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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일본의 신진 평론가 사사키 아타루의 책이다. 현재 일본에서 그는 아즈마 히로키와 더불어 가장 떠오르는 젊은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이 책의 출간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조금 의아했다. 2009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2010년에 국내에도 번역된 사사키 아쓰시의『현대 일본 사상-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에서는 2000년대 일본 사상계는 사실상 아즈마 히로키의 독무대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사사키 아타루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글쓰기 또는 문학이 가진 위대함, 그 혁명적 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가 드는 혁명의 범례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 아니 루터의 '대혁명'이다. 루터가 주도한 사건이 단순히 종교적 개혁이 아니라 혁명, 그것도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대혁명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0)

 

저자는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니며,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지극히 편파적이고 비약이 심한 주장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왠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그만큼 언어와 텍스트의 힘에 대해 무지한 것일지 모른다는 자책감만 늘어날 뿐이다. 그만큼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의 차원을 넘어 강한 흡입력과 호소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논리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감응의 문제일 것이다.

 

혁명은 일의적으로 폭력혁명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폭력혁명이 유일한 혁명이고, 혁명의 ‘전부’일까요? 다른 혁명은 있을 수 없는 걸까요? 혁명의 다른 형식이 있을 수 있었고,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좌익이건 우익이건―보수혁명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모두 이 점을 눈여겨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폭력혁명이 아니면 혁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폭력이야말로 급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폭력을 입에 담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급진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거라고 겁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폭력혁명을 직접적으로 주창하면 놀랄 만큼 무참했던 학살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겁내고 있습니다. (p.69)

 

여기서 우리는 급진=혁명=폭력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저자가 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혁명의 본체는 텍스트다. 결코 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이 선행하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을 좌우하는 것이지, 폭력은 혁명에 있어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혁명을 폭력적인 것의 차원에서만 한정짓는 이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radical을 '급진적(인)'으로 번역하면서 그것을 '점진적(인)' 것과 대조시켜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급진적인 것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혁명이란 곧 단기적인 행동으로 과격하게 모든 것을 바꾸는 것, 그래서 언제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급진적인 혁명은 언제나 점진적인 개혁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논리의 절차야말로 혁명을 (물리적) 폭력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닮아 있는 것이다.  


영어의 radical이란 단어는 보통 우리말로 ‘근본/근원적인’ 또는 ‘급진적인’으로 많이 번역된다. 특히 정치(학)과 관련해선 후자의 번역이 훨씬 일반적인 것 같다. ‘근본(적인)’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어단어인 ‘fundamental’이 있기 때문일 텐데, 영어에서도 radical과 fundamental이 politics와 결합할 때,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치/정치학/정치운동을 지시하므로 한국에선 대체로 radical을 ‘급진적(인)’으로 많이 번역하는 것 같다. 예컨대 라클라우와 무페로 대변되는 radical democracy를 ‘급진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일 듯. 아울러 정치적으로 근원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radicals’, 즉 ‘급진파/급진주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익숙하다.

 

