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적인 탄생?

    

 

   
 

그날 모스크바에는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한밤중에 서른두 살의 에카테리나 크리보시랴포봐는 배가 너무 아파 눈을 떴다. 진통이었다. 초산이었으나 에카테리나는 차분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줄리엣 버틀러, 13)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고 무작정 병원으로 오라고만 하더군요. 걱정할 것 없다면서.” 

하지만 상대방의 말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달려 나갔다. 그런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몇 주 동안 이어지던 따뜻한 봄볕이 아니라 폭설이었다. 눈 때문에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자동차는 범퍼까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회색 하늘은 여전히 눈발을 퍼붓고 있었다. (
콜라핀토, 26)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이나 자서전 유의 작품에서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진부한 방법 중 하나는 험상궂은 날씨나 자연재해다.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거나 무더운 여름날 갑자기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식이다. 자연 풍경을 어둡고 또 불안하게 연출하여 앞으로 발생할 ‘무서운 재앙’을 암시한다. 물론 이 사건을 기다리는 이들은 늘 여유롭다. 혹은 별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저 갑작스레 변한 날씨에 조금 놀랄 뿐, 여유로운 기분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대비는 매우 진부하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지금도 자주 쓰이는 수사다. 그리고 독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건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각각의 글이 앞으로 제시할 사건은 무엇인가? 독자는 어떤 사건과 조우하게 될까?

우선 줄리엣 버틀러의 글을 확인하자. 1950년 1월 3일, 출산을 앞둔 크리보시랴포봐는 차분하다. 그는 여성이라면 출산 경험쯤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침착하게 대처한다. 그러나 바깥은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더욱이 남편은 야근이라 집엔 크리보시랴포봐 혼자다. 이 대비가 암시하는 것은 크리보시랴포봐의 죽음이나 난산이 아니다. 출산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죽음의 입구에서 되돌아오는 난산은 아니었다. 태어난 아이가 조금 낯설었을 뿐이다.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이는 흔히 샴쌍둥이라고 부르는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였다.
 



마샤와 다샤
사진출처: http://criterioncollection.blogspot.com/2009/01/89-sisters.html 2010.11.01. 접근 

 


마샤와 다샤, 십대 시절의 모습
사진출처: http://www.phreeque.com/masha_dasha.html 2010.11.01. 접근
  

마샤와 다샤(Masha and Dasha Krivoshlyapova)라 불린 이 쌍둥이 자매는 태어난 직후 의사의 판단으로 부모와 헤어졌다. 의사는 부모에게 아이의 출산을 함구할 것을 강요했다. 의료진은 이 두 자매를 괴물스러운 존재로 여기며 곧 죽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실험 병동으로 두 자매를 이송한 후, 마샤와 다샤의 부모에게 두 딸이 한 달도 안 되어 죽었다는 거짓 보고를 했다. 의료진은 쌍둥이에게 각종 생체 실험을 자행했다. 마샤에게 침을 찌르면 다샤가 아픈지 알아보는 실험부터 방사능 실험까지 의료 지식의 증가와 의학 발전을 명목으로 실험을 정당화했다. 이 실험을 진행하는 데 마샤와 다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의사는 결합형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몇 주 안에, 한 달 안에, 다시 일 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둘은 50년 이상을 살다 2003년 4월 17일 고인이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줄리엣 버틀러 책 참조)

다음 콜라핀토의 인용구를 확인하자. 두 사람, 라이머 부부는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쌍둥이가 병원에서 포경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워낙 유명한 전문 병원이라 부부는 걱정하지 않았다. 수술이 잘 끝났으니 데려가라는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집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나서 황급히 병원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바깥은 이미 봄날의 날씨가 아니었다.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동네 주민들이 생생히 기억할 정도의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부는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그들을 기다리던 소식은 “걱정할 것 없”는 사건이 아니었다. 포경 수술을 하다 쌍둥이 첫째가 음경에 화상을 입은 것이다. 회복 불능의 사고였고, 평생 음경 없는 남자로 살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존/조안 사례(John/Joan Case)로도 알려진 데이비드 라이머(David Reimer)다. 널리 알려져 있듯, 데이비드 라이머는 존 머니(John Money)란 의사를 만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자 아이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머니는 데이비드가 여자로서 잘 살고 있음을 의학계에 발표하며 젠더 정체성에 양육 환경이 중요하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재차 주장했다.  

 



데이비드 라이머, 어린 시절
사진출처: http://www.intersexualite.org/David.html 2010.11.01. 접근

 

데이비드 라이머, 십대 시절. 왼쪽은 쌍둥이 동생, 오른쪽이 데이비드 라이머.
사진출처: http://www.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20309661 2010.11.01. 접근
 

그러나 머니의 주장과 달리, 데이비드는 여성 젠더 범주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못했다. 가끔 여성으로 살고자 노력했지만, 여성 젠더 범주를 강요하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 불화했다. 그리고 결국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다시 남성으로 재성전환 수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콜라핀토, 주디스 버틀러 참조. 개략 내용은 A, B 참조) 

  

  

