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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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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넘어선 진보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자음과모음, 2016. 3.

 

오랜만에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지젝의 사상은 강렬하다. 얇지만 깊다. ‘지젝 읽기는 불가피한 필연이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서평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로도 충분하다. 때를 기다린 듯, 신자유주의 세계정세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람에겐 시기적절한 책이다. 지젝은 진보의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생각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간다. 또한 모든 종교의 어두운 잠재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유로파스탄이 될지도 모르지만,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생각일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 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15)이니까. 하지만 지젝은 철저한 근본적 성찰로 사유를 전환한다. 연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지젝은 난민에 대한 고결한 이타주의가 가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반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듭된 물음으로 유럽의 전통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19)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를 위협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이슬람 공포에 대한 죄책감을 반성하기보다는 얼마나 강력하게 글로벌 자본주의와 결탁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는 행위로만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진보 프레임을 넘어선다. 지젝이 명명한 해석학적 유혹(48)’은 사회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 서울 강남 지하철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면서 지젝의 냉철한 판단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는 어떤 분출에 어떤 심오한 의미나 메시지가 숨어 있는지 찾으려는 유혹(48)”이 개인의 성찰의 깊이처럼 취급되고 있다. 인과 관계를 역치할 수도 없고, 하나의 결과에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고, 그것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젝은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46)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새로운 계급투쟁이다. 우리가 수많은 지구촌 문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에 발생하고 있다. 난민 문제는 그들을 유럽이 받아들여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지 않다. 아랍과 서구를 대결 구도로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명확하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초기지라는 점에서 아랍과 서구로 양분되지 않는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보다 명확한 기준은 바로 계급이다. 감상적 연대가 아닌 계급적 연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젝은 페미니즘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과학은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 질문의 방향을 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패턴으로 고착 된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홈 패인 레일을 달릴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한다(65~66).

    

지젝을 읽으며 새삼스레 대학 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나누었던 하찮은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삼성 이건희와 가까울까, 미국에 살고 있는 홈리스와 더 가까운지와 같은 유의 주제였다.

 

여기에 소통에 관한 지젝의 생각에 내 생각을 포개어 본다.

 

더 많은 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소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 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생활 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91).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한다는 거다. 자식 나이니까.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 격이 없어서 등등 참 많은 이유가 있을 법 한데, 반말은 상대를 하대하는 것이고, ‘늙음의 바로미터라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가족 같은직장과 가족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사람들은 직장을 가족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그 순간, 꼰대 짓이 시작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반드시 권력을 동반하고, 거리두기에서 실패한다. 소통은 소동을 만들 것이고, 공존의 평화를 깨트린다. 권력관계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인간들을 상대해주겠는가?

 

약자는 연민으로 타인을 약자로 만든다. 감정에 기대면 기댈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난민, 가난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101)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젝에게는 확실한 대안이 있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이 있더라도,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만들기. 이 제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 방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이다. 지구촌은 그때 비로소 공동의 문제에 대한 연대 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계급적 연대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두고두고 다시 펼쳐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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