문제는 radical을 우리말의 급진(急進)으로 번역할 경우, 그 의미가 “서둘러 급히 나아감”, 또는 “목적이나 이상 따위를 급히 실현하고자 함”으로 전이되어, 정치적 판단과 실천에 있어 비이성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주의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는 것. 그래서 급진적인 것의 대척점에 점진(漸進)적인 것이 놓이게 되고, radical은 점진적인 것과는 상반되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radical이 과연 점진적인 것과 상반되는 그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스럽다. 철저하게, 근원적으로, 발본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왜 무조건 과격하고 성급한 행동주의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radical democracy가 함의하는 실천의 원리에 점진적인 요소는 없을까?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발본적으로, 철저하게 변혁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radical democracy/radical politics를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제일원칙(상대성과 타자성의 인정)을 존중하는 가운데 실천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당연히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외면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더욱이 우리가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려야 할 폭력이란 것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권력의 폭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폭력,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의 차원을 망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철저한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과격한 수사와 행동만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혁명은 제도와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기 위해선 그 제도와 구조의 재생산을 가능케하는 언어와 이데올로기, 담론, 지식, 텍스트 등을 함께 바꾸는 실천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켜 좀 더 생각해보자. 굳이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차원의 체제 변혁을 이야기해온 이념과 사상의 전통을 떠올리는 데 마르크스주의만큼 친숙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자본이라고 하는 ‘실재’(the Real), 즉 자본주의 사회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구성적 적대란 의미에서 계급투쟁 혹은 계급적대를 주목해야 하고 또 그만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교의’의 핵심이다(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치의 조건들은 역사의 “토대”(base)나 “경제적 구조”(economic structure)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결정(determination)이 없다면 더 이상 고유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속에 있지 않은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아가 구성적 외부, 사회의 불가능성과 같은 라클라우/무페적 '실재'의 개념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발리바르의 구조적 인과성, 즉 스스로를 부재화하는 원인, 정치의 세 개념(정치의 자율성, 타율성, 타율성의 타율성), 복잡한 사회적 전체의 구조를 전제한 최종심급에서 경제의 과잉결정 등등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radical한, 즉 근원적인 차원(사회적인 것 즉 경제의 정치에 대한 우위, 계급적대의 실재적 차원 등)의 문제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적 현실 이해의 기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원의 radical한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것이, 곧바로 정치적 과격주의나 성급한 행동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오히려 radical한 사고, radical한 실천의 내용을 채워나가는데 있어 ‘점진적인 것’으로 지시되어 거부되던 마르크스주의 외부의 사상 전통에서도 이제는 충분히 배울 것이 많아진 것이다. 따라서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듯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실천은 급진적이냐, 점진적이냐, 또는 폭력적이냐 비폭력적이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발본적이며 얼마나 총체적이냐로 그 의미가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이 담고 있는 진의를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저자가 문학으로부터의, 문학에 의한, 문학의 혁명을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혁명이란 우리의 언어, 사고, 개념, 세계관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우리의 텍스트 자체를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출발점이자 목표라고 말했던 것은 비단 사사키 아타루만이 아니었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책을 남기고 떠난 미국의 대표적인 유럽 현대사가 토니 주트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토니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pp.174-175)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적어도 내겐 단순히 어느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의 자아도취적인 문학주의 선언문으로 읽히지 않았다. 대신에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이란 무엇이고, 그 혁명이 맞서야할 폭력이란 또 무엇이며, 언어와 사상, 텍스트가 어째서 혁명의 과업에 필수적인 일부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문학의 가치를 탐구하는 책도, 루터의 열정을 추적하는 책도, 독서의 재미를 증언하는 책도 아니다. 오직 언어로부터 시작되어 텍스트, 곧 세계 전체를 바꾸는 것으로 귀결되는 혁명의 절차와 논리를 탐구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혁명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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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신간리뷰 대상도서로 선정되는 책들이 솔직히 내 취향과 전혀 맞지 않은 탓도 있고, 내가 내 연구와 관련하여 다른 책들을 읽느라 바쁜 탓도 있고, 암튼 그래서 매번 리뷰를 남들보다 늦게 올리게 된다. 괜히 신간평가단을 자원했나 싶기도 하고, 이걸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나마 다음달에 리뷰를 써야할 책 두 권 중 한 권은 내가 읽으려고 진작에 사두었던 책이고 추천 페이퍼에도 넣었던 책이라 다행이다 싶은데, 문제는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암튼 다음달 리뷰는 마감 시한을 잘 맞춰서 써볼 생각이다.


오스트리아 이주민 출신의 사회학자로서 피터 버거 자신의 지적 모험담을 표방하는 이 책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는 (처음엔 많은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 3장을 넘어가면서 점점 그가 왜 우파 이데올로그가 되었는지를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자기궤변으로 읽혔다.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많은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 그러 했듯이, 피터 버거 역시 조국에서 경험한 파시즘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사회주의나 여타의 급진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들을 거의 도매급으로 비합리적인 광기에 휩싸인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일견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혁명적 열정의 폐해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런 적대감에 대한 학자로서의 명확한 근거는 별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경험과 성향과 맞지 않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책의 초반부는 상당히 재밌게 읽힌다. 가령 낯선 나라에 흘러 들어온 이주민으로서 얼떨결에 맞닥뜨린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기 원해, 뭣도 모르고 뉴욕 뉴스쿨에 입학해서 사회학 공부를 막 시작했던 20대 청년기에서부터, 점차 현대사회학의 한 흐름을 대변하는 영향력있는 사회학자로 성장해나가는 개인사도 흥미롭고, 그런 이력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 전후 미국사회의 혼란상과 역사적 변동에 대한 스케치도 문학적 세련됨이 느껴진다. 시종일관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한 명의 사회학자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구성지게 회고하는 수준높은 지적 자서전의 면모도 처음엔 살짝 엿보였다. 자기가 들은 수업, 자기가 쓴 글, 자기가 했던 강의, 조사, 연구, 그외 다양한 관계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버릴 곳이 없었다. 그런데 3장을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노골적인 우파 사회학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턴 정말 읽고 있기 힘들었다. 가령 이런 대목.


