 앙탈수, 약수, 여왕수 등등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이 공과 수를 수식하는 각각의 자질은 그 자체로 ‘강’, ‘약’, ‘꽃’ 등에서 보이듯 공유될 때가 많다. 그리고 전천(후) 혹은 리버스(reverse; 전환)라는 용어에서 예상하듯 그 구분 자체를 넘나드는 캐릭터도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수의 구별은 팬픽을 쓰고, 읽는 주체의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드로 작용하고 있다. 팬픽을 읽을 때 독자들은 제목 앞에 ‘○(공)×○(수)’ 혹은 ‘○공○수’로 표시된 공수를 드러내는 표제를 먼저 본다. 그리고 팬픽을 쓰는 작가들 역시 대체로 공수의 할당으로부터 캐릭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수 구별은 남녀라는 젠더 구분을 체화한 상태에서 공유 가능한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은 주인공 양측이 모두 남자라는 전제 때문에 더욱 강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남-남 러브스토리에서 아무리 공수를 명확히 설정한다고 해도, 팬픽의 독자와 작가는 모두 이들에게서 남-녀 커플과 다른 지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여성적인 수라고 해도 그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 공으로부터 미묘한 엇갈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낯선 극적 긴장감은, 팬픽의 독자와 작가 모두가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이성애적 구도 속의 남자들과는 같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팬픽의 공수 설정에 대한 선호 문제는 그들 각자의 성별적 전형성이 아닌 남-남 조합의 역동적 창출에 초점이 두고 이해되어야 한다. 보통 ‘커플링(coupling)’이라고 하는 이 행위를 놓고 때로 격렬한 토론까지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팬픽의 외설성 논란과 관련해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커플링이 여성다운 자질, 혹은 남성다운 태도에서 비롯하기는 하지만, 더 강력하게는 성관계에서의 역할에서 연유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간단히 공은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쪽이고 수는 흡입하는 쪽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할 때 팬픽을 통해 향유되는 쾌락은 기본적으로 이 남-남 커플의 사랑을 외부에서 육체적으로 관음하는 데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남성 포르노에 존재하는 여성 동성애물에는 남성 스스로가 두 여성 사이에 개입되어 있고, 남성이 그 컨셉의 중심이 되는 것과 다르다.)

필자는 이를 두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을 형성하고 또 그를 실천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이 팔루스적 상징 권위를 물리적 페니스 자체로 유희하는 것으로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페니스를 가지지 않은 여성이 남성 페니스의 쾌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한유림은 팬픽에서 삽입되지 못한 수의 페니스를 유희하는 장면을 특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삽입과 상관없이 드러난 페니스, 이 감각에 대한 상상이 팬픽이 설정하는 공수 구도와 유사 이성애적 관계로 포섭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는 삽입과 상관없는 잉여적 쾌락을 적극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관련 논의는 한유림,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를 통해 본 젠더 트러블”, 서울대 여성학 석사논문, 2008, 103쪽)  

이렇게 물리적으로 여성을 제거하고 남성을 바라보는 이 이상한 실천은, 팬픽을 쓰고 읽는 주체 역시도 결코 남-녀의 구도 속에서 자신을 놓는 것과 다른 경험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는 전술했던 여성의 성을 침범할 수 있다는 남성의 권위적 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말한다. 여성들의 남-남 관계를 둘러싸고 피어나는 에로티카(erotica)적 환상이 단지 여성으로서 임신 등의 문제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라는 대답은, 그 의도는 호의적일지라도 결과적으로 대단히 착오적이다. 그러한 방어적인 해석은, 팬픽의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 그리고 그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증적 탐닉에 대해서는 회피하게 된다.

그러니까 팬픽은 ‘여성들의 포르노’라고 명명되어 왔던 것이다. 그 억압적 측면까지를 포괄해서 당연히 남성들의 것으로 여겨지던 포르노가, 어떻게 여성이라는 이름과 맞붙어 쓰일 수 있게 되었을까. 이렇게 불편하게 여겨지는 이 명명은, 당연히 그를 둘러싼 여성 주체들의 정치적 올바름까지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직접적인 성 행위, 그것도 공수에 근간한 남성들의 관계를 즐긴다는 것은, 현실의 동성애에 대한 태도 및 그 실제적 효과와 관련해서 더욱 우려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필자는 포르노라는 것은, 그 환상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 근거해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포르노에서의 특정 재현을 문제 삼는 것은, 그 환상이 어떠한 정치문화적 사회 맥락을 만나 실천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한마디로 “포르노는 에로틱한 표현물을 소비하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억압에 그 개인이 어떻게 자의 타의로 공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더욱 가깝다.” (관련 논의는 김현미, “디지털 포르노그래피: 폭력과 욕망 사이”,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 연대출판부, 2007, 256~257쪽 참고.)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

 

그렇다면 이러한 남-남 동성 간 사랑이야기에 여성이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지를 일단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동성 서사에 여성은 그 자체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종종 팬픽에 등장하는, 이성애 문법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오히려 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동정은 할지언정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적대적이기조차 하다. 그러하기에 이 남-남 관계를 이성애적 여성이 아닌 위치에서,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실제로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에 관해서는 간단히 정리할 수가 없다. 물론 흥미롭게도 이러한 ‘변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지탄은, ‘변태’ 남성이 성범죄적 측면에서 문제시되는 것과 달리, 연애-결혼-출산 등 자연화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분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이 재현물의 소비를 둘러싼 사회적 비판의 다른 양상은 팬픽을 위시한 남성 동성 서사의 효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 ‘부녀자(腐女子)’들이 과연 그 재현 대상을 억압하는 데까지 나가게 되었던 것일까. 이 질문을 마음에 두고, 다음 회에서는 우선 이 동성 서사를 여성들이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그 쾌락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팬픽을 둘러싼 실천이 어떤 맥락에서 돌출되었던 것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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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