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일링


스케일링[scaling] : 치아표면에 붙어 있는 치태, 치석, 니코틴, 색소 등을 제거하는 치료법.

윙~ 지직, 지직, 윙~
망할 놈의 기계는 이빨에 구멍을 뚫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
치신경에 금속성 물질이라도 찔러 데는 듯한 싸-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흐른다.
"내 돈 주고 뭔 고생이람?"

그때, 살며시 실눈을 뜨자 한치 앞으로 다가선 그녀와 마주한다.
은은한 샴푸향기와 늘어진 옷가지가 나의 얼굴을 스친다.
입속을 가득 메운 기계들만 없다면, 그녀의 코와 입을 막은 마스크만 없다면,
어느 연인들이 이만치 다정할 수 있을까....
‘윙~’ 하며 치석을 깎아내는 소리는 발라드 음악으로 바뀌고
치과의사를 애인으로 둔 나의 입가엔 음흉한 미소가 번진다.

화답이라도 하듯 그녀는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감미롭게 속삭인다.
경직된 몸은 일순간에 나른해지고,
첫사랑의 키스가 감미롭게 떠오르는 순간,
“입술에 힘 빼라니까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선 그녀에 대한 원망만 가득하다...




- memo
  치아건강을 위해 일년에 한번은 꼭 스케일링 받으세요.
  혹시 압니까? 근사한 일이 벌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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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갤러리를 가다


prologue

로댕, 로댕의 손길을 느끼다.
새해의 두 번째 날, 로댕갤러리로 향한다.
뭐, 미술이나 조각에 남다른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서현님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로댕갤러리인지라 이번 서울행에서 꼭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시청 앞을 지난다. 몇 해 전 시청 광장의 설계 공모에서 서현님의 ‘빛의 광장’이 당선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잔디광장으로 변해버렸다. 탁상행정으로 왜곡된 건축가(아니 예술가다!)의 노력이 안타깝다.
태평로를 따라 걷자 저기에 남대문(숭례문)이 보인다. 사람의 마을과 동떨어져 자동차 물결에 휩싸인 외딴 섬 같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문을 누가 대문이라 하겠는가. 문화제보호와 도시계획의 여건상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일단은 사람들이 쉬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문화여야 하지 않을까...




1. 로댕갤러리

삼성생명 본관 옆에 로댕갤러리가 보인다. 반투명 유리로 둥글게 장식된 갤러리로 로댕의 조각상을 들여오면서 만들었다.
“로댕을 담을 건물이 필요했다. 건축가가 직면한 문제는 모순된 것들이었다. 로댕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수준의 건물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로댕과 싸우겠다고 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건물은 로댕을 담는 그릇이고 로댕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심해서도 안 되고, 무신경해서도 안 된다. 거듭, 필요한 것은 로댕의 수준에 맞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2. 깔레의 시민

건물을 들어서자 먼저 <깔레의 시민>이 보인다.
“로댕의 대표적인 공공기념조각인 <깔레의 시민>은 프랑스 북서부의 항구도시인 깔레시의 의뢰를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백년전쟁 당시 깔레시의 대표자 여섯 명이 위기의 상황에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여섯 인물상은 각각 따로 제작하여 마지막에 결합했으며, 옷을 입히기 전에 먼저 나신상을 만들고 의상을 덧씌운 것이다.
똑바로 서서 양발에 고루 무게를 둔 장 데르의 인물의 동세를 강조하는 콘트립포스토의 전통에서 비켜나 있지만 근육질 나신상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에 전혀 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로댕갤러리, <근대조각 3인전> 작품설명서에서)

한 가닥의 근섬유에서 시작된 요동은 힘줄을 타고 몸 전체로 퍼지며 청동조각을 박살낼 것 같다. 그 힘의 끝에 선 여섯 영웅은 검게 그을린 집념처럼 단단해 보인다.
빙그르 한바퀴 돌면서 깔레의 영웅담을 둘러본다. 아니 각 조각들을 나신으로 만들고 거기다 옷을 덧씌우며 작업했다는 로댕의 진지함을 느껴본다.




3. 지옥의 문

그 뒤로는 고뇌하는 철학자의 굳게 다문 ‘입’처럼 엄청난 무게감으로 무장한 <지옥의 문>이 보인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신축 장식미술관 입구의 대형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는다. 당시 단테의 신곡에 심취해 있던 로댕은 신곡의 <지옥>편을 소재로 한 수백 개의 드로잉과 인물습작을 거쳐 <지옥의 문>을 제작해내었다. <지옥의 문> 안의 인물들은 각각 독립적인 조각작품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지옥의 문> 상단 상인방 중앙에 홀로 자리잡은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 구성의 중심이자 작품을 지배하는 형상으로, 로댕의 정신적인 자화상이며 동시에 사유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댕갤러리, <근대조각 3인전> 작품설명서에서)