하지만 그러다 곧바로 루크만도 나도 공감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미친 듯이 설쳐’댔다. 이런 문화적 격별이 일으키는 불협화음 속에서 차분한 논조를 띤 우리의 책은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123쪽)

 

위의 이야기는 피터 버거가 뉴욕 뉴스쿨 시절의 동료인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과 공저하여 1966년에 출간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국역본: 『지식형성의 사회학』, 박충선 역, 1989, 기린원)이 그 탁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 본인들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사실 이 대목부터 버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버거가 말하는 이상주의가 미친 듯이 설쳐대던 그 시절은 다름 아닌 ‘68혁명’이 일어난 때였다. 아무리 버거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인이 그토록 누누이 자랑하듯이 사회학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다면 20세기 역사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68혁명’에 대해 저렇게 쉽게 규정해선 곤란하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68혁명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반권위주의의 슬로건 아래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사회주의 체제 모두에 저항했던 최초의 ‘세계혁명’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비록 68혁명이 어느 지역에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1970년대 공황기를 거치면서―운동의 여파가 여성운동, 생태운동, 점거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긴 했으나―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의 반격 아래 그 충격의 대부분이 흡수되면서 그 혁명적 의의가 망각되어 왔다지만(심지어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출현케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68혁명을 단순히 ‘록 페스티벌’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피터 버거의 사회학자로서의 역사적 소양이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은 68혁명을 록 페스티벌에 비유하고, 자신의 책을 실내악에 비유하면서 둘을 상반된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대조시키는 지점이다. 어떻게 한 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혁명적 사건과 사회학의 특정 진영에서나 그 가치를 겨우 인정받을 뿐인 사회학 책 한 권이 같은 범주에서 나란히 대조될 수 있는지, 버거의 맨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버거는 『현실의 사회적 구성』이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그 책이 나왔을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책이 성공을 거둔 데는 그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후 시대정신은 금세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 책이 죽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밀려드는 문화의 물마루를 탄 사람들 대다수가 그 책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탈취해 자신들만의 언어로 번역해버렸다. 말하자면 루크만과 나는 포스트모던화돼버린 것이다. 다소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우리 둘 다 한참 후에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127쪽)


버거의 얘기인즉슨, 루크만과 자신이 쓴 책은 결코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는데, 묘하게도 그 책은 그렇게 해석되었고, 그래서 자신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버거가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


모든 현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까닭에 객관적인 사실 같은 건 없거나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같은 건 없다. 사실상 사실은 없고 오로지 ‘서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서술들’을 인식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그것들을 ‘해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서술들이 하나같이 드러내고 있는 이해관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들은 언제나 권력 0의지의 표현이다. 계급, 인종, 또는 성의 권력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좌파 이데올로기들,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 ‘탈식민주의’, ‘제3세계주의’, 그리고 정체성 정치학의 그 모든 다양한 분파들(특히 급진적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과 연결된다. […]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다양한 ‘서술’만이 있다는—는 정신분열증의 정의와 거의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현실과 자신의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125~127쪽)


버거는 루크만과 자신이 현실의 사회적 구성을 이야기했을 때, 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객관적 사실 같은 건 없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단지 자신들은 현실이란 늘 사회적으로 해석되며 그런 해석에는 종종 권력의 이해관계가 들어간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며, 그렇게 구성되는 현실의 주관적 다양성과 조건적 차이를 강조했을 뿐, 아예 사회적 사실이나 객관적 현실 자체가 없다는 불가지론적/허무주의적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나로선 솔직히 버거가 비판하는 그런 극단적인 구성주의자들이 과연 정말 있을까 의심스럽다. 오히려 버거와 루크만이 사회적 실재가 객관적으로 또는 선험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대신에 그것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현실로 구성되어지는 과정을 진술하고 분석해냈던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적 사실이건 실제적 현실이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그 어떤 것들은 기실 알고 보면 우발적이고 다양한 조건들 속에 불안정하게 존재한다고 인식했던 포스트 담론과의 접점도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버거의 진술에서 더 가관인 것은 그 아래의 대목이다. 버거는 자신이 이런 사실, 즉 루크만과 공저한 『현실의 사회적 구성』이 포스트모던하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눈치채게 된 것은 1968년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 번역본이 나오고 얼마 뒤였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뉴스쿨 계간지인 《사회 조사》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책을 읽고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사내 둘이 찾아 와서 “우리는 혁명가다, 당신이 사회의 구성에 관해 썼던데 우리는 사회를 재구성하고 싶다. 우리 두목은 당신이 우리의 혁명 사업에 대해 충고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버거는 이들을 마치 무슨 건달이나 폭력배쯤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행간을 읽어보면 아무래도 이들은 정말로 라틴 아메리카의 무장 혁명조직 일원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들이 정말 혁명가들이었건 아니면 다소 모자란 몽상가들이었건 중요한 것은 그들을 대하는 버거의 태도이며, 또 그렇게 그들을 대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자신의 책이 혁명적 과업과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이 왜 그 책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된 결과물이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혁명을 꿈꾸는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둘 다 버거의 신념체계 속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주의적이고 정신분열증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것. 버거의 머리 속에선 그 둘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합치될지 모르지만, 독자들로선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조합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버거야말로 나에겐 대단히 분열증적이고 반동적인 보수주의의 이상을 가진 자로 보일 뿐이다(마치 한국의 수구꼴통들이 아무 데나 좌빨딱지를 붙이는 모습과 흡사해보인다).


