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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산책가
카르스텐 헨 지음, 이나영 옮김 / 그러나 / 2023년 4월
평점 :
마음 한 구석에 난로의 온기가 퍼져나가는 느낌(진짜 문자 그대로다)을 받게 되는 작품이다. 얼마 전 다른 책의 리뷰에서 온라인 서점 이야기를 썼는데, 온라인 서점 애용자인 나는 이 작품을 읽고 감동받으면 안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다.
독일의 한 동네 책방인 '암 슈타토어'의 오래된 직원인 칼은 서점의 고객들이 어떤 책을 읽고 싶어하는지 꿰뚫고 있다. 그래서 서점에 찾아오는 고객들을 위해 책을 추천해주고 사정이 있어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 고객들을 위해서는 직접 책을 배달해주기도 한다. 이는 이제는 은퇴한 서점의 전 사장이 있을 때부터 해오던 것으로 암 슈타토어만의 전통이자 특별 서비스로 신문에 소개되기까지 했다. 지금은 전 사장의 딸이 서점을 이어받았는데 그녀는 이런 고리타분한 운영 방식이 못마땅하다.
칼은 자신의 책 배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단 한권일지라도 고객을 위해 책을 배달한다. 칼은 자신이 책을 배달하는 고객들에게 어울리는 책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여준다. 거기에는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도 있고 '에피 브리스트'의 에피도 있고 '삐삐'의 롱스타킹, 파우스트 박사, 헤라클레스도 있으며 '책 읽어주는 남자'의 미하엘 베르크도 있다. 책 배달은 칼의 루틴이면서 일종의 의식이다.
진짜 재미는 칼이 책배달을 위해 대성당광장을 지나가던 중 만난 9살 소녀 샤샤와 함께 시작된다. 칼을 책산책가라고 부르는 샤샤는 칼의 조용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지만 어느 새 칼은 샤샤가 없는 책 배달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근데 이 아홉살짜리 꼬마가 명물이다. 책 속의 뼈 때리는 말과 웃음은 샤샤의 몫이다. 70대 노인과 9살짜리 꼬마의 티격태격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은 누가 책 배달을 하러 직접 찾아온다고 하면 기겁할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이런 마법같은 시대가 한 때는 있었다는 '라떼'의 위로가 담긴 작품이다.
* P.S.1 - 샤샤의 명언 중 베스트 하나, 칼이 해고될 뻔 한 날 칼을 만난 샤샤가 하는 말.
"오늘은 달라 보이세요"
"난 같은 사람인걸."
"눈이 달라요"
"나한테는 눈이 이 한 쌍뿐이라서 다른 걸로 바꿀 수가 없단다"
"우셨어요?"
"아니"
"혹시 속으로 우셨어요? 눈에서 눈물 나게 말고 마음에서 눈물 나게 우는 거 말이에요"
"마음에서 눈물 나게?"
"그게 가능하다면요"
"그랬다면 내 눈은 왜 달라 보이는거니?"
"부끄러워하는 거죠. 사실 우는 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P.S.2 - 롱스타킹부인은 책 속 오탈자를 못참는다. 칼이 책 배달을 올 때마다 책 속에서 발견한 오탈자를 화두로 던지고 칼은 그 오탈자를 제대로 해석해 내야만 한다. 근데 그 오탈자가 분명 독일어일텐데 그걸 우리 말로 기막히게 번역한 번역가님도 대단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