끈끈한 개펄에서 힘겹게 버둥거리는 토막 난 지렁이처럼 수많은 군상들이 검은 어둠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남자... 그를 중심으로 ‘T'자형으로 길게 뻗은 문틈(수직선)은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처럼 부각되어 보인다.




episode

그때! 지.옥.을 보았다.
굳게 닫힌 <지옥의 문>을 살짝 비켜서자 생전 처음으로 지옥의 실체와 마주한다. ...
지옥은 네모다. 하얀색의 네모... ^^



계속해서 부르델, 마이욜의 조각작품을 둘러본다. 마침 가이드의 작품설명이 있어 좀더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열심히 설명하던 ‘그녀’도 어느 조각상 못지않게 예뻤다.
아무튼 이것도 여행인지라 그냥 마무리할 수는 없는 일. 막걸리 한사발로 로댕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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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달리는 지하철에서 법정스님이 전하는 자연의 가르침을 듣는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달빛 넘어가는 소리가 지하철의 소음 속에서 나를 해방시킨다. 마치 이 열차가 저 산기슭의 고요한 오두막으로 달려가는 듯 하다. 어쩌면 스님과 차라도 한잔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책속에서 퍼진 은은한 향이 도심의 지하를 가득 메운다.

문득 산이 보고 싶어진다. 스님이 말한 자연과 직접 대화하며 온몸으로 걷고 싶다.
주변엔 온통 나무와 하늘, 산뿐이며 이름모를 곤충과 산새가 내 옆을 지나간다. 쉬엄쉬엄 구릉을 오르자 나무도 하늘도 쉬엄쉬엄 따라온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상쾌한 공기는 탁한 가슴을 씻어 내린다. 상상만으로도 시원해진다.

또한 스님이 읽은 여러 책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무소유>를 통해 알게 된 <어린왕자>처럼 스님을 통해 알게 된 책들 역시 아름답고 소중하게 읽은 기억이 난다. 나에게 있어 법정스님의 한마디가 어떤 추천사나 서평보다도 더 좋은 기준이 되는 것 같다.
‘홀로 사는’ 스님이 이번엔 허균의 <한정록>을 읽어보라 귀띔한다.

스님은 욕심을 버리라지만 이 책을 읽은 지금, 난 또 하나의 욕심이 늘어난 기분이다.
글에 대한 욕심이 그것인데 “채식을 해서 글이 이리도 소소하고 맛깔스러운가?” 하는 우스갯말까지 떠오를 정도다. 화려하거나 격정적이지 않지만 그 속에 흘러넘치는 여운으로 온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다. 법정스님이 글을 쓴 게 아니라 깊이 있고 온화한 글이 법정스님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단순하게 살고, 정갈하게 적고 싶다. 스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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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시절 건축공학과를 기웃거리던 관심 때문인지 길거리의 건설 현장이나 이런류의 인문에세이를 관심 있게 둘러보곤 했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서현님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다. 수학과 공학, 미적 감각을 동시에 요하는 딱딱하고 어려운(건축역학 같은 과목은 정말이지 돌아버린다!) 학문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건물과 문화로 쉽게 풀어놓은 책이었다.
이렇게 서현이라는 건축가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던 차에 우연히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건물의 벽면에 흐르는 하얀색의 빛과 까만색 표시가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 책 제목과 표지만 봤을 뿐인데도 그 책에 담겨있을 서현님만의 수수한 건축냄새가 느껴지는 듯 했다.
들뜬 마음에 코를 벌름거리며 책장을 넘긴다. ^^

점, 선, 면을 통해 그림을 그려나가듯 건축에 대해 기본부터 하나하나 설명한다. 연필을 세워 구도를 잡고 도화지 위에 선과 면을 채워나가자 어느새 다가온 미술선생님처럼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초보는 최고의 건축수업을 받는다.
그렇게 그를 따라 그림을 그려가다 보면 순간, 화면 가득히 멋들어진 건물 한 채가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방일 수도 있고, 첨단으로 가득한 테헤란 로의 빌딩이나 한강을 가로지르는 트러스 다리가 되기도 한다.
또한 안전한 건축을 위해 필요한 압축력, 인장력, 벤딩모멘트 등 어려울 수 있는 전문적인 내용들이 일상의 예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 우리가 서 있으면 무릎 관절은 압축력(눌려지는 힘)이, 철봉에 매달린 팔에는 인장력이(늘어나는 힘)이, 물고기를 낚는 휘어진 낚싯대는 벤딩모멘트(휨에 지탱하는 힘)가 발생한다고 명쾌하게 설명하고는 이들이 어떻게 건축물에 활용되고 응용되는지 사진으로 보여준다.