이쯤에서 젊은 시절엔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사회학자 버거가 도대체 어쩌다 우파 이데올로그가 되어 이렇게까지 망가졌는가 몹시 궁금해졌다. 책에선 뉴스쿨에서 경험한 추방의 경험,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버거가 자신의 라인으로 사회학 교수진을 꾸리려다 좌파적 성향을 띤 동료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인데, 버거는 자신이 뉴스쿨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갈 수 있는 어떤 자격과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인양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뉴욕 뉴스쿨이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과학 연구를 주도하는 학교로서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버거 같은 보수주의자가 일찌감치 떠난 덕분일지도 모른다. 버거로서는 가슴 아픈 기억이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닌가 싶다.  


미국 공화당 당원이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이며, 종교적으로 중도보수 성향의 개신교도이고, 문화적으론 자유주의자인, 그러나 학문적으론 철저한 모더니스트를 자부하는 피터 버거. 어쩌면 그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보수성의 기저에는 그가 현실을 바라보는 대단히 나이브한 사회학적 관점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 예컨대 그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현상학적 사회학이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어떤 지점에서부터 버거의 보수적인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책에서 사회와 의식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전반적인 입장을 논했다. 우리는 그 관계가 ‘변증법적’이라고 말했다. 즉, 외재화, 객관화, 내재화의 세 과정이 계속 상호작용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외재화란 인간들의 공동으로 하나의 사회적 세계를 ‘생각해내는’ 과정이다. 객관화란 이런 사회적 세계가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을 넘어서고 초월해서 ‘단단해’ 보이는 실재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내재화란 이 객관적인 ‘외적’ 세계가 다양한 사회화 경험을 통해 개인의 의식 속으로 다시 투사되는, 어릴 때부터 시작돼서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다. 언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다. 그것은 다른 모든 제도의 패러다임이다. […] 그래서 언어는 사회와 의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다른 모든 제도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계를 ‘안다’. (119~121쪽) 

자신의 스승인 알프레드 슈츠를 계승한 버거와 루크만의 이른바 현상학적 사회학이 실증적 사회학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현상학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생활세계를 사회학적 분석에 끌여들였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훗설에 따르면, 생활세계, 즉 내가 속하고 경험하는 세계는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속하고 경험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을 이 세계를 경험하지만 내가 경험하는 세계 속에는 항상 타인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상호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생활세계는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체들도 모두 역사성을 가진 존재이다. 한 주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과거에 축적된 생활조건들을 물려받는데 이것은 곧 다른 주체들의 역사이다. 한 주체의 역사는 다른 주체들의 역사와 만나면서 생활세계 속에서 공동의 역사를 만들어가게 된다. 


생활세계가 상호주관적 세계라는 주장은 버거와 같은 현상학적 사회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타인들의 삶을 기술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회학자들에게 있어서 생활세계가 상호주관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이 사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이라는 것과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들과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기술,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로 기능했다. 실증적 사회학이 사회를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물리적 사물의 총합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현상학적 사회학은 세계가 주체에 의해 주관적으로 이해되고 파악된다는 것, 즉 현실의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구성 과정을 이론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학의 생활세계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전유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훗설의 현상학도 그렇고 버거의 현상학적 사회학도 그렇듯이, 모든 종류의 언어와 이성을 중시하는 의식철학적 사유는 주체(및 의식과 언어와 이성의 일체)의 원환 바깥에 있는 타자들(및 무의식, 비언어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들의 일체)과의 관계에서 이론적 파산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쉐프가 훗설의 현상학과 관련하여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타자에 대한 경험이 나의 사적인 체험 안에서만, 또한 나의 전망에서만 전개된다면, 내가 타자에게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자아활동의 결과로서 나의 표상, 나의 의도, 나의 환상이 아닐까? … 나는 모든 감정이입과 이해 속에서 내 고유한 에고를 비추는 반사 상자 속에 갇혀 있는가?”(박영도, 「의사소통 이성과 그 불만」참조)