재성전환 후 다시 남성으로 살기 시작한 데이비드 라이머의 모습
사진출처: http://goo.gl/lPOcL 2010.11.09. 접근
 


마그릿 쉴드릭(Margrit Shildrick)이나 빅토리아 피츠(Victoria Pitts)를 비롯하여 몸 변형을 주제로 삼는 몸 이론가들은 괴물스러운 몸이 전통적으로 신의 저주, 불길함의 전조로 다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지배적인 몸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 이들은 늘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자 관리/통제의 대상이었으며, 의학 실험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등장할 때면, 인간은 미처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해도 자연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갑작스런 일기 변화가 찾아온다. 마치 이들의 등장과 날씨가 밀접한 관련이라도 있다는 듯. 마치 괴물스럽거나 낯선 사고를 겪는 존재는 태어나기 전부터 혹은 갓난아기 때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듯. 예부터 전통적으로 쌍둥이는 신의 말을 전하는 존재이자 불길한 출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마샤와 다샤, 데이비드 라이머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을 각각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런 우연이 사회적 불안과 불길한 미래의 암시라면, 내가 일요일에 태어난 것도 신의 저주였을까? 나는 일요일에 태어났는데, 그 시절 대부분의 병원이 문을 열지 않아 문을 연 병원을 찾느라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길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별 볼 일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생애에 대해 쓴다면, 그때의 경험은 내 일생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쓰일까? 콜라핀토가 책 곳곳에서 사건이 있던 날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일요일에 태어난 것 역시 그런 이정표가 될까? 그렇다면 문을 연 산부인과가 거의 없는 일요일에 태어난 나의 출생은 역시나 신의 계시 혹은 어떤 ‘불운’의 전조일까? 트랜스젠더이면서 레즈비언이기도 한 나의 삶은 내가 일요일에 태어났다는 것과 상관이 있는 걸까? 불길한 날 혹은 조금은 다른 날 태어난 이들은 모두 괴물스러운 존재로 예정되는 것일까? 나는 나와 같은 날, 그저 시간만 조금 다른 때 태어난 이들을 몇 명 알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이성애 남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소위 말하는 ‘엄친아’로 잘살고 있다.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이들의 삶은 나와 어째서 다른 것일까? 다른 말로, 마샤와 다샤가 태어난 날 다른 병원에서 태어난 분리형 일란성 쌍둥이 혹은 외둥이 아이들, 데이비드 라이머가 수술을 받던 날 같은 병원에 있던 다른 이들은 어째서 이들과 다른 삶을 살았던 걸까?

날씨와 날짜, 혹은 특정 시기로 개인의 운명을 연출하는 서사는 괴물스러운 몸을 가진 존재가 불길함과 불안을 품고 있는 존재이자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전통적인 인식을 답습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불길한 존재로 만들어 그 사회의 문화적 불안을 그들에게 온통 쏟아 붓고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자 개인의 문제라며 사회에서 추방한다. 날씨 등의 묘사는 이를 정당한 일로 (재)생산한다. 이들이 불길한 것도, 불행한 삶을 사는 것도 모두 자연 질서이자 개인의 문제라는 듯. 몇 달 전, 부산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의 용의자 김길태 씨의 이름을 두고, ‘길에서 태어났다’는 뜻임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규범적 이성애 가족 내에서의 출생만을 정상화/규범화했던 것처럼. (지배) 규범적이지 않은 가족과 출생은 마치 그 자체로 불행이자 사회적 악의 원흉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학적 거세(법 용어로는 ‘성충동 약물치료’)를 주요 주제로 잡은 이 글이, 괴물스러운 몸의 출생과 이를 둘러싼 반응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물스러운 몸과 화학적 거세 이슈가 무슨 상관인 걸까? 피상적으로 접근할 때 이 둘은 별개의 사건이다. 경우에 따라 이 둘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면, ‘괴물스러운 몸’으로 불리는 이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는 접근이다. 화학적 거세 대상자이자 아동 성폭력 가해자를 괴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괴물’이라는, 뉘앙스는 동일하지 않지만 표기법은 동일한 공통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외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나 역시 조두순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가해 사건 소식을 접하며, 트랜스젠더 이슈와의 접점을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를 강하게 주장하는 여론과 이를 정말로 법제화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접하며, 나의 무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학적 거세는 트랜스젠더의 핵심 이슈 중 하나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 논의를 계기로 이 사건에 접근하며, 조두순과 같은 이들을 대하는 이 사회의 지배 규범적 태도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괴물스러운 몸/존재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글에서 지배 규범이 그 자신을 순수하고 안정된 장치이자 제도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낯선 몸, 위반하는 몸, 그리고 법을 어기는 몸을 괴물로 만드는 역사와 그 인식을 살피고자 한다. 이 몸들은 언제나 동일하거나 유사한 제도를 통해 감금되고 통제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는 있을까? 구분할 수 있다면 어째서일까? 구분할 수 없다면 어째서일까?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지배 규범, 혹은 주류 사회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학적 거세를 통해 한 개인을 괴물로 추방할 때, 이 추방이 실제 이루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런 일련의 ‘진부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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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 to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국회 회의록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유아(다음에 꼭 같이 글 써요!), 흥미로운 책과 논문을 알려준 당고와 진홍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장애-퀴어 세미나 모임과 나의 나태함을 인내하며 간신히 꾸려가고 있는 TQueer 웹진 구성원들, 그리고 구금시설 관련 공부와 토론을 함께한 진홍과 유섹인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특히 고맙다. 아울러 이번 기획을 함께한 분들, 이번 기획의 시발점인 KSCRC(및 아카데미) 활동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KSCRC 사무실 보증금 마련 프로젝트(http://rcdream.egloos.com/ 참고)가 꼭 성공해서 이사하지 않아도 되길!! 그나저나…… 책에 관심 없는 리카는 그렇다고 해도, 책과 논문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며 이빨 자국을 잔뜩 남기면서도 정작 글은 안 쓰는 바람은 왜 그러는 것이냐! 고양이면 다냐!! 우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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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규범적인 가족들의 이해를 얻을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