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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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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인 세계, 비관적인 대안.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저,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2011. 3. 11. 오후를 잊을 수 없다. 금요일 저녁 식사 모임, 식당 TV로 일본 대지진 상황이 방송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었지만, 우리나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거라는 염려도 했지만, 인류는 이제 2011년 대지진 전후로 나뉠 거라고 생각했지만, 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를 흔드는 가시적인 변화는 없는 듯하다.

 

 

20127.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대지진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처참한 대지진 우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수잔 손텍이 내전 중인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를 여행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연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전쟁의 일상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쟁은 단시일에 끝나지 않는다. 수년간의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야 한다. 대지진 이후에도 일본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단 패러다임은 변한 듯하다. 미래를 준비하던 이들이 이제 현재만을 살게 되었다는 것. 소비가 증가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함께 우리나라와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염려했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종교 속에서 구원 받았고, 명상과 수련을 통해서 삶의 평화를 얻었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정치를 삶에서 배제한 대부분의 지인들은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다. 내향적으로 끼리끼리 무리 짓기과정 속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자기 충족화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나이가 되면 인간은 두부류로 나뉜다. 생존을 목적으로 살거나 개인의 안위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나와 같은 회색분자들은 위, 아래에 존재하는 클래스를 보면서 흔들린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즈음, 읽게 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참으로 반가운 책이다. 어느 시대보다 최고의 풍요속에 살고 있는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들, 모두 함께 누리는 듯하지만, 과거보다 더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도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는 1985年生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젊은이의 탄생과 종언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 종국에는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를 차례로 분석한다. 젊은이의 젊은이 분석과 일본을 한국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젊음 또한 상대적이다. 신인류. 젊은이의 개념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탐색한다. 얼마 전 뉴스 앵커의 스물여덟 어린 나이에라는 표현을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스물여덟을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젊은이들, X 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십 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젊은이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어도 그 전형에는 변함 없는 속성이 있다. ‘버릇없는 젊은이, 당연한 듯 보이는 세상을 향해 문제를 던지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모든 젊은이들의 공통분모이자 전유물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실제적인 사례가 풍부한 민족지학적 연구라는 점이다. 저자의 젊음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이 필요할 듯하다. 역시 젊다. 상황이 나쁘다하더라고,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자세에서 희망을 찾는다. 쉽게 쓰였고, 매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붙어 있는 주석 453개는 저자가 얼마나 성실한 사회학자인지 알게 한다. 핵심 질문은 간단하다.

 

첫째,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해야 하는가?

둘째,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셋째, 적어도 우리가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해제를 쓰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의 저자) 오찬호씨와 같은 질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저항이 사라진 젊음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있고, 개인의 행복을 향해 끼리끼리 집단으로 들어가 버린 일본 사회의 문제를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 체념의 행복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할거라는 불안이 몰려온다. 국가 없는 국민에 대한 공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을 잠식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생존을 위해 살아가다 쓰러지는 젊은이를 훨씬 더 많이 보게 될까봐 두렵다. 그들이 맘껏 저항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미래 역량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어른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책 끝머리에서 우리 의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나를 알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결국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필요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암 촘스키의 말처럼 세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고 쓰고, 사람과 부대끼는 접속을 통해서 세계는 나에게 다가온다. 이 땅에서도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처럼 세계와 접속할 줄 아는 불행한젊은이를 기대해보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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