현상학적 사회학이 간과한 타자로서 지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식적 차원에서 언어화되지 못하는 무의식, 나아가 이 세계의 현실에서 오로지 그 증상을 통해서만 실재가 파악되는 자본주의의 구성적 외부라 할 수 있는 계급적대의 모순, 덧붙여 모든 정상성의 범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것들(이른바 잉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적어도 그런 점에서 같은 사회학이지만 사회의 구성에 있어 행위자들에 내재하는 담화적 의식 및 관행적 의식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적 동기/인지의 차원까지도 함께 고려했던 기든스의 사회구성론이 훨씬 사회학적으로 설명력이 풍부하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버거가 그토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더 정확히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실정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나 68혁명과 같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와 대결하고자 했던 이념이나 운동들에까지 극도로 적대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생활세계의 역사적 특수성 또는 구조적 결정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생활세계의 구성적 차원을 아무리 강조할지라도). 생활세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곧 생활세계를 역사적으로 특수화시키는 생활세계의 외부적 조건, 다시 말해 생활세계의 “상징화, 즉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언어로의 번역에 영원히 구성적으로 저항하는 ‘외상적 핵심’”, “주체화-상징화에 저항하는 잔여”를 버거가 인지하고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바로 여기서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총합(ensemble)임을 파악했던 마르크스의 상대적 탁월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버거의 현상학적 사회학이 견지하는 사회적 구성주의는 보다 큰 사회적 힘, 즉 구조나 체제와 같은 것이 상호주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생활세계의 사회적 현상에 대해 행사하는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버거에겐 현실이란 상식적 믿음이 구성되어 영속되는 것인 반면에, 이 믿음 자체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나 관료제와 같은 외부의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란 점이 철저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역시 그런 점에서도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에 근거한 사회구성론이 버거의 그것보다 훨씬 이론적으로 설명력이 풍부하다). 바로 이러한 이론적 무능력이 결과적으론 버거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배태한, 또는 지금까지도 가능하게 유지시켜주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는 것 아닐까?  


내 나름대로는 버거의 이데올로기적 보수성의 철학적 배경을 찾아보고자 시도했다. 다소 억지스러운 논증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나마 이런 작업을 통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유익을 찾아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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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 강신주라고 하는 철학자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도 없다(철학을 좋아하고 철학책을 즐겨읽는 편이지만). 알라딘 신간리뷰 때문에 처음 이번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오늘날 유난히도 잘 ‘팔리는’ 작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저자 강신주가 김수영을 해석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그건 단연코 ‘단독성’과 ‘자유’이다. 저자는 특히 3장과 4장에서 단독성을 중심으로 김수영의 생애와 작품을 해석하고 있고, 6장부터 마지막 10장까지는 반복해서 김수영이 추구했던 자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가 새로움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새로움을 추동하도록 한 동력은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한 집요한 이상이자 이념이었다. 과거의 낡은 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이 이런 강인한 이념을 한시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p.115)

 

아하. 그렇구나. 김수영은 단독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녔던 시인이었나 보구나. 이건 그 어떤 김수영 해석자나 연구자들도 잘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저자의 해석이 흥미로웠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단독성으로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자.

 

단독성은 글자 그대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이다. […]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개체나 사건들이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을까? 그래서 들뢰즈는 ‘일반성’과는 다른 ‘보편성’(universality)의 원리를 제안하다. 그것은 지극히 단독적인 것만이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p.117)

 

강신주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벤야민과 라시스의 사랑을 예로 든다. 두 커플 각각의 단독적인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두 커플의 사랑에는 사랑의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계속 읽어 나갔다.

 

사실 시인, 혹은 모든 예술가는 들뢰즈의 새로운 도식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살아 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 시인은 단독적인 삶을 통해서 인간적 삶의 보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것은 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시를 완성했을 때, 시인은 보편적인 시를 완성한 것이다. […] 김수영은 단독성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태든 자신이든 간에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종교나 진정한 시는 타자의 단독성, 혹은 타자만의 고유한 내면을 향해 열려 있어야만 한다. (pp.117-118)

 

여기까지 읽고 나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이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강신주가 단독성으로 번역하고 있는 들뢰즈의 singularité는 국내 철학계에선 일반적으로 ‘특이성’, ‘단독성’, ‘고유성’, ‘독자성’ 등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왔다. 특이성이건 단독성이건 고유성이건, 어쨌든 그 의미가 중요할 터.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세계 및 그 삶의 모습을 해석하는 키워드로 적용하고 있는 들뢰즈의 단독성이 정말 이런 방식으로 적용되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오랜만에 들뢰즈의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저 개념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게 됐다(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면서 알라딘 리뷰를 쓰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철학 전공자도 아닌 입장에서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실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변용을 통해 생성중인 ‘순수사건’이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의 용어를 빌려 어떤 경우에는 ‘주체 없는 개인화’는 또는 ‘엑세이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강신주가 김수영을 단독성의 화신이라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런 것, 즉 사람이나 주체, 사물이나 실체에 관한 개체화 양식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개체화 양식이다(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pp.241-243 참조). 