꼼꼼하게 건축의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한 다음에는 과거와 현재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잘 만들어진 건축을 마주할 때면 용돈이라도 받아 쥔 동네 꼬마들처럼 흥분하고 기뻐한다. 각 페이지의 글자들도 경쾌하게 들썩거린다.
물론 잘 다듬어진, 인간과 주변의 환경에 잘 조화된 건물에 비해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기에 그의 눈매는 늘 부드러움과 매서움이 교차한다. 그저 기와지붕만 올려놓았다고 ‘전통’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없듯 문화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건축을 쉽게 설명한 내용 뿐 아니라 그것의 아름다움을 흠뻑 느낄 수 있게끔 절묘하게 감아 치는 글맛 역시 어느 문학가 못지않다.
“건축가는 공간이라는 악보에 크레센도(cresc)와 디크레센도(decresc)의 악상 기호를 붙이면서 건물을 만들어나간다. 창, 문, 계단, 복도로 공간을 이어가면서 그 매듭의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얼핏 비춰 보여주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공간의 드라마를 엮어나가는 것이다.” (p174)
건축가가 아닌 문학가로서 ‘금자탑’을 쌓아도 될 듯싶다. 건축이라는 공학을 뛰어넘는 서현님의 폭넓은 감성과 인문지식이 인상 깊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어느 문인의 말처럼 일상에서 건성으로 둘러봤던 건물과 심지어 그 주변의 나무, 그리고 빛과 그림자까지도 새롭게 보인다.
나는 이 책의 사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싶어진다. 그래서 달 빛 내리는 그 건축물을 음미하며 옅은 음악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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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강렬하고도 난감했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통해 알게 된 ‘김영하’님이 최근 주요 문학상(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싹쓸이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의 단편을 인상 깊게 읽기도 했지만 “감각적인 글이 돋보이는 신세대 작가” 정도로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얼마간은 쇼프로를 도배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게 되는 고만고만한 반짝 가수처럼 곧 그 유행이 시들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젊고 색다르다고 해서 깊이가 없고, 그래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빠가 돌아왔다>나 <검은 꽃>을 통해 왕성하고 야무진 ‘그만의’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나러 간다. 감각을 넘어선 깊이를 찾아 <검은 꽃>으로 달려간다.

이야기는 한 젊은이(이정)가 총에 맞아 죽으면서 시작된다. 멀리 이국땅의 늪에 처박힌 체 꺼져가는 의식이지만 오히려 지난날의 일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1905년 고향을 등진 1033명의 한인들은 일포드 호에 몸을 싣고 멕시코로 떠난다. 몰락한 양반, 전직 군인, 농민, 도시 부랑자, 파계 신부, 박수무당, 내시 등 다양한 신분의 이민자들이었지만 아픔과 절망에 대한 마지막 선택이라는 점에선 모두가 같았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멕시코는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민자가 아니라 채무 노예로써 팔려왔던 것이다. 달콤한 감언이설에 속은 자신을 한탄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찌는 듯한 열기와 고된 노동, 턱없이 낮은 대가는 그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풍전등화의 조선 운명처럼 위태로운 삶이었다.
그렇게 수년간의 농장생활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멕시코 거리를 전전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일부는 멕시코 내전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남의나라 전쟁인지라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우리의 우울한 이민사지만 간결하고 긴박하게 써내려간 김영하님의 글빨에 유쾌한 축제를 대하듯 몰입하게 된다. 거기다 짧게 구성된 단락은 여려 주인공들의 ‘주목받지 못한 삶’을 한 컷, 한 컷의 슬라이드처럼 비춰준다.
편안하게 앉아, 거친 숨소리를 느끼며, 슬픈 이민사를 들여다본다.

또한 소설에서 다룬 역사, 국가, 전쟁, 전통, 사랑, 인권, 종교 등 다양한 내용 중에 특히 종교에 대한 역설인 기억에 남는다.
가톨릭을 맹신하는 멕시코의 지주(이그나시오)는 한인들의 굿판을 우상숭배로 곡해하고는 무당을 잡아 잔혹한 매질을 가한다. 그리고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며 짓이겨진 벌레 대하듯 한인들에게 중얼거린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박광수(전직 신부)는 그런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지만 권력의 힘 앞에선 역부족이다. 얻어맞던 박광수는 광기에 휩싸인 지주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지만 그들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서글프다.
탈출구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각양각색의 인간군상과 이들의 고통을 보듬어 주지 못했던 나약한 국가, 그래서 저 멀리 이국땅으로 내몰린 백성들... 그들이 이유도 모른 체 당해야했던 매질과 목적 없이 참여했던 전쟁처럼 사회와 인간에게 가해지게 되는 ‘폭력’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히 살아남았다. 멀리 이국땅에서 정착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오늘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땀과 눈물의 응어리로 일군 <검은 꽃>을...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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