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잉문학(잉여+ 인문학)에서 인문학으로

덕후감, 김성윤 지금, 북앤더갭, 2016. 1.

    


신간 덕후감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이자 소장인 대중문화 연구가 김성윤이 그간 써왔던 비평 글을 모아 새롭게 구조화한 책이다. 대중문화 텍스트에 대한 분석도 좋지만, 대중문화 연구 자체를 메타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유익함이 크다. 이 때문에 독자는 저자와 함께 고민의 지점을 찾을 수 있다.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콘텍스트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며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의 고민을 오롯이 느껴진다. 마르크스 이론을 학습하고, 1990대 문화의 수혜를 받은 486세대 저자는 대중문화를 정치경제적 역사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언젠가 친구가 문화연구를 계속할 거냐고 묻길래, 난 한번도 문화연구자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역사유물론을 할 거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19).”

 

이 책은 크게 6장으로 구성된다. (새로운 대중들 : 팬덤의 사회학,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 사회를 유지시키는 마술, 이데올로기의 귀환, 정치적 소실점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윤리, 정치의 표류 : 스펙터클 또는 유령의 정치) 각각의 장은 주제에 따라 분량도, 방식도 개별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어떤 장을 먼저 읽더라도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주제가 갖는 시의성이다. 대중문화의 특성 상 기고했던 글을 모아 놓다 보니, 시기적으로 이미 과거에서 종료된 현상 분석도 더러 있어서 실제성이 조금 떨어진다.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게, 공감과 문제 제기가 가능한 글들이다. 특히 영화 <써니> 이후, tvn<응답하라 시리즈>로 이어지는 복고에 대한 비평 글은 새로운 성찰을 일깨운다. 레이건노믹스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자, 미국의 호황기였던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방영되고 있다. 이를 공동체주의에 대한 향수, 보편적 추억의 공유와 같은 단편적인 이해로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고도의 경제 성장기였던 70~80년대 한국 경제에 대한 환상이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동력일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 파병, 탄광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취업, 한일 협정의 보상으로 일본에서 넘어온 자본을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덮고,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연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호시절은 없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싫어하는 걸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172). 때문에 문화연구는 여전히 힘을 갖는다. 문화 현상의 이면을 읽어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암울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계속 회전되어야 할 때, 가장 채택하기 쉬운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152).

 

<6장 정치의 표류>에서 다루는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 국제시장변호인을 둘러 싼 해석 전쟁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두 편의 영화가 모두 반() 정치적이지만,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측면에 동의한다. 두 편 모두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인간 노무현을 다루겠다는 제작자의 선언 비슷한 입장에서도 이 영화는 절대 정치인 노무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제시장의 아버지는 위로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래 세대를 지켜야하는 아버지의 지위에서만 존재한다. 초월적 아버지의 아들이며, 적잖은 식솔을 거느린 가부장의 아버지(301) 외에는 주체의 존재론적 고민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인공의 존재 방식은 오로지 희생적인 아버지. 두 편의 영화는 모두 텍스트적 징후로서 정치인 박정희와 노무현을 호출하고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정치적 지향점을 판단 중지하고, 이 두 영화가 동시에 같은 수준의 정치적 퇴행이라고 말하기엔, 괄호 안에 갇히는 사실( 혹은 진실)이 너무 크다.

 

소망의 거울

 

저자는 대중문화를 소설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소망의 거울에 비유한다. 우리는 거울과 나의 관계에 직시하듯, 대중문화와 자신의 관계에 직면해야 한다. 대중문화가 대중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선택에 따라 해석되는 콘텍스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텍스트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 텍스트와 사람 사이에서 촘촘하게 의미가 부여된다.

 

대중자신을 경계하기

 

문화 연구가 교양 있고 비판적인 대중에게 행복을 약속해주는 좌파 담론이자 정치적 태도였지만, 그런 식의 행복이 독자 대중에게 자기 위안과 기만을 제공하는 헛된 것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대중에 대한 신화도, 맹목적인 자기 과신도 경계해야 함을 깨닫는다.

 

제목에 담기지 않았지만,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것은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덕후감이라는 낯선 단어가 일본어 오타쿠에서 오덕후, 덕후로 변형되어 한국에서 사용되고, 이를 출판사가 마케팅 전략으로 반영한 듯하다. 여기에 덕후감독후감을 연상하게 하는 효과 또한 발휘한다. 하지만, 책은 - 덕후에 대한 감상문이라기보다는 대중과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와 비판을 가하는 진지한 연구가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최근 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서 느끼는 복잡한 심정과 맞닿아 있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받았다. 이런 저런 고민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독서였다.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타인과 자신의 질문 속에서, 답을 찾는 과정에 있기도 했다. 평범한 독서 모임으로 알았는데, 연구회 성격이 강하다는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회원이 계셨다. 몇 달이 가도 얼굴 보기 어려운 회원도 계시고, 발제가 부담스러운 청강생도 여럿 계신다. 애정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과연 읽고 쓰는 것에서 우리 회원들이 기대하는 것은 뭘까? 혹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위안과 기만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교양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적 포장지가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은 외부에 대한 시선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자학하고 싶지는 않다.

 

읽고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도 지적 유희도 아니다. 제대로 존재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로서 읽고 쓸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 변화하는 의식의 한 지점을 박제하여 드러내는 일이 마음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글을 쓰고 공개하고 평가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큼 우리의 의식을 견고하게 만들고, 자기 인식과 배려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잉문학(잉여+ 인문학)에서 인문학으로, “학문애호가적 기질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