다시 말해, 들뢰즈의 단독성 또는 ‘단독적인’(singular)은 보통 다수(plural)에 대립되는 ‘개체적인’ 대상이나 인물과 관련된 그런 의미로 쓰이는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강신주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런 방식의 단독성은 일반성/특수성 도식에 입각한 사유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그와 달리 들뢰즈의 단독성은 개별적이지만 일반에 포섭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 완성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타자와의 차이, 비존재와의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그 자체로 차이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갈무리, 2004, pp.299-300 참조). 물론 이 차이는 표상들에 의해 분류되고 정리되기 이전의 차이들, 즉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즉자적 차이들이다(이종영, 『정치와 반정치』, 새물결, 2005, p.63 참조).  


좀더 자세한 이해를 위하여, 들뢰즈가 단독성(특이성)에 관해 직접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려 한다.


하나의 어떤 생명을 구성하는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이 그에 대응하는 정해진 한 생명의 우연한 일들과 공존한다. 하지만 이때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은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모이지도, 나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개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심지어 특이한 생명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어떠한 개별성도, 특이한 생명을 개별화하는 그 어떤 다른 동반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아이들은 그들 모두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그들은 미소, 동작, 찡그린 얼굴과 같은, 주체적인 성질들이 아닌 사건들을 지닌다. 말하자면 순수 역능인 내재적인 생명이, 고통과 연약함을 뛰어넘은 지복이기까지 한 내재적인 생명이 아주 어린아이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보여주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내재성의 평면을 채우는 한에 있어서, 또는 엄격하게 보면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선험적인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한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비결정을 떨쳐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은 결코 경험적인 의미의 비결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재성에 대한 결정 또는 선험적인 의미의 결정 가능성을 나타낸다. (들뢰즈, 「내재성: 생명」,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p.515)


나는 들뢰즈 자신의 특이성(단독성)에 관한 고유한 개념화가 강신주가 부연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이라고 하는 식의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설명하는 식으로 단독성을 이해한다면, 그건 그냥 개(별)성과 아무런 차이를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로서의 단독성은 무수한 매개들을 거쳐 형성된 개인의 개별성과는 전혀 다른 층위, 즉 이데아가 아직 개체 속에서 구현되기 이전의, 즉 선험적인 장에 속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개인화 이전의 자아, 주체화 이전의 자아이며 스스로 지각할 수 없는 자아인 것이다. 주위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과 식별이 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그런 들뢰즈의 섬뜩하기까지 한 비인격적이고 비주체적인 차원의 단독성 개념을 가지고 와서 김수영이란 인물을 단독성, 아니 다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이라고 하는 매우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개(별)성을 욕망했던 인물로 그려내는 강신주의 작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김수영을 한 명의 자유분방한 리베르탱(libertin)으로 그려내는 저자의 화려한 필치에 감동도 많이 받게 되고, 또 김수영의 인간적인 면모도 새롭게 알게 되어 재밌기도 했지만, 철학적인 개념을 진술하는 대목에선 계속해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영이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또 실제 시인으로서의 삶도 그러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굳이 맥락과 잘 맞지도 않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끌어들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엄밀한 개념을 상투적으로 적용하면서 일상과 철학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들뢰즈 철학 및 그 윤리학의 급진성(비인칭적/비인격적 익명성으로서의 주체론에 기초한)을 너무 단순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덧붙여, 이 책에선 지나치게 김수영에 대한 찬사와 정당화 일변도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은데,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김수영이 정말 들뢰즈적인 의미의 단독성을 가진 비인칭적 주체에 관한 대명사로서 김수영인지, 아니면 강신주라고 하는 인물의 자아이상(ego ideal)인 동시에 이상적 자아(ideal ego)인지 계속해서 의문스러웠다. 다시 말해 강신주가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상징적 위치이자 규범이며 가치로서 김수영으로 지칭되는 어떤 관념, 저자의 용어대로 하자면 인문정신이 결국 김수영이라고 하는 대단히 문제적이고 복잡한 역사적 인물에게 (그 인물을 우리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여 문제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정해진 답으로 제시하는) 무비판적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런 강신주의 자아이상으로서 발명된 김수영이 결국 강신주에게 있어선 타인들이(혹은 독자들이) 그렇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강신주 바로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김수영과 어떠한 거리두기도 없이 김수영을 인문정신의 화신으로 그려내는 이유가 나로선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시종일관 반복해서 김수영을 따라서 우리는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어떻게 그런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김수영이 저자의 자아이상이자 이상적 자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김수영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로서 김수영인 것이다. 그러니 애써 이 책에서 김수영과 강신주를 구별할 필요도 없고, 강신주를 넘어 김수영에게로, 김수영을 넘어 들뢰즈적인 단독성의 세계로, 혹은 인문정신의 자유로운 주체로 가는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비판적 거리두기의 상실! 곧 감상주의로의 투항!). 그저 이 책을 통해 강신주가 재현한 김수영(혹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이 아닌 미지의 다른 김수영을 만나고 싶다는, 그래서 강신주가 포착하려는 개념으로 쉬이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는, 그런 새로운 자극과 충동을 강하게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역설적인 의의를 발견했다.   


