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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이항대립 속에 존재하는 21세기 서울,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2014. 12.
이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면적 605.28㎢,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분석은 끝이 없다. 서울에 대한 분석은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모든 기제에 대한 분석을 동반한다. 서울과 서울 아닌 곳, 둘로 나뉘지는 21세기 한국은 서울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거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속에서도 서울만의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명사 ‘서울’은 보통명사의 속성을 갖는다.
서울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이후, 지식인 산책자들은 경성 곳곳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가져왔다. 작년 딱 이맘때 출판된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민음사, 2014. 1.)는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http://blog.aladin.co.kr/educaso/6918092) 서울의 밑 낯을 보는 일은 '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다.
넘쳐나는 서울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의미 있다는 것은 과잉 개발의 건조한 도시가 여전히 진화하는 생물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해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경제학 교수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류신과 다른 시점에서 서울에 접근한다. 시간과 공간, 구조와 개인의 교차점에서, 보편과 특수의 총체로서 서울을 바라본다. 경제학자의 인문학적 기술은 사이사이 분석을 요구한다. 낭만적 키워드나 (‘그땐 그랬지’ 식의 어법을 사용하는) 추억의 말랑말랑함은 아니란 이야기다. 경제학과 민족지학이 결혼해서 한집에 사는 느낌이다. 류동민 교수의 감수성과 문체는 그가 얼마나 문학에 천착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재는 구체적으로 저자의 관점을 드러낸다. 4개의 장을 구성하는 소제목은 좀 더 서울을 명확하게 한다. 배제와 물신, 남겨진 공간 & 사라진 공간, 등고선의 은유, 높이 날고 싶은 은유가 서울의 키워드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매번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를 이번에는 참신하게(??) 지방에서 진행하자고 하여 전주에서 열렸다. 학회 참석한 교수님과 연구자들은 거의 여행자의 복장과 태도였다. 청명한 공기에 대한 찬사, 한상 번듯하게 차려진 음식에 대한 칭찬, 느린 삶의 방식에 대한 부러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아파트값에 대한 감동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결론은 ‘그래도’ 서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서울은 여전히 성공한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몇 배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번 벗어나면 재진입이 어려운 공간이다.
몇몇 공간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다. 스타벅스의 영업 방식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지 않은 스타벅스 컵 사이즈에 대한 논란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을 보면, 고급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스타벅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스타벅스 관계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스타벅스의 사이즈가 tall, grande, venti라는 것에 문제 제기를 했다. 스타벅스에는 아메리카노 short 사이즈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카페 short 사이즈와 스타벅스 tall 사이즈가 같다는 것. 나는 왜 한번도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냥 스타벅스 방식을 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한 것이다. (이는 IKEA의 한국 상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값싼 가구를 좋아할 것이라는 분석은 정확했지만, 인터넷 정보력은 세계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 구매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만만한 소비자는 아닌 모양이다.^^)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도 “여섯 가지를 결정하도록 만듦으로써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곳(39쪽)”이 스타벅스다. 우리 동네 카페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레드, 블루, 엘로우 중 선택하라고 한다. 그야말로 선택 과잉이다.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버버리를 입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반백의 노인들이라면 모를까,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의 도움 없이 오늘날의 한국 카페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다.
대립이항의 분리 속에 존재하는 서울, 한국은 서울 아니면 모두 ‘지방’이다. KTX는 모두 서울에서 출발하고, 서울로 향한다. 서울은 지방을 외부로 분절되어 있고, 강북과 강남이 내부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도 무수한 대립 항이 존재한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해결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61쪽)
아파트가 여전히 부의 상징인 점은 한국 사회의 매우 특이한 점이다. 다른 선진국은 개발 초기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교외 전원주택으로 상류층이 대거 이동해왔다. 한국은 산업사회를 넘어선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부자들이 아파트를 선호한다. 모 아파트 광고에서 ‘이민정’ 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데려다 준 선배에게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키자, 선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파트의 브랜드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 취향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준다. 그 이후에도 아파트 광고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보여주는 자격증이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을 벗어나면 주변 외곽일 거라는 기대를 깨고, 이제 서울은 일터, 제주를 삶터로 닦아가는 상류층이 늘고 있다. 제주도 땅값을 뒤흔드는 ‘그들’은 시공을 포갤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과 바다를 넘어 제주도를 제2의 서울로 만들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재현하는 저자의 어려움이 컸던 만큼, 읽는 독자의 감동은 컸다. “중의적이고 불투명한 글”, 그래서 발생하는 미학적 가치는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문맥 사이 호흡도 길어지고, 말랑말랑하는 문장 속에서 맑스 경제를 떠올려야 한다. 때때로 저자가 읽은 문학과 영화가 곳곳에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서울을 연구의 대상으로 변주했듯, 서울에 대한 개별적 경험은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총체적으로 만난다. 잠시 서울에 머물고, 오래오래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서울을 현재로 호출한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매번 서툰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설레임 속에서, 언젠가 사람이 떠나도 장소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명징한 확신을 한다. 서울은 그렇게 과거이자 현재로, 분석의 장소이자 느낌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공간 실천’을 행동을 불러오는 특수성의 공간임에 틀림없다.<끝>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