나로서도 이 책을 읽고 김수영의 시와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에 대해 참으로 새로운 관심(의 의욕)을 갖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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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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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정의와 도덕이 자본과 만날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는 내내 샌델이 인용하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먼저 그의 성실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까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샌델의 저작들, 가령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나 『왜 도덕인가?』를 읽은 사람, 혹은 샌델의 하버드 강의 동영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만 봐도 샌델이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부제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이다. 시종일관 유지되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은 “시장화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시장화(혹은 상품화)로 인해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폐해는 무엇인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 폐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불공정성(또는 불평등성)이고, 둘째는 (가치 또는 도덕적 선의) ‘부패’ 또는 ‘타락’이다. 샌델이 시장화(상품화)의 폐해를 불공정성과 부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제기된 두 가지 문제의식, 즉 ‘정의’와 ‘도덕’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르러 마침내 “시장”, 더 정확히는 “자본”의 문제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종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는다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시장지상주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위기를 전세계에서 수집한 사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조금씩 다르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장지상주의와 같이 그 의미 전달 방식에 있어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훨씬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친숙할지 모른다.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혹은 소박한(?) 표현으론 도저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들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터. 그 단어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명칭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야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그 이름.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그러고 보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이상하리만치 잘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고, ‘시장화’니 ‘시장지상주의’니 또는 ‘경제화’니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너무나도 소상하게 밝혀내며,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지만, 정작 샌델은 그런 시장(지상주의)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시장화나 경제화 같은 용어들이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용어라 할지라도, 거기엔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법률, 사회적 관습 등을 포함하는 각종 제도나 국가의 정책,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더 나아가 미셸 푸코와 통치성 학파의 연구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는 일련의 이론적 원칙들과 사회-정치적 실천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각 개인을 자본주의적 주체로 구축하는 복잡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이며 지식과 정서를 아우르는 합리성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즉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특권적인 주체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도하는 후기 근대의 다양한 주체성의 형상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 혹은 통치성과 불가분한 것임을 의미한다.1)

 

예컨대 샌델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우정이나 인간의 장기(臟器), 어린 아이들, 명예, 대학 입학허가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장화에 반대하는 논리의 주된 근거를 공정성과 부패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자.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논쟁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시장 교환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항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농부가 굶주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이나 각막을 팔겠다고 동의할지 모르나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공정하게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 공정성과 관련한 논거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동의, 좀 더 정확하게는 공정한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동의이다. 시장을 이용한 재화 분배에 찬성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시장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재화를 주어진 가격에 팔지 말지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157~158쪽)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샌델은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패에 관한 반박은 다르다. 이는 시장의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특정 도덕적 ‧ 시민적 재화는 사고파는 경우에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된다. 부패에 관한 논쟁은 공정한 거래계약 조건이 성립됐다고 해서 충족되지는 않는다. 평등한 조건과 불평등한 조건 아래서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는 동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 평가와 교환 때문에 변질되었다고 여겨지는 재화의 도덕적 중요성에 호소한다. […] 부패 논쟁은 재화 자체의 특성과 재화를 지배하는 규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공정한 거래 조건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힘과 부에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7~159쪽)


샌델은 공정한 또는 평등한 거래계약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다시금 그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시장화로 인한 도덕적 위기는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델의 질문은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정한 계약조건을 가정하면서,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부정의나 불평등성,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착취’와 ‘계급적대’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공정한 계약조건 속에서 재화의 본래적 사용가치가 왜곡되고 부패하는 문제로 건너뛴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물건은 그것의 쓸모(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능성(교환가치, 즉 상품가치)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물건의 교환가치는 화폐 속에만, 그리고 그 물건의 사용가치는 상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식으로 시장지상주의사회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윤리적인 시장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공정한 계약조건’이라고 하는 샌델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싶다. 나는 시장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접근도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시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다는 것, 경제의 영역엔 그 나름의 윤리가 있겠지만, 그 윤리는 우리가 비시장의 영역에서 찾아왔던 그런 윤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라는 것, 따라서 시장, 자본주의, 경제학, 그 어디에 대해서도 우리는 ‘윤리적 정당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애초부터 시장의 성립과 그것의 작동방식이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서 공정함이나 평등함을 기대하며, 억지로 공정함과 평등함을 가정한 뒤에 다시금 재화의 가치의 부패를 논한단 말인가? 경제의 영역은 결코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인간이 선해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경제는 사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발상, 즉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발명하여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성의 전횡을 제한하고 통제하려 한 것이다. 사회적인 것이 과연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별도의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 문제를 여기서 다루긴 어려우니 일단 원래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데 자발적으로 계약한 주체들의 실천이 정말로 실천 그 자체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발견하려는 고투 가운데서, 그런 계약을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실은 체제가 규정한 틀 안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즉 생존을 우선시한 전략적 타협의 일환으로 계약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계약이 체제가 설정한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주체의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선택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체제 내지는 사회가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다시 말해 체제의 질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것일 때 비로소 자발적인 것, 즉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자유의 행위(act)를 선택한 주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주체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윤리적 선택,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얻게 되는 체제의 질서 바깥이란 곧 사회적/생물학적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를테면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개개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과 자기향상을 위해 노동 이외의 여가시간까지 모두 희생하여 자신에게 끊임없이 투자하고, 스스로의 비용과 편익을 철저하게 결산하며 삶을 관리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간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기계발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인적자본으로서 노동시장 안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체제의 질서를 내면적으로 규범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계발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체제에 의해 주체의 외부에 설정되어 있던 선택지의 조건을 주체가 벗어나는 순간, 그/그녀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죽음’이 아니고선 현재로서 이 체제의 바깥으로 완벽하게 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배치하고 규정해놓은 ‘삶의 자리’를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그런 위험이 뻔히 전제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안에서 주체들의 자발적인 계약이란 전혀 공정하지도, 전혀 평등하지도 않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시장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러한 우리의 삶의 조건, 즉 과거에만 해도 비시장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들에까지 시장원리가 파고든 오늘의 현실이 과연 정의롭고 선한 것인지 부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질문은 앞서 내가 말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제도적 차원의 메커니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분노를 넘어 

 

샌델은 차마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의 관점에서 간단히 정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장의 논리를 사회 전체에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국가 개입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그 체제 내의 개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서, ‘경쟁’이라고 하는 시장의 제일원리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접합’시킴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식의 통치양식인 것이다. 요컨대 시장경쟁의 원리를 사회 전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전에 없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상품화가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사회의 시장화란 결국 자본이 국가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통치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비판이론가 하버마스 역시 샌델보다 수십 년 앞서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병리성의 본질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테제로 요약한 바 있다[물론 푸코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포괄, 즉 정부(통치)에 의한 시장원리의 전면적 증식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어온 또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생활세계는 이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하는 체계 논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 사회, 인격이라고 하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들이 파괴되며, 결국 문화적 의미상실, 사회적 규범들의 정당성 훼손, 개인의 인격성 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物化), 경제적 배제, 인간의 자기 소외 등이 나타난다.2)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복지국가에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후기자본주의적 통치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가 샌델의 시장지상주의 테제보다 훨씬 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적어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켜버린 체계를 말함에 있어, 그 체계의 하위범주에 시장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체계는 경제체계와 행정체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한 이중적 체계가 생활세계로 침입하여 그것을 식민화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식민화는 시장의 단독적인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시장이 국가를 통해, 혹은 국가와 더불어 관철시킨 것이며, 이는 복지국가의 시대나 복지국가의 위기와 더불어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나 본질적으론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복지국가의 시대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견인한 주된 요소가 국가적 관료제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엔 시장의 경쟁원리라는 것일 뿐. 물론 우리로선 국가의 억압적 지배보다 자본의 달콤한 지배가 더 강력한 지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모두 넘어서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요청되는 것이다.   

 

샌델의 책이 주는 많은 교훈과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읽고선 우리 시대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건 시장지상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바꿔 읽을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다만,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계약조건의 불공정함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의 부패를 넘어) 우리 삶의 위기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을 탐구하려는 자극과 동기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주

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0); 사카이 다카시/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서울: 그린비, 2011).


2) 위르겐 하버마스/장춘익 역,『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서울: 나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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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9 1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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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9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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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